
그도 나 때문에 슬퍼하지 않고 나 때문에 기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어느날 새벽 이슬이 축축하게 내린 강둑길이 내려다보이는호텔 창가에서 스타킹을 신다 말고 그에게,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이제 너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식으로는"
하고 말할 생각도 결코 없다. 대신에,
"난 외로워서 상처를 입었거든" 이렇게 언젠가 말하였다.
"나는 애정 속에서 질식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
"언제 그런 걸 느꼈니?" 그가 넥타이를 매면서 물었다.
"여섯살 때"
"조숙한 거니, 불쌍한 거니"
"양쪽 다 였을 거야, 아마"
"나는 섹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
"그게 언제였는데?"
"고등학교 이학년 때"
나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그의 등을 보고 있다.
열어놓은 창으로는 젖은 새벽 풀잎 향기가 물결치면서 밀려온다.
서울로 향하는 국도에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있다.
그가 구두를 신으면서 한 손을 더듬어
테이블 위의 마시다 만 김빠진 맥주가 담긴 잔과 립스틱 묻은 담배꽁초,
어지럽혀진 냅킨들 사이에서 담뱃갑을 찾아내어 주머니에 넣는다.
섹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고등학교 이학년의 남자아이와
애정결핍으로 영원한 불치병에 걸린 여섯살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호텔방을 나선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 배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