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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내전과 <호텔 르완다>,<썸타임즈인에이프릴>,<블랙호크다운>

강민영 |2007.10.16 15:11
조회 727 |추천 0
 

 지도를 따라 아시아를 넘어서 중동 지역을 지나 좁은 입구를 거친다. 이곳까지 오는 길은 험난하고 먼 여정이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세 교도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지나 작열하는 태양이 주인인 뜨거운 사막을 조금만 넘으면 이제부터 사람들 간의 경계가 생기기 시작한다. 당신이 지금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그 곳, 당신의 두 발이 서있는 이곳은 ‘아프리카’다.


 아프리카는 자연의 축복이 존재하는 땅이다. 때문에 아프리카로 향하는 많은 여행객들은 저마다 다른 희망을 가지고 비행기에 오른다. 어떤 이는 사람보다 나무가 많은 이 땅을 배경으로 다큐멘터리를 찍고자 커다란 카메라를 준비한다. 누군가는 봉사를 위하여, 또 누군가는 숨 막히는 도시를 벗어나 광활한 대자연의 품으로 뛰어들고자 배낭 하나만 챙겨들고 별을 헤는 꿈을 꾼다. 하지만 수많은 발자국을 남기고 돌아와 텔레비전을 통해 만나게 되는 아프리카는 더 이상 아름답고 다채로운 곳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아프리카. 우리는 이 검은 대륙을 두 얼굴의 땅, ‘저주받은’ 땅이라고 부른다.

 

 

 아프리카는 아주 오래전부터 다양한 민족이 공존했다.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는 각 반도마다 엄청난 차이의 문화적 생활과 언어적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보이지 않는 국경이 존재했었기에 충돌이 잦았던 아프리카 대륙은 16세기를 전후하여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던 유럽 열강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자국의 노동력 부족 현상과 풍부한 자원의 나라인 아프리카를 사이에 놓고 프랑스를 포함한 영국, 네덜란드 등의 국가는 커다란 아프리카 대륙을 조각내기 시작했다. 1700년대 후반 미국의 독립과 함께 서구 사회는 아프리카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탐험과 발굴이라는 목적을 앞세워 세계 최대의 식민 시장을 아프리카에 존재하게 만들었다. 가속도를 더하며 유럽과 미국의 손길을 받던 아프리카는 1․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등한 위치에 있던 아시아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다. 아프리카 내의 독립운동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기하급수적으로 독립을 외치는 국가들이 늘어났고, 그 결과 1920년대부터 늦게는 70년대까지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식민 사회에서 해방되었다. 엄청난 원을 그리며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강대국들이 떠나고, 해방을 선언하는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은 이 시기부터 스스로 자국의 통치를 위해 힘을 쏟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온몸에 많은 상처를 간직하게 된 아프리카는 신정부의 수립이 성행하던 1970년대 이후부터 씻을 수 없는 분쟁의 역사에 휘말리게 된다. 


-아프리카 최악의 비극, 르완다 내전

 


식민지, 냉전기의 아프리카는 억압을 받고 있었지만 강인한 외부 세력의 정권하에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탈식민지, 탈냉전기에 들어가면서 아프리카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운 상태로 변해갔다. 아프리카 중앙에 위치한 르완다는 독립 이전부터 투치족과 후투족의 작은 마찰이 계속되던 나라였다. 르완다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벨기에의 통치를 받았고, 벨기에는 르완다의 정권 안정을 목적으로 처음에는 소수 민족인 투치족에게 르완다의 지배를 허락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애초 생각했던 억압통치가 불가능해지는 시기에 다다르자, 벨기에는 다수 민족인 후투족을 충동해 투치족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1962년 실질적인 르완다의 독립이 이뤄지자마자 후투족은 곧바로 정권을 장악했고, 투치족은 후투족에 의한 학살과 핍박을 피해 주변국인 우간다로 대피했다. 그리고 90년대 초반 우간다의 도움을 받아 후투족에 대한 저항이 투치족 내부에서 일어났고, 93년 프랑스와 아프리카 통일 기구의 협조를 받아 두 부족은 평화조약을 맺게 된다. 하지만 1994년 4월, 후투족이었던 르완다 새 대통령의 암살을 시작으로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의 잔혹한 암살이 시작되었고, 이것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르완다 내전의 두 가지 시선, 와


 1994년 투치족 대학살을 중점으로 시작된 비극은 르완다와 주변국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후투족은 라디오를 통해 투치족을 ‘바퀴벌레들’이라고 칭하며 투치족의 근거지가 어디인지까지 자세하게 방송했다. 영화 는 내전이 시작되던 94년 4월, 후투의 신분으로 르완다 내전에서 1268명의 목숨을 구한 벨기에 소유 호텔의 지배인 폴 루세서바기나의 실화를 그린다.


 후투족이었던 그는 많은 유럽인들이 묵고 있는 호텔 르완다 최고급 호텔 ‘밀 콜린스’의 직원이다. 폴은 늘 호텔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단정한 차림을 하고 많은 외국인들의 편의를 신경 쓴다. 르완다 시민으로서는 꽤 상류층에 속하는 그와 그의 가족은 불안한 자국의 정세를 보며 하루빨리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현재 생활이 안정적으로 지속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투치족에 의해 르완다의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대부분이 투치족이었던 폴의 이웃들은 격분한 후투족에게 생명을 위협 당한다. 무작위로 죽어나가는 투치족과 격화되는 내전 속에서 폴의 호텔에 있던 외국 고객들은 황급히 자신들의 나라로 복귀한다.

 

 

 “당신은 내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할 거야. 당신은 오물이야. 우린 당신들을 하찮게 생각해, 폴. 당신들을 오물, 똥으로 생각한다고. 당신은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야. 이 호텔을 운영할 수도 있어. 예외가 있다면, 당신이 검다는 거야. 당신은 ‘아프리카인’이야.”

 유럽군은 르완다 내전이 일어날 당시 후투 자치군을 총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국민의 보호가 우선이었던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의 나라들은 르완다에서 그들이 빠져나오기 무섭게 전 병력을 철수시키다시피 했고, 그 결과 르완다는 완벽한 ‘아수라장’이 되었다. 또 다른 영화 은 많은 르완다 시민의 목숨을 구한 일화를 중점으로 보여주고 있는 휴머니즘 영화 와 달리,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서구 세력의 언론과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인도주의라는 명목 아래 서방의 국가들은 탁상공론을 벌이지만 그들은 르완다의 근본 문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지 않고 ‘집단 살해’와 ‘집단 살해 행위’의 단어에 대한 논쟁을 벌일 뿐이다. 후투와 투치가 아닌 ‘후치’와 ‘투투’ 사이에 ‘좋은 애들’이 어떤 쪽이냐를 묻는 외신 기자들의 특종 잡기와, 학살이 행해질 것을 알면서도 훈련과 무기를 준비해 주었던 벨기에와 프랑스의 인형 놀이는 르완다에 대한 상처의 시간만 지속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 결과 1994년부터 이후 투치족의 반군이 일어나 르완다를 장악하던 1997년까지 거리에는 시체들이 넘쳐흘렀고, 총인구 800만 명 중 100만 명이 100일 만에 사망했다. 후에 르완다는 추가로 50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고, 국민의 1/4이 난민으로 전락했으며, 주변국과의 국경이 허물어졌다.

 

-또 다른 재앙, 아프리카 동북부의 소말리아 그리고

 


 소말리아는 서쪽으로는 에디오피아와 케냐를 끼고 있고, 동쪽으로는 인도양과 맞닿은 반도국가다. 아프리카 동쪽에 위치한 이 반도는 소말리아인이 90%가 넘게 거주하고 있어 아프리카 내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거의 유일한 단일 민족 국가였다. 1880년경 아프리카에 진출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나라에 의해 커다란 소말리아 반도는 분할되었고, 소말리아인은 점차적으로 소말리아가 아닌 다른 국가로 소속되기도 했다.


 현재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고,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소말리아가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여행 금지국으로 확연하게 정부에서 제재를 가한 소말리아는 에디오피아와 함께 기근과 기아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고, 이 현상은 십년이 지나도록 변함없이 지속되어왔다. 소말리아는 본래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여 부족 성향이 강한 국가였고,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주변국과의 잦은 마찰은 더욱 본격화 되었다. 소말리아 내에서는 수십 개의 부족들이 공동체를 이뤄 싸움을 벌였고, 1991년 아이디드가 내전에 최종 승리함으로써 대통령 선출 등 잠시 동안의 평화를 이뤘으나, 정부와 반정부(아이디드)사이의 대립이 다시 찾아왔다. 아이디드를 중심으로 한 끊이지 않는 전쟁은 3, 40만 명이 굶어죽는 기근을 가져왔고, 소말리아의 비극을 막기 위해 외부 국가들은 미 해병대를 투입시켜 식량 수송을 포함한 소말리아 난민을 돌보는데 힘을 쏟았다. 1993년 해병대가 철수하자 아이디드는 UN평화군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같은 해 8월 미국은 아이디드의 체포와 소말리아의 평화를 위해 델타포스와 레인저, 네이비씰 그리고 제160항공단 등의 특수부대를 구성해 파병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이 당시 소말리아 내전의 실제 현상을 그린 것이다. 아이디드의 위상이 날로 가속도를 밟던 1993년 10월 3일, 작전명 ‘아이린’과 함께 막강한 전투 헬리콥터 ‘블랙 호크’를 투입해 소말리아의 안정을 찾고자 했지만, ‘블랙 호크’가 여러 대 격추되면서 두 시간 가량 소요될 예정이었던 작전은 하루를 꼬박 넘기는 시가전으로 변했다. 예상을 뒤엎어 엄청난 수의 아이디드군이 반격해오자 ‘아이린’ 작전의 실패와 함께 미 대통령 클린턴은 델타포스와 레인저를 비롯한 특공대들을 소말리아에서 철수시켰다. 의 결말과 같이 이 작전에서 약 1000~1500명의 소말리아인이 목숨을 잃었고, 19명의 미군이 사망했다.


 전쟁을 가장 ‘현명하게’ 보여주었던 리들리 스콧의 은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의 전쟁영화가 보여준 미국의 우월주의에 대한 전제가 작용하지는 않는 영화이다. 연고도 없는 나라에 흘러들어와 단지 전우애만을 위해 싸우는 병사들을 바라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있다. 93년 사태가 소말리아에서 끝난 후, 단 한 명의 미군도 희생당하지 않을 거라고 자부하던 주장과는 달리 19명이나 되는 사망자를 낸 이후, 미국은 그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지금까지의 소말리아에 대한 서구 세력의 이기주의에서 보여 지듯 1000명에 달하는 소말리아인들의 희생을 무시한 결과를 초래했다. 1996년 소말리아 반군 아이디드는 모가디슈에서 살해당했고, 그 이후 UN에서는 평화를 목적으로 여러 차례 소말리아의 재정비를 위한 군대를 파견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소말리아인들의 기아를 막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하는 평화유지군과 국제 사회의 개입은 지나친 세력 다툼을 낳았다. 실제로 소말리아는 2000년 이후 수십 차례 정부를 수립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지만 부족 간의 문제와 환경상의 문제, 계속해서 이어지는 크고 작은 분쟁으로 인해 그것은 무산되어왔다. 소말리아는 그 후 지금까지 실질적인 무정부 상태를 이어오고 있으며, 소말리아 국경에 위치한 주변 국가들뿐만 아니라 해안선을 따라 다른 나라들과의 분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소말리아의 오랜 내전으로 인해 발생한 난민은 소말리아 반도의 반 이상에 해당한다.


-2007년, 현재의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는 많은 국가를 보유하고 있는 대륙이다. 최근 영화 에서 보여준 시에라리온 내전과 같은 대부분의 커다란 분쟁지역은 2002년을 기점으로 잠식되었으나, 소말리아 반도의 국가들을 비롯한 70% 이상의 나라들은 여전히 국경 부근에서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하루에 몇 백, 몇 천 명이 기아로 굶어죽고, 종전된 분쟁의 중심에 있던 나라들에서 발생한 난민들은 주변국으로 퍼져 종잡을 수 없는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시간에도 아프리카는 1990년대 초반의 분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2007년, 현재의 아프리카에 미래는 없다. 가위로 자른 듯 반듯하게 잘려진 아프리카의 지도들은 이미 서구 세력으로부터 잘라져버린 커다란 대륙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 정부가 없는 상태의, 전혀 새로운 전쟁 양상을 보여준 아프리카는 안정을 위해 노력중이지만 관광산업에 의존해 현실적으로 빈부격차가 급속도로 벌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에서 한 기자는 길거리의 대량 학살을 카메라로 담는다. 이웃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홀로 싸우던 지배인 폴 루세서바기나는 그에게 말한다. “그것을 모두에게 알려주시오. 모든 나라에서 지금 일어나는 사태를 알 수 있게 해주시오.” 기자는 그를 바라보며 답한다.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고는 ‘오 저런, 저렇게 잔인할 수가!’라고 말하고 저녁식사를 할지도 모릅니다.” 


 한국에서 아프리카의 역사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지극히 생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록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프리카를 들춰볼 때, 그것은 세계사적으로 마치 한국과 뉴질랜드의 역사를 엮는 것과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는 시각임은 분명하다. 위에서 말한 의 기자처럼 우리도 아프리카의 상처를 뒤로하고 따뜻한 밥과 반찬을 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아프리카의 분쟁에 대한 지식이, 소말리아에서 UN군이 철수할 때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총을 한꺼번에 놓아두고 갔다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검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 넓은 땅을 ‘누가’ 짓밟았으며, 상처와 눈물을 심어주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아직도 유럽의 국가들은 르완다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을 회피하고 있으며, 10년 전에 일어났던 평화유지군과 미군들에 의해 아프리카 국민들이 받은 이유 없는 살해와 강간, 그리고 학대는 최근에서야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이것은 불과 몇 십 년 전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과 닮아있다.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는 이것을 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아프리카는 슬프다. 우리가 걸어왔던 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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