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이명박이 걸어온 길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삶은 ‘일’과 ‘성공’이라는 단어를 빼놓고선 설명할 수 없다. “굴껍데기처럼 가족에게 들러붙었던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생활전선에 내몰렸고, 고학으로 대학까지 마쳤다. 24살에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27년 동안 원없이 일했고, ‘성공한 시이오(CEO)’로 주목받았다. 서울시장 시절엔 밤낮으로 청계천 복원사업에 매달려 ‘대권행 티켓’을 따냈고, 마침내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공부하고 싶은 어린 ‘풀빵장수’=이 당선자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씨와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씨 사이에서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태몽으로 밝은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꿈을 꿨고 그에 따라 이름도 ‘명박(明博)’으로 지었다.
이 당선자가 네살 때인 45년, 광복 직후 한국으로 돌아가던 이 당선자의 가족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무일푼 신세가 되는 불행을 겪는다. 고향인 경북 포항에 정착한 뒤 이 당선자의 아버지는 목장 일꾼으로, 어머니는 과일행상으로 하루종일 일했지만 가난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단칸방에서 한 식구가 살며 하루 두 끼는 술지게미로 때워야 했다. 그 때문에 학교선 “술 냄새가 풍긴다”며 구박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 당선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6·25가 터져 미군의 폭격에 바로 위의 누나(귀애)와 동생(상필)을 눈앞에서 잃는 비극을 겪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의 장삿일을 도왔던 이 당선자는 김밥·풀빵 장사로 학업을 계속했고,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한 뒤 상경해 막노동에 나섰다. 일일잡부로 살아가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그는 “입학증이라도 받기 위해” 대학 입학을 결심했고, 청계천 상인으로부터 헌책을 얻어 밤늦게까지 노동자합숙소의 등불을 밝힌 결과 1961년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 독학으로 대학입학…6·3시위 주도=대학시절에도 가난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행상을 하던 이태원의 상인들로부터 청소부 일을 얻게 된 그는 이른 새벽부터 리어카를 끌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일하느라 친구 사귈 틈도 없었지만, 그는 고려대 경영대 학생회장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64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하다 옥에 갇혔고, 2심에서 집행유예 3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여섯달 만에 풀려났다. 그는 옥중에서도 경영학 전공 과목에 매달렸고, 정치권에 입문한 운동권 친구들과 달리 기업행을 결심한다.
■ ‘샐러리맨의 신화’를 쓰다=이 당선자는 현대에서 탁월한 추진력과 성실성으로 곧 정주영 회장의 눈에 든다. 어린 시절, 가난이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는, 가난을 이겨내고자 갖가지 실패를 견뎌낸 정주영 회장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일에 대한 집중력에서도 정 회장과 ‘코드’가 맞았다. 68~69년 중기사업소에서 일할 당시, 중장비를 다루는 인부들이 부품값을 과다청구하자, 트랙터를 분해해 재조립하면서 기계의 원리를 죄다 습득해 엉뚱한 비용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정주영 회장이 젊은 시절 쌀가게 배달원으로 일할 때 사흘 밤낮으로 자전거타기를 연습한 끝에 쌀 서말을 싣고도 거뜬하게 달렸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공장 안에 ‘더 빨리’란 표어가 붙어있던 시절, 그의 능력의 요체는 ‘신속정확’이었다. 정 회장에게 보고할 때 미흡한 점이 있으면, 다른 간부들은 정 회장에게 ‘좀더 연구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내일 아침까지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론보다는 현실적인 사고를 하고, 이를 쉬운 말로 표현했다는 점도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였던 정 회장의 마음에 들었다. 예를 들어, 임원회의에서 정 회장이 “자재창고 담당자로 누가 적당하냐”고 물으면, 다른 간부들은 “자재의 성격에 대한 이해와 회계 능력을 갖춘 사람이 적당하다”고 말했지만, 이 당선자는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는 사람이면 된다”라고 답했다. 물품을 빼돌리지 않고, 화재 감독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또 정 회장의 아이디어를 구현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현대건설의 한 관계자는 “84년 충남의 서산 간척지 공사 때 가파른 물살 때문에 나머지 물막이 공사가 애를 먹자 정 회장은 유조선을 이용해 물살을 막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내로라 하는 토목 전문가들이 전복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며 말렸지만, 이 당선자는 홀로 정 회장의 편을 들었고 철저한 계획으로 이를 성공시켰다”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5년만에 공무담당 이사로 승진했고, 75년 부사장, 77년 사장, 88년 회장 임명장을 받는 등 동료·선배들을 제치고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샐러리맨의 신화’를 썼다. 그는 후일 자서전에서 당시를 돌아보며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때처럼 일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정치입문과 좌절=90년대 초 그는 이미 ‘스타’였다. 91년 방영된 드라마 은 운동권 학생 출신 ‘박형섭(유인촌 분)’이 각종 시대적 난관과 부대끼며 성공한 기업인으로 우뚝 서는 과정을 담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가 야심차게 추진한 이라크 토목공사는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 등으로 수십억달러의 미수금을 남기고 막을 내렸고, 정 회장과의 사이도 삐걱거렸다. 결국 92년 초 창당을 결심한 정주영 회장과 결별하고, 민자당에 입당해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96년 총선에서는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물리치고 승리하지만 98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는 시련에 부닥쳤다.
1년여 넘게 미국에서 ‘야인’으로 살았던 그는 2000년 미국에서 돌아와 다시 ‘노병의 성공신화’를 쓰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잘나가는 금융맨으로 알려진 젊은 재미동포 김경준씨와 함께 손잡고 인터넷금융업에 뛰어들었지만 쓰라린 실패로 끝이 났다. 이 대목은 대선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 ‘청계천’으로 날개달다=행운의 신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2002년 청계천 복원사업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서울시장에 당선됨으로써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서울시청 광장 조성, 세종로 사거리 건널목 조성 등 역대 시장의 숙원사업을 신속하게 마무리짓는 한편, 광역 재개발사업이랄 수 있는 ‘뉴타운사업’을 시작하고, 개발사업이 예정돼있던 뚝섬경마장 부지를 서울숲공원으로 바꿔냈다. 대규모 버스체계 개편작업을 통해 버스공영제, 환승시스템을 수립해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울시 공무원들은 그의 일하는 스타일을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이라고 표현한다. 프로젝트의 목표를 설정하고 인적·물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제한된 시간 안에 성과를 낸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가려운 곳을 짚어내는 ‘행정마케팅 능력’, 강력한 추진력, 짜임새있는 업무 관리능력은 그를 ‘일머리를 아는 리더’로 부각시켰다. 특히 2년4개월의 짧은 공사기간 끝에 청계천 5.84km에 맑은 물을 흘려보낸 청계천 복원은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자리잡았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와 청계천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목도한 유권자들에겐 ‘이명박’이라는 이름이 깊숙히 각인됐다.
‘실천하는 대통령’을 공언한 이 당선자 앞엔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새로운 도전들이 놓여 있다. 이제 그의 능력은 또다른 ‘검증대’에 올랐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2007년 12월 19일 (수) 20:38 프레시안
이명박이 살아온 길…'성공신화'의 명암
재벌기업 CEO의 권력 점령, 그 향배[프레시안 윤태곤/기자]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해 해방 이후 부모를 따라 포항으로 건너 온 이명박 당선자의 '초년 고행기'와 이후 '성공담'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포항 동지상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후 1965년 현대건설 공채 입사한 지 12년 만에 사장 자리에 오른 이 당선자는 1992년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지 15년 만에 대통령에 당선, '초고속 출세'의 기록을 이어갔다.
재계에서건 정계에서건 고속도로만 달려온 이 당선자지만 걸림돌도 적지 않았다. 1990년대 초 현대 그룹의 2세 경영 승계 과정,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의 '국민당 창당' 과정의 갈등이 첫번 째 암초였다.
고 정주영 회장의 국민당 동행 권유를 뿌리치고 YS의 민자당 공천으로 전국구 의원에 당선되면서 이 당선자와 현대의 갈등은 극대화됐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서먹한 관계였지만 정몽준 의원의 합류로 인해 이 갈등은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지난 2002년 서울시장 당선 직후까지도 '정치인 이명박'의 행보가 매끄럽진 않았다. 김유찬 씨의 폭로로 잘 알려진 선거법 위반 사건, 서울시장 취임 이후에도 '샌들 신은 아들과 히딩크의 기념촬영'사건 등 갖가지 구설에 올랐다.
청계천 복구공사 이후 부터는 BBK에 대한 집중적 의혹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경선, 대선을 거침없이 돌파해왔지만 특검 통과로 인해 이는 여전한 '혹'이다.
한편 최종학력은 고려대학교 졸업이지만 포항에 있는 동지상고(현 동지고)를 졸업한 그는 목포상고 출신인 김대중 전 대통령, 부산상고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상고 신화를 잇게 됐다.
이번 대선에서도 전주고 출신인 정동영 후보, 경기고 출신인 이회창 후보, 경남고 출신인 권영길 후보, 경복고 출신인 이인제 후보 등 전통적 명문고 출신이 맥없이 무너진 것.
'성공 신화'의 허상이 깨지면…
▲ 올해 1월 1일 행주산성 해돋이 행사에서 새끼 돼지를 선물받은 이명박 당선자ⓒ한나라당 이명박 당선자의 개인사는 이처럼 정치권 입문 전과 후로 대분된다. '경제인 이명박'이 성공에 대한 신화로 어필했다면, 도덕적 결함이 두드러진 '정치인 이명박'은 마이너스 요인이었던 셈이다.
대통령에 당선이 됐으니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CEO 이명박'에 대한 신화가 유권자들에게 먹혔다고 볼 만하다. 그러나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된 이 당선자에게 CEO식 리더십이 궁극적으로 성공한 정부로 가는 보증수표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도 이를 모르지 않는 것 같다. 한 때 이 당선자는 'CEO출신 대통령'론을 설파했었다. 하지만 이 논리는 곧바로 벽에 부딪혔다. 기업가 출신의 국가원수인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와 태국의 탁신 전 총리의 말로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성공 신드롬'에 감각적으로 호소한 선거 캠페인도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부자되세요"라는 신용카드 광고가 빅히트를 쳐 카드 회사 매출은 늘고 광고모델은 부자가 됐지만, 광고 보고 카드 긁은 이들은 빚만 늘어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인지 지난 16일 마지막 TV토론에서도 이 당선자는 "CEO의 마인드를 갖춘 대통령이 중요하다"면서 사업과는 별 관련도 없는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기도 했다.
어쨌든 사상 초유의 기업가 출신의 '부자 대통령'이 5년 간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이명박 비판자들은 "자기가 회장 자리 앉았을 때 현대건설 덩치는 커졌겠지만 빠져 나간 다음에 부실이 드러나서 결국 회사는 망하고 말았다"고 비판하곤 한다.
"이명박 현대건설이 실패했다"고 단언하긴 힘들지만 하여튼 회사는 이후 망했고, "(주)다스와 BBK는 내 것이 아니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도 자신의 사업체 LK-e뱅크도 망했다. '경제인 이명박'에게도 엄연한 실패기가 존재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국민 성공시대''를 약속해 청와대에 입성한 이 당선자의 '정서적 통치기반'을 불안하게 보는 시각도 많다. 성공시대의 허상이 깨지는 건 순식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장과 친기업 일변도의 경제정책이 구사될 경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지지층은 급속하게 붕괴할 수밖에 없다.
윤태곤/기자 (peyo@pressian.com)
2007년 12월 19일 (수) 20:34 머니투데이
'CEO 대통령' 시대로…이명박은 누구
[머니투데이 오상헌기자] '기업가' 출신 첫 대통령...'도전'과 '신화'로 대권까지
'군인'에서 '직업정치인' 시대, '인권변호사'를 거쳐 다시 'CEO' 대통령 시대로.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5년간 대한민국호(號)의 대항해를 이끌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랜 기간 재계에 몸담았던 기업인이 국가 수반에 오른 것은 우리나라 정치사(史)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 당선자의 '이력'은 전직 대통령들과는 사뭇 다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군인 출신이라면 민주화를 이끈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직업정치인이었다.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노무현 대통령은 인권 변호사 출신이다.
반면, 이 당선자는 현대그룹의 신화를 썼던 '성공한 기업인'이다. 그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도 '경제 대통령'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따라 이 당선자가 군부 정권, 민주화 정권을 잇는 'CEO 대통령' 시대를 열어 제친 셈이다.
◇'굴껍데기'처럼 들러붙은 가난= 이 당선자는 지금으로부터 꼭 66년 전인 1941년 12월19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곤궁한 목장 노동자였던 아버지 이충우씨(1981년 작고)와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4남3녀 중 다섯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치마폭에 보름달을 안는 꿈을 꿨다고 해서 '명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체험한 유년 시절은 '지독한 가난'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전쟁으로 누나와 동생을 먼저 떠나보낸 아픔을 겪어야 했다. 7명의 식구가 단칸방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하루 두끼를 '술지게미'로 떼워야 할 정도의 빈한한 삶이었다.생활전선에 뛰어든 것도 세상 물정 모르는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고향인 포항 재래시장에서 어머니를 도와 좌판을 열고 '꼬마 상인'으로 행세했다.
김밥과 풀빵을 만들었고 아이스크림에 뻥튀기 장사를 했다. 과일, 생선도 팔았다. 상거래 기술을 남들보다 먼저 익힌 셈이지만 이 당선자는 "굴껍데기처럼 들러붙은 가난이 떨어질 줄 모르던 시기였다"며 당시를 회상하곤 한다.
가난으로 고교 진학이 언감생심이던 그 때, 이 당선자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동지상고(야간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고교 3년 내내 수석은 이 당선자의 몫이었다. 동지상고 재학시절 뻥튀기 장사를 하던 시절의 유명한 일화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여고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는 것이 부끄러워 이 당선자는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장사를 했다. 이를 본 어머니가 "네가 구걸을 하는 것도, 남을 속이는 것도 아닌데 뭐가 부끄러우냐. 당당하게 살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당선자는 지금도 "어머니의 소중한 가르침을 이제껏 잊지 않고 살아왔다"고 말하곤 한다.
◇대학합격, '첫 신화' 쓴 학창시절= 1959년 12월 고교 졸업 후에는 다시 '먹고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일을 해야 했다. 가족들과 함께 둥지를 튼 곳도 고단한 삶으로 점철된 이태원 '판자촌'.
매일 새벽이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일당 노동자 신분이었다. 그러다 엉뚱한 생각을 했다. "대학시험이라도 한 번 쳐보자"며 도전장을 던졌다.
교재가 없어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 준 책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느라 함께 생활하던 노동자들로부터 "불 좀 끄라"는 원성을 들을 정도였다.
'주경야독' 끝에 1961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지원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시골 촌뜨기 일당 노동자가 이뤄낸 첫 '작은 신화'였다.
대학 재학 시절에도 일하는 '고학생'이었다. 이태원 재래시장에서 환경미화원 생활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이 당선자는 후에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자 월급 전액을 환경미화원 자녀들을 위해 기부했다.이 당선자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환경미화원 시절 어두컴컴한 새벽에 일을 하다보면 차에 치여 다치거나 부상을 입는 분들이 많았다. 다치면 그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했다. 그래서 내 월급을 환경미화원 자제들에게 기부한 것이다".
이 당선자가 사회 의식에 눈을 뜬 것도 이 무렵이다. 상과대 학생회장을 맡아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했다. 결국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는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을 복역했다. 운동권 학생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져 취업이 제한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운명적 만남' 정주영과의 조우= 이 당선자는 자신의 삶을 바꾼 '사건' 중 하나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만남을 꼽는다. 그의 말을 빌자면, "정주영이 없었다면 이명박도 없었"다.
이 당선자는 대학 졸업 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국가가 국영기업체 취업이나 해외 유학으로 꼬드겨 운동권 학생들의 '사상전환'을 꾀하던 시기였다.
취업이 제한됐던 이 당선자는 "한 젊은이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데, 국가가 그 길을 막는다면 국가는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 전 대통령에게 보냈다. 새파란 젊은이가 청와대와 담판을 시도한 셈이다.
결국 이 당선자는 1965년 정 전 명예회장이 이끌던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현대건설은 당시 직원 98명의 중소기업이었다. 면접에서 이 당선자는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나" 라고 물은 정 전 명예회장의 질문에 "건설은 창조입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이 당선자는 지난 7월 한나라당 검증청문회에서는 "신입사원 연수회 당시 정 전 명예회장이 '술을 먹자, 낙후되면 물러서라'고 해 내일 당장 쓰러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끝까지 버텼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후 이 당선자는 타고난 부지런함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정 전 명예회장의 신임을 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입사 2년 만에 대리, 29세 이사, 입사 12년만인 1977년 35세의 나이에 사장에 오르는 등 '샐러리맨 신화'를 써 나갔다.
태국 건설현장에서 성난 인부들로부터 금고를 지켰던 일, 밤새 불도저를 해체한 뒤 조립하며 구조를 익힌 일, 현대자동차를 지키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 시절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맞섰던 일 등이 당시의 대표적 일화들이다.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 중국 장쩌민 전 주석, 옛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등과 '연'을 튼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당선자는 마침내 46살에 회장이 된다.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인천제철 등 현대 계열사 10여곳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다. 하지만 '명'이 있으면 '암'도 있는 법. 이 시기 자녀 교육 위장전입으로 이 당선자는 대선 기간 내내 경쟁 후보들의 '맹공'
을 받아야 했다. 실소유 의혹을 받았던 문제의 도곡동땅을 처남과 친형이 사고 판 것도 이 즈음이다.
◇'청계천' 신화로 '청와대 CEO'로= 이 당선자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2년이다. 27년간의 현대그룹 생활을 끝내고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다.
그 해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정주영 회장과도 결별하게 된다. 1995년에는 서울시장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 나섰다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하는 쓰라림을 맛봤다.
그러나 1996년 15대 총선에서 '정치1번지' 서울 종로에서 출마,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사사건건 부딪쳐 온 청와대의 현재 주인과 새 주인의 첫 격돌이었다.
이 당선자는 그러나 같은 해 9월 비서관이었던 김유찬씨가 선거비용 초과 지출 사실을 폭로하면서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게 된다. 결국 1998년 의원직을 사퇴해야 했다.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한나라당 경선에서 김유찬씨와 박근혜 전 대표측 법률특보를 지낸 정인봉씨가 '검증'의 도화선을 당긴 것도 바로 이 사건이었다.
1년여를 미국에서 머물던 이 당선자는 1999년 말 귀국, 당시로서는 생소하던 '사이버금융' 사업에 손을 댔다. 2000년 LKe뱅크, e뱅크증권중개 등을 설립했다. 대선전 내내 이 당선자를 괴롭힌 BBK 전 대표 김경준씨의 악연이 시작된 것도 이때쯤이다.
이후 이 당선자는 다시 사업을 접고 2002년 7월 민선 3기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복귀한다. 기업 경영기법을 시정에 도입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 이 당선자는 재임 기간 중에 청계천 복원사업, 서울시 대중교통체계 개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2006년 7월 퇴임 후 곧바로 대선 출마를 선언 근 1년여를 지지율 1위로 '독주'한 끝에 과반이 넘는 득표로 제 17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됐다.

오상헌기자 bborirang@
2007년 12월 19일 (수) 20:45 머니투데이
'MB 노믹스'의 핵심은 '실용'
[머니투데이 박재범기자]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국정 철학은 '실용'이란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가 내놓은 공약집 첫머리에는 '실용'이 적혀 있다.
이 당선자의 핵심 측근이 "당선자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바로 실용"이라고 했을 정도다. 이 당선자의 '실용'은 이념과 지역을 뛰어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그는 '실용' 앞에 경험을 항상 붙인다. 이 당선자가 선거 기간 내내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천은 어렵다. 나는 대기업 CEO를 해봤고 서울시장으로 여러 일을 했다"고 강조하며 경제대통령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그의 실용은 현장과 성과를 강조하는 것과 맞물린다. 이 때문에 때론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기업적 발상'이란 비판도 제기된다. 하지만 역으로 이 당선자만의 '경험적 실용주의' 색깔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이 당선자가 내세운 따뜻한 시장주의, 창조적 개방주의 등의 경제 철학도 '실용'에서 비롯된다. 이를 연결짓는 코드는 '자유와 시장, 경쟁'.
이 당선자의 핵심 브레인인 곽승준 교수는 "잘 하는 사람, 대기업 등은 정부가 지원할 필요가 없고 발목만 잡지 않으면 된다. 투명하게만 하면 된다. 대신 세금을 거둬 약자들을 보듬어주면 된다. 이게 MB 노믹스다"라고 말했다. 경쟁 속 잘하는 쪽은 복 돋우고 못하는 쪽은 보살핀다는 원칙인 셈.
이 당선자의 또다른 측근은 서울시장 시절 하나의 업적으로 꼽히는 '서울시 버스 체계 개편'을 예로 들며 경제 철학을 설명했다. "버스 노선을 서울시에서 조정하는 것을 이념의 잣대로 자르면 좌파적이지만 이런 부분은 철저히 실용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
이 측근은 "향후 경제정책도 이념에 맞고 안 맞는 문제가 아니라 필요한가, 효율적인가에 맞춰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토대로 할 때 집권 이후 이 당선자가 펼칠 정책을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 당선자의 핵심 측근들은 민생 살리기와 투자 활성화가 최우선 순위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시장주의 원칙을 지키되 실용적 접근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정책을 단기간에 추진할 것이란 얘기다.
이 당선자의 경제브레인인 강만수 전 재정경제부차관은 "무엇보다 친기업적 이미지가 강한 만큼 기업들 입장에서 불확실성이 제거돼 투자를 이끌 수 있는데다 감세 등으로 서민 피부에 와 닿는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노사 관계, 경쟁 속 도태되는 이들에 대한 배려 부재 등 그의 철학이 낳을 부작용은 우려되는 대목이다. '배가 부르면 자유를 찾고 자유가 넘치면 먹을 것을 찾는' 지난 한국 역사의 순환 과정 역시 넘어야할 벽이다.

박재범기자 swallow@
2007년 12월 19일 (수) 21:51 한겨레
성공 향해 내달린 삶…사장·시장 거쳐 국가 ‘경영’까지
[한겨레]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삶은 ‘일’과 ‘성공’이라는 단어를 빼놓고선 설명할 수 없다. “굴껍데기처럼 가족에게 들러붙었던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생활전선에 내몰렸고, 고학으로 대학까지 마쳤다. 24살에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27년 동안 원없이 일했고, ‘성공한 시이오(CEO)’로 주목받았다. 서울시장 시절엔 밤낮으로 청계천 복원사업에 매달려 ‘대권행 티켓’을 따냈고, 마침내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공부하고 싶은 어린 ‘풀빵장수’=이 당선자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씨와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씨 사이에서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태몽으로 밝은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꿈을 꿨고 그에 따라 이름도 ‘명박(明博)’으로 지었다.
이 당선자가 네살 때인 45년, 광복 직후 한국으로 돌아가던 이 당선자의 가족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무일푼 신세가 되는 불행을 겪는다. 고향인 경북 포항에 정착한 뒤 이 당선자의 아버지는 목장 일꾼으로, 어머니는 과일행상으로 하루종일 일했지만 가난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단칸방에서 한 식구가 살며 하루 두 끼는 술지게미로 때워야 했다. 그 때문에 학교선 “술 냄새가 풍긴다”며 구박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 당선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6·25가 터져 미군의 폭격에 바로 위의 누나(귀애)와 동생(상필)을 눈앞에서 잃는 비극을 겪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의 장삿일을 도왔던 이 당선자는 김밥·풀빵 장사로 학업을 계속했고,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한 뒤 상경해 막노동에 나섰다. 일일잡부로 살아가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그는 “입학증이라도 받기 위해” 대학 입학을 결심했고, 청계천 상인으로부터 헌책을 얻어 밤늦게까지 노동자합숙소의 등불을 밝힌 결과 1961년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독학으로 대학입학…6·3시위 주도=대학시절에도 가난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행상을 하던 이태원의 상인들로부터 청소부 일을 얻게 된 그는 이른 새벽부터 리어카를 끌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일하느라 친구 사귈 틈도 없었지만, 그는 고려대 경영대 학생회장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64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하다 옥에 갇혔고, 2심에서 집행유예 3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여섯달 만에 풀려났다. 그는 옥중에서도 경영학 전공 과목에 매달렸고, 정치권에 입문한 운동권 친구들과 달리 기업행을 결심한다.
‘샐러리맨의 신화’를 쓰다=이 당선자는 현대에서 탁월한 추진력과 성실성으로 곧 정주영 회장의 눈에 든다. 어린 시절, 가난이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는, 가난을 이겨내고자 갖가지 실패를 견뎌낸 정주영 회장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일에 대한 집중력에서도 정 회장과 ‘코드’가 맞았다. 68~69년 중기사업소에서 일할 당시, 중장비를 다루는 인부들이 부품값을 과다청구하자, 트랙터를 분해해 재조립하면서 기계의 원리를 죄다 습득해 엉뚱한 비용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정주영 회장이 젊은 시절 쌀가게 배달원으로 일할 때 사흘 밤낮으로 자전거타기를 연습한 끝에 쌀 서말을 싣고도 거뜬하게 달렸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공장 안에 ‘더 빨리’란 표어가 붙어있던 시절, 그의 능력의 요체는 ‘신속정확’이었다. 정 회장에게 보고할 때 미흡한 점이 있으면, 다른 간부들은 정 회장에게 ‘좀더 연구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내일 아침까지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론보다는 현실적인 사고를 하고, 이를 쉬운 말로 표현했다는 점도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였던 정 회장의 마음에 들었다. 예를 들어, 임원회의에서 정 회장이 “자재창고 담당자로 누가 적당하냐”고 물으면, 다른 간부들은 “자재의 성격에 대한 이해와 회계 능력을 갖춘 사람이 적당하다”고 말했지만, 이 당선자는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는 사람이면 된다”라고 답했다. 물품을 빼돌리지 않고, 화재 감독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또 정 회장의 아이디어를 구현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현대건설의 한 관계자는 “84년 충남의 서산 간척지 공사 때 가파른 물살 때문에 나머지 물막이 공사가 애를 먹자 정 회장은 유조선을 이용해 물살을 막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내로라 하는 토목 전문가들이 전복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며 말렸지만, 이 당선자는 홀로 정 회장의 편을 들었고 철저한 계획으로 이를 성공시켰다”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5년만에 공무담당 이사로 승진했고, 75년 부사장, 77년 사장, 88년 회장 임명장을 받는 등 동료·선배들을 제치고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샐러리맨의 신화’를 썼다. 그는 후일 자서전에서 당시를 돌아보며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때처럼 일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입문과 좌절=90년대 초 그는 이미 ‘스타’였다. 91년 방영된 드라마 은 운동권 학생 출신 ‘박형섭(유인촌 분)’이 각종 시대적 난관과 부대끼며 성공한 기업인으로 우뚝 서는 과정을 담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가 야심차게 추진한 이라크 토목공사는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 등으로 수십억달러의 미수금을 남기고 막을 내렸고, 정 회장과의 사이도 삐걱거렸다. 결국 92년 초 창당을 결심한 정주영 회장과 결별하고, 민자당에 입당해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96년 총선에서는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물리치고 승리하지만 98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는 시련에 부닥쳤다.
1년여 넘게 미국에서 ‘야인’으로 살았던 그는 2000년 미국에서 돌아와 다시 ‘노병의 성공신화’를 쓰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잘나가는 금융맨으로 알려진 젊은 재미동포 김경준씨와 함께 손잡고 인터넷금융업에 뛰어들었지만 쓰라린 실패로 끝이 났다. 이 대목은 대선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청계천’으로 날개달다=행운의 신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2002년 청계천 복원사업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서울시장에 당선됨으로써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서울시청 광장 조성, 세종로 사거리 건널목 조성 등 역대 시장의 숙원사업을 신속하게 마무리짓는 한편, 광역 재개발사업이랄 수 있는 ‘뉴타운사업’을 시작하고, 개발사업이 예정돼있던 뚝섬경마장 부지를 서울숲공원으로 바꿔냈다. 대규모 버스체계 개편작업을 통해 버스공영제, 환승시스템을 수립해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울시 공무원들은 그의 일하는 스타일을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이라고 표현한다. 프로젝트의 목표를 설정하고 인적·물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제한된 시간 안에 성과를 낸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가려운 곳을 짚어내는 ‘행정마케팅 능력’, 강력한 추진력, 짜임새있는 업무 관리능력은 그를 ‘일머리를 아는 리더’로 부각시켰다. 특히 2년4개월의 짧은 공사기간 끝에 청계천 5.84km에 맑은 물을 흘려보낸 청계천 복원은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자리잡았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와 청계천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목도한 유권자들에겐 ‘이명박’이라는 이름이 깊숙히 각인됐다.
‘실천하는 대통령’을 공언한 이 당선자 앞엔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새로운 도전들이 놓여 있다. 이제 그의 능력은 또다른 ‘검증대’에 올랐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2007년 12월 19일 (수) 20:38 오마이뉴스
'샐러리맨 신화'부터 '경제대통령'까지
[[오마이뉴스 손병관 기자]
▲ 19일 오후 6시 제17대 대통령선거 출구조사를 한 방송사들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 확실'을 발표하자, 여의도 당사앞에 모여있던 지지자들이 환호하며 기뻐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17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씨의 행적은 굴곡의 한국 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당선자는 일제치하였던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고 한다. 4살 때인 1945년 11월 가족들과 함께 시모노세키항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귀국선에 올랐지만, 정원을 초과한 배는 그만 쓰시마섬 앞바다에서 가라앉고 말았다. 가족들이 '무일푼'으로 고국에 돌아온 뒤 한국전쟁 와중에 이 당선자의 손위 누이와 남동생이 미군 폭격에 희생되는 등 불운은 계속됐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환경미화원과 행상 등을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했다.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을 맡은 1964년에는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시위를 주도했다가 넉 달간 옥살이를 한 '열혈 운동권'이기도 했다. 석방 두 달여 만에 어머니 채태원씨가 세상을 떠난 것도 그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암울했던 개인사, '왕회장' 만나면서 '인생 역전'으로
▲ 1964년 9월 22일 내란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학생들. 왼쪽에서 이명박 당선자와 이경우가 서서 진술중이고, 뒤의 오른쪽에 이정재, 김실, 박원규 등 3명이 흰 수의를 입고 나란히 앉아 있다. 암울했던 개인사는 이 당선자가 이듬해 '왕회장'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면서 '인생 역전극'으로 바뀐다. 1965년 9월 구 현대그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현대건설 공채1기로 입사하며 기업인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현대건설에 입사하려고 할 때, 회사에서 그의 운동권 경력을 문제 삼으려고 하자 그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젊은이의 '사회 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강도높게 비판하는 편지를 쓴 일도 있다고 한다. 이 당선자는 입사면접 당시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정 회장의 물음에 "창조"라고 답했다. 이 당선자가 현대건설에서 29세 상무-32세 전무-33세 부사장-35세 사장-46세에 회장으로 이어지는 초고속 승진을 한 데에는 타고난 부지런함과 추진력이 발판이 됐다.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 앞에 '샐러리맨의 신화'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 후보가 현대건설의 태국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폭도로 돌변한 현지 인부들이 사무실에 들이닥쳤을 때 목숨을 걸고 지켜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이는 자서전 에 소개됐지만, 정주영 회장은 92년 회고록에서 "이명박씨는 금고를 지킨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다소 엇갈린 진술을 남겼다. 92년 민자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정계 진출 이 당선자는 27년간 한솥밥을 먹었던 정주영 회장에 대해 복잡한 심중을 가지고 있다. 그는 3월30일 연세대 경영대학원 총동창회 조찬강연에서 "정 회장과 함께 한 27년은 하늘이 나에게 준 축복"이라며 "그야말로 진정한 1세대 벤처기업인"이라고 치켜세우는 등 고인에 대해 깎듯한 예의를 갖췄다. 그러나 16일 공개된 2000년 광운대 강연 동영상에 따르면, 그는 "나와 정주영 회장이 '부자 관계다' '바늘과 실이다' 이렇게 말하시는 분이 많은데 천만에 얘기"라며 "정이 들어서 같이 있는 게 아니라 회사에 도움 되니까 같이 있었다"고 양자가 대등한 관계임을 강조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의 강압으로 현대그룹의 발전설비 부문을 대우에 넘길 때도 정 회장 대신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이 당선자였다. 이 당선자는 광운대 강연에서 "역시 위기에서 나쁜 일은 남을 시키는구나, 좋은 것은 자기가 하고"라고 오너에 대한 못마땅한 감정을 술회했다. 이 후보와 현대그룹의 결별설이 처음 나온 것은 91년 8월 12일. "13대 국회에 진출한 형 이상득 의원의 뒤를 이어 (당시 방송되었던) TV드라마 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동생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이 민주자유당(한나라당의 전신) 공천으로 14대 총선 출마를 검토 중"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노태우 정권의 대기업 정책에 불만을 품은 정주영 회장도 그 무렵 정치 참여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정 회장은 이듬해 1월 3일 경영 은퇴 선언을 한 뒤 통일국민당 대통령후보로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에 맞섰다. 같은 날 현대건설을 떠난 이 당선자도 92년 민자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이게 된다. 민자당은 92년 대선에서 이 당선자에게 TV 찬조연설과 지원유세 등에서 정 회장을 공격하는 악역을 맡기려고 했지만, 그는 "오랫동안 모신 은인에게 그럴 수 없다"며 이를 뿌리쳤다고 한다.
▲ 이명박 당선자가 지난 3월 22일 오전 현대그룹 고 정주영 명예회장 6주기를 맞아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고인의 묘를 찾아 참배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평탄치 않았던 국회의원 생활... 서울시장으로 도약 계기 마련 그러나 이 당선자에게 국회의원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93년 3월 공직자 재산을 공개할 때 이 당선자는 62억3000여만원의 재산을 신고했지만 곧바로 "규모를 누락·축소 신고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논란이 된 서울 서초구 서초동 검찰청사 앞 노른자위 땅 470평을 공시지가의 거의 절반 값으로 팔아넘긴 뒤에도 신고액은 188여억 원으로 불어났다. 당시 언론에서 처음 문제를 제기한 '도곡동 땅 차명재산' 의혹은 여전히 이 당선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96년 4월 총선에서는 '정치 1번지' 서울 종로에서 노무현·이종찬을 누르고 당선돼 정치인으로서의 변신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같은 해 9월 법정 선거비용을 축소 신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98년 의원직을 상실하고 미국으로 떠났는데, 1999~2000년 무렵에 만난 김경준씨와 인터넷금융업을 동업한 것은 올해 대선정국의 최대 이슈가 된 'BBK 사건'의 단초가 됐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사업은 김씨의 수익률 조작으로 좌초했지만, 그는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 승리하며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행정가로 변신한 그는 재임 4년간 청계천 복원과 버스 중앙차로 등의 성공작을 내놓으며 대중들의 주목을 끌었다.
▲ 지난 2005년 6월 1일 오전 서울 광화문네거리 동아일보앞 청계광장에서 청계천에 실제로 물을 흘려 보내는 '유지용수 통수 시험'이 실시됐다. ⓒ 권우성이른바 '여의도 정치'에서 한 발짝 물러나 행정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환경도 대중에게 "말보다는 일 하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게 했다. 그러나 작년 5·31 선거 직후의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보면, 그는 당 대표를 맡은 박근혜 의원과 고건 전 총리에 이어 3위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당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