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타인의 삶

이영주 |2008.01.08 01:42
조회 1,766 |추천 0

 

타인의 삶 (The Lives Of Others, Das Leben Der Anderen, 2006)
감독 :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훔쳐보기를 통해 그 남자가 알게 된 것들


부지런떨며 예술영화 전용관 찾아다니는 인간은 못 되는 고로 개봉 당시에 보고 싶긴 했으나 놓친 영화가 어디 한두 편이겠냐마는, 이 영화 은 보기 힘든 객관적 조건 때문이라기보다는 보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보기가 저어되는 그 무엇이 있어서 보지 못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스탈린주의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80년대 중반. 소련만큼이나, 아니 소련보다도 더 강력한 스탈린주의를 고수하던 동독의 비밀경찰(?) 스타지 요원의 이야기라. 이미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눈으로 확인한 2000년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가 사회주의적 가치마저 싸잡아 매도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드는 것이 불편한 사람이, 이 영화를 그저 영화로 볼 수 있을까 우려됐던 탓이다.
그러나 이 영화와는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개봉한 지도 한참 지난 작년 말, 가뜩이나 얄팍한 귀를 더욱 얄팍하게 만드는 한 친구분(생각해 보니 이 분 추천으로 본 영화가 한두 편이 아니다. 그런데 정말 웃긴 건, 추천한 이 분은 내게 추천만 하고 정작 자신은 보지 않고 내 리뷰만 읽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 ㅋ)이 이 영화 파일을 보내주었다. 연말연시 이어지는 송년·신년모임을 다 보내고 결국 이 영화를 만났다.
역시나 조금은 불편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불편해한다 하더라도 현실 사회주의에서 비대해진 권력층의 부패와, 그에 필연적으로 따라붙게 돼 있는 비밀경찰의 반인간적인 첩보·납치·구금이 난무했다는 것은 없어질 수 없는 실재하는 사실이고 역사다.


훔쳐보기 = 질투하기 + 닮아가기

아주 작은 불편함을 인정하고 감수하기로 한 뒤 본다면, 이 영화 꽤나 흥미롭다. 비밀경찰이란 직업적으로 도청하고 훔쳐보는 사람이다. 그런 직업을 가진 남자 비즐러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의 직업은 그에게 필연적으로 타인의 삶을 관람(?)하게 했다. 50줄 다 되도록 감정이입 한번 없이 관람만 하던 이 남자가 한 남자, 아니 한 여자와 그의 남자를 관람하면서 지금껏 하지 않았던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결국은 몰래 관람하고 보고서 작성하는 것으로 끝내야 하는 비밀경찰의 훔쳐보기 규율을 깨뜨리고 그들의 삶에 개입한다.
관음증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누군가의 삶, 그것도 매우 사적인 삶을 훔쳐보는 행위는 인간에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영화나 연극을 보는 행위도 관음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허락된 관람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비즐러는 국가가 훔쳐보기 허용권을 내준 사람이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정보국 식당에서 대위라는 고급관료임에도 하위직들이나 앉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일상의 평등을 실천하는 철저함을 보라) 훔쳐보기의 쾌락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사회주의 국가를 옹호하기 위한 수사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하기에 훔쳐보는 대상이 인간이었음에도 그들의 인간적 삶에는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경찰을 교육하는 학교에서도 실제 경찰생활에서도 매번 냉철한(냉혈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리겠다) 수사로 우수한 실적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인간적인 삶에 조금도 체온 섞인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은 단지 수상 대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결혼을 했다가 혼자가 된 건지 원래부터 혼자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껏 연애나 한번 해봤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그의 삶은 관계로부터 고립돼 있다. 텅 빈 집과 심문실만을 오가는 그의 단조로운 삶은 그가 수사 대상을 대하는 눈빛만큼이나 온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온기 없는 삶에 한치의 후회도, 한점의 회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인지 부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동거인인 매혹적인 여배우 크리스타를 수사하게 되면서(실은, 훔쳐보게 되면서) 자신의 결핍을 깨닫는다. 자신에게 없는 체온, 자신에게 없는 욕망, 자신에게 없는 열정... 아니, 사실은 있었을지도 모르나 지금껏 필요치도 않았고 그래서 결핍됐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자기 안의 인간을 발견한다. 그때부터 비밀경찰 비즐러는 동독의 비밀경찰을 가차없이 비판하는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수호천사가 된다. 대놓고 드라이만에게 친구라고 독백하는 비즐러의 모습, 초반의 냉혈 수사관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지금껏 사랑을 몰랐던 50대 소년의 성장담

어쩌다가 50줄이 되도록 한번도 흔들림 없던 냉혈한 비즐러가 수사 대상에게 푹 빠져버렸을까. 드라이만의 예술적 열정에 감동받아서? 브레히트의 시에 은혜를 입었나? 예술가들의 열정적인 교류를 보며 체제를 뛰어넘는 예술을 깨달았나?
글쎄... 내가 보기엔 비즐러를 변화시킨 것은 그들이 아닌 것 같다. 비즐러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수사하게 된 것은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브라이만의 불순한 사상이 의심돼서가 아니었다. 연극 무대에 선 크리스타를 보는 순간, 시종일관 차갑고 건조했던 비즐러의 눈은 뜨겁게 반짝였다. 그리고 그녀가 애인인지 남편인지 모르겠지만 동거인 드라이만과 열정적인 키스를 하는 장면을 망원경으로 훔쳐보는 그의 눈빛은 처음으로 사랑에 눈뜬 소년처럼 호기심과 열정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랬다. 이제껏 사랑을 몰랐던 소년이 처음 사랑을 발견했을 때의 눈빛, 그것이 바로 그때 비즐러의 눈빛이었다. 곧바로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수사를 자청하고, 본격적으로 수사가 아닌 훔쳐보기를 시작한다.
애초부터 목적이 수사에 있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는 지금껏 경찰생활 20년 동안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짓을 한다. 관객이 되어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생활을 관람하고,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랑과 열정을 대리 경험한다. 그도 모자라 몰래 드라이만의 집에 들어가 드라이만이 선물로 받은 브레히트의 시를 훔쳐다 읽으며 드라이만처럼 감동하고, 드라이만의 피아노 연주를 훔쳐들으며 울기까지 한다. 현실과 양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크리스타에게는 직접 찾아가 "나는 당신의 관객이에요"라고 수줍은 소년처럼 고백한다. 냉혈한이 눈물이라니, 냉혈한이 고백이라니. 이런...
그가 관람에 깊이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그의 결핍은 더욱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르누아르의 그림에나 나올 법한 몸매의, 즉 요즘의 시선으로 보면 성적인 매력이 전혀 없는 늙은 성매매여성에게 조금만 더 머물다 가라고 부탁하는 비즐러의 애처로운 눈빛은 그의 누추한 결핍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비즐러는 관람을 통해 결핍의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성장한다. 이제야 그는 소년에서 어른이 되었다.


두 이상주의자의 연애담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마치 동독 사회주의 국가권력의 핵심인 비밀경찰에 속해 있던 비즐러가 자유로운 예술혼을 가진 드라이만에게 감동받아 자신 안의 인간적인 면모와 인간애를 깨닫고 개과천선한 스토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아니올씨다. 드라이만과 비즐러는 마치 도플갱어처럼 닮은꼴이었다. 비즐러가 냉혈 비밀경찰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의 이상 때문이었다. 그는 권력에 기대 권모술수를 꾀하는 다른 관료와는 다르다. 그에게 사회주의의 이상은 흔들릴 수 없는 원칙이었다. 드라이만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동독 정보국으로부터 감시를 받는 처지까지 오게 되긴 하지만, 그는 동독에서 유일하게 서독의 서적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을 만큼 사회주의적 신념이 투철한 예술가였다. 그가 결국은 동독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서독에 넘기게 된 것도 그가 가진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과 신념 때문이었다.
비즐러와 드라이만, 이 두 사람은 철저한 그러나 현실로부터는 괴리된 사회주의자들이었고, 그 때문에 당시 동독 사회주의로부터 한직으로 떠밀림을 당하든 비밀수사의 대상이 되든, 어떻게든 배척당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다.
일방적인 훔쳐보기가 키워드인 영화이다 보니 철저히 비즐러의 시선으로 영화가 흘러갔기 때문이지, 만약 드라이만과 비즐러가 서로 교감하는 스토리로 전개됐다면 이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동지가 됐을 것이다. 물론, 결국은 어느 영화에서도 보여주기 어려운 감동적인 두 남자의 러브스토리로 결말을 맺지만. ㅋ 이 영화를 두고 어느 까칠한 평론가가 "스토킹하다가 느껴버린 퀴어영화?"라고 20자평을 한 것이 이해가 된다. 닮은꼴 두 남자의 애정 확인, 이것이야말로 도통 해피엔딩일 것 같지 않은 이 영화의 해피엔딩이니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상을 꿈꾼다

솔직히 이 영화를 본 뒤 하도 여러 종류의 생각이 머리 속을 떠돌아다녀서 도통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갈피 없이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다 보니 꽤 까칠한 리뷰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본 뒤 내 가슴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건 또 뭔 소리래? ㅡㅡ;;) 그만큼 내게 이 영화는 복잡한 영화다.
아무튼, 끝으로 내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었던 것을 이야기하고 글을 마쳐야 할 것 같다.
오로지 이상만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비즐러와 드라이만보다는 현실과 대의명분 사이에서 갈등하는 크리스타가 훨씬 있음직한 인물이다. 그래서였나? 이 현실적 캐릭터는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쳇.
그럼에도 두 이상주의자 남자들의 연애담은 매력적이다. 아니, 그들의 연애담보다는 그들의 이상이 매력적이다. 드라이만이 연주하고 비즐러가 울면서 경청한 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년과 비즐러가 나눈 대화들 속에서 끊임없이 그들은 착한 사람을 되뇌인다. 여기서 착한 사람이란 여러 부류의 인간 중 착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내재됨 착함, 선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상주의자였고, 그래서 그들은 동독 사회주의로 국가기관으로부터 내침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통일된 독일에서 그들의 믿음을 현실로 만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수호천사 비즐러의 존재를 알게 된 드라이만의 저서 맨 앞장에 적힌 헌사 "이 책을 HGW XX/7에게 바칩니다"는 동독이든 서독이든 통독이든, 인간의 착함을 가로막는 사회구조 혹은 체제 속에서도 여전히 유의미한 인간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내가 지금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여전히 꿈을 꾸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임을,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한다.


p.s. 비즐러를 분한 울리쉬 뮤흐 너무 멋있다... ㅠㅠ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 인상깊게 남지 못했을 것이다. 스토커가 멋있게 느껴지다니, 이것 또한 새로운 경험이다. ㅋㅋㅋ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