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의 40일
[ 무의식중에 그녀를 만나다 ]
동전의 양면: 그애의 뒷면은 그녀
치과를 방문하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중학생 무렵에 치과진료를 받았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정말 한참만에 온 것이다. 10년 정도만에.
치과의 인테리어는 예나 지금이나 고급스러웠으나, 나는 기분이 저급하게 되었다.
한 개의 이빨에서 약간의 통증을 느껴서 병원에 온 것인데, 그 외 손상된 이빨이 두런두런 너무나도 많다고 했다.
“자아 여기 그림보시면, 위에 여기, 여기! 그리고 또 여기, 원 투 쓰리 포~ 찍고, 아래쪽에 어금니, 아싸~ 작은 어금니, 반대편 어금니! 는 신경치료해서 떼워서, 크라운(씌우는 것) 하시고, 그 외 이것 저것 요것은 살짝 떼우시면 될 것 같아요. 근데 요쪽이빨들은 너무 많이 썩어서 신경치료 해 보고 잘 안되면은 뽑아서 임플란트를 하셔야 해요. 임플란트는 종류와 가격대가 요러쿵 저러쿵 한데 그것은 치료하게 되면 자세한 설명 드릴꺼구요. 자 그래서 토탈 최소 190백만원에서 최대 므흣하게 6백만원(임플란트 할 경우)정도 되세요. 일단 최소로 보고 계약을 할까요? 한번에 다 치료를 하시는게 더 이익이세요. 현금으로 하면 20% 할인 혜택과 나불나불 드리고 나불나불 해줍니다. 나불나불 하시니까 이 기회에 나불나불 하세요” 라고.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간호사가 장황한 설명과 함께 견적을 뽑아주었다. 많은 지출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돈벌이가 되겠으나, 많은 서민들에게 그렇듯 내게도 역시 치과는 상종할만한 의료기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심각한, 중환자가 된 기분으로 신경치료를 받고 치과 문을 나섰다. 명랑한 목소리는 3일 후에 나오라고 했다.
간호사들의 경우에도 의사에게 임금을 받다보니, 최대한 비싼 것을 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작은 치과의 경우에도 월매출이 몇천을 넘어가면 간호사들의 급여에 인센티브가 30%이상 붙는다고 하니, 명랑하게 나불나불 할만도 하다. 아무튼 나는 기분이 안 좋게 되었다. 의료계와 정치권의 커넥션만 없다면, 이빨을 심는다는 임플란트란 것도 도무지 그렇게 비쌀 이유는 없었다. 원가는 20만원 정도밖에는 안된다고 신문에서 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마저도 임플란트 제작사에서는, 치과에 납품하기위해, 리베이트 명목으로 1+1 이 보통이라고 했었다. 치과에서 20개를 주문하면 공짜로 20개를 더 주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1개당...10만원 정도? 그것이 환자에게는 보험도 안되고, 보통 한개 심는데 180만원에서 250만원 정도라니... 씁쓸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밖으로 나오니 노란 가로등빛을 받으며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올해의 겨울에는 눈이 내린다고 해도 새삼 특별한 감정을 가지지 못할 줄 알았는데. 치과에서 시렸던 마음이, 눈송이를 보니 누그러진다. 금새 또 녹아 없어질테지만, 너는 절대 소모품이 아니야... 라고 말해주었다.
편의점에 들러 캔맨주를 두 캔 샀다. 10여분 정도 걸었을까? 그새 눈발이 잦아들고 있었다. 놀이터에 들어서는데 누군가 내 자리에 앉아있었다. 내자리가 아니라 늘 내가 이용하던 자리. 교복을 입고 머리모양이 변했지만.. 그네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여학생은, 일주일 전에 보았던 그애였다. 그냥 집으로 갈까 했으나, 내가 걸음을 물릴 이유는 없었다.
무척이나 책에 집중하고 있었던지, 바로 앞에까지 다가 갔을 때에야 그애는 고개를 들었다.
“어. 안녕하세요~ ^^" 하며 그애가 반가운척을 해왔다.
" 그래.. 안녕 " 하고 나도 답해 주었다, 일주일전엔 다소 기분이 안 좋았지만, 다시 보니 왠걸 반가웠다. 나는 옆 그네에 앉았다. 문득 무슨 책을 읽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이, 그애의 무릎위에 있는 책의 제목을 찾고 있을 때, 그애의 시선은 내 손에 들려있는 비닐봉지에 달라붙고 있었다.
그애가 빨랐다.
"또 술이에요? 어디봐요 " 하며, 그애는 내 무릎위에 올려놓은 비닐봉지를 낚아채갔다.
" 가져와" 라고 나는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굳이 꼭 돌려 받아야 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 뭐야~ 안주도 없이 맥주만 있네요. 그래도 센스가 있으시다~ 한개는 내가 마셔야 되는거죠? " 하더니 한개를 갖고, 하나만 내게 건넨다.
" 교복입고 캔맨주라..훗.. 몇살인데? "
" 고1. 이에요." 라며 그애는 캔을 따고는,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 웃는 모양새가 왠지,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확연히 들었다. 그래... 그녀... 그녀와 닮.았.다...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가 21살 이었으니, 그녀의 고등학생 시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지만, 아마 이 아이와 무척이나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럽고, 붙임성 있고, 당돌하고.. 그리고... 눈부시고..
" 아저씨도 교복입고 술 마신적 있죠? "
" 어.. 있지. 나도.. "
" 스낵이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아저씨는 그냥도 잘 마시네요? "
" 그렇지 뭐." 라고 나는 말했다. 원래 어릴땐 안주로 술을 마시지만, 나이가 들면 세월을 안주삼아 마시는 법을 알게 되니까... 이애도 어른이 되면 저절로 알게되지 않을까..
"내리는 눈을 안주삼아 마셔봐. " 라고 약간의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 와 그 표현 좋다. 내리는 눈을 안주삼아서라.. 히힛 원샷할까요? "
" 좋아."
한캔을 마시고 나자, 눈송이가 다시 두터워졌다. 우리는 안주가 늘었으므로, 술을 더 마셨다.
그리고, 그애의 요청으로, 아파트 제일 높은 층, 15층 계단에서 창문을 열고 눈 구경을 하고, 헤어졌다.
이상한 일은, 캄캄한 계단에서, 잠들지 않는 도시를 바라보며, 눈 구경을 하던 10 여분 사이에,
그애가 내게 키스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애를 끌어안고 꼴사납게 몇분인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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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 행성에서 단 하나뿐인 진정한 친구, 외계인 1호가 어제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애는 있고, 그녀는 없어... 그애가 그녀 이기도해. 그나저나 예쁘장 하다며? ㅎㅎ 담에는 나도 한번 보러가자! >
긴 술자리였지만, 내가 유일하게 들을 수 있었던, 나의 넋두리에 대한 피드백이었다.
나는 어제 분명,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며칠전 놀이터에서 만난 그애의 얘기는 아주 잠깐 했을 뿐인데, 저런 답을 돌려주었던 것이다. 역시 외계인...
그 이후에는, 언제나처럼 외계인 1호의 거대한 성담론이 술자리를 지배했었다.
"마스터베이션에도 단계가 있어. 난 그걸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까워... 모든 일에는 과정과 절차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말이야!!" 라는 말을 남기고 외계인은 테이블에 머리를 눕혔었다 . 나는 외계인을 택시에 태워 우주로 돌려 보냈었다. 녀석과 술을 마실때의 마지막 장면은 늘 외계인의 황당한 귀환이었다.
<그애는 있고, 그녀는 없어... 그애가 그녀이기도 해.. 그애가 그녀이기도 해....>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 안에 들어서도, 또 잠이 쉽사리 들지 않았다.
놀이터에서 맥주를 혼자마신 후에는 곧잘 잠들곤 했었는데, 그애를 만나고 나서는 쉽사리 잠들 수가 없다.
그녀와, 그애와, 그녀의 입술과, 그애의 입술이 머릿속을 떠다녔고, 외계인의 마스터베이션 이야기도 떠다녔다.
외계인은 성의 표현, 신인류의 성역할, 성인사이트의 정체성, 국가별 성문화, 연령대별 섹스경향, Sm, 페티시즘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 체계적이고 심도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더군다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늘 직접 발로 뛰며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석은 이 행성에서, 관계한 여자가 세자릿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수년전에 했을 정도이다. 20대에 세자릿수라.. 평범한 지구인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튼 오늘 외계인이 열을 올린 것은 마스터베이션 컨설팅에 대한 것이었다. 시작하는 시기에 차이는 있겠으나, 누구나가 자위를 하게 되는데, 그 올바른 방법을 찾기 까지 참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되고, 혼자 고민도 하지만, 정작 진정한 자기 위안을 하기까지는 너무 먼길을 돌아가는 것이 안타깝다는 점에 착안하여, 젊은 남녀들에게 올바르고, 확실한 자위방법, 성향에 맞는 맞춤식 마스터베이션을 컨설팅 하겠다는, 외계인 다운 기발한 발상이었다.
그녀와, 그애와, 그녀의 입술과, 그애의 입술은 그날 새벽까지 머릿속을 떠다녔고, 혼란스럽지 않게, 외계인은 일단, 변태로 단정 지어 구석에 접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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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 아주 대단히.. 나는,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유인력의 법칙이니, 뭐니 하면서, 내가 간절히 바라면....
내 삶의 전부를 걸고... 내 모든 것의 희생을 전제하고... 간절히 바라기만 하면...
꼭 한번은 더 기회가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던 거지...
너와 내가 많은 발걸음을 남겼던, 그 길위를 걷게 되는 날이면, 우연히 한번쯤 마주칠 것도 같았고,
넌 오랜 세월에 지난 일을 희석시켜. 언짢았던 기억이나 눈물보다는, 아무런 감정이 없기 보다는, 왠지 웃어줄 것만 같았고,
우린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인 것 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고....우리 가슴안에 쌓아두고
치우지 못한 독극물도 해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그래...
소설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
그날 동이 틀 무렵, 나의 소설 속에서, 내가 만든 주인공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혼잣말을 하다가, 울다가, 끝내는 거울을 깨뜨려 버렸다.
이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잔인하게 확인을 거듭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어쩐지, 모니터 속의 글자들을 채워나가며, 거울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be continue
글/하.얀.사.랑
ps 글을 적으면서 들었던 음악은, 현재 카페의 1번곡인 라디오헤드의 크립입니다. 보컬의 몽환적인 보이스가 참으로 아픈 곡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