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을줄도 알라
그것은 기술이라기 보다는 행운이다
우리는 가장 빨리 잊어야 할 일을 가장 잘 기억한다
기억은 우리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할 때
비열하게 우리를 버리고
전혀 필요치 않을 때에 어리석게도 우리에게 달려온다
[그라시안의 세상을 보는 지혜 중에서]
그녀가 싫어하는 것은 세가지다
캄캄한 방, 어둠속에서 걸어가는 것, 그리고 혼자 불을 켜는 것
그러니까 그녀가 매일 밤 캄캄한 원룸에 문을 열고
어둠을 향해 더듬거리며 나아가 혼자 불을 켜는 것을
조금도 좋아할 순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종종 24시간 편의점에 들르곤 한다
어둠과의 한판승을 미루고 싶었다
자몽을 고르면서 두개를 살까 세개를 살까 한잠을 고민했다
호두를 살까 아니면 피스타치오를 살까 너츠 믹스를 살까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었다
와인은 칠레산이 중에 먹어본 걸로 고르고
자질구레한 생필품은 카드 안에 하나하나 던져 넣었다
치즈
이건 치즈에 대한 예의가 필요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상표에 카망베르 치즈가 없어서
새로운 치즈에 도전할 용기를 내기 위해 시간이 30분 정도 걸렸다
그리고 맥주를 6캔 사면 맥주컵을 하나 준다는 이유로
그 무거운 맥주를 12캔이나 살고 말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내려
또박또박 걸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을 열자 어두운 방이 공룡의 목구멍처럼 크게 벌어졌다
그날 밤 그녀는 칠레산 와인을 한잔 마시고
CD를 꺼내 플레이어에 넣고 미소를 지으며
보이지 않는 관중석을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익숙한 노래 New York state of mind를 따라 불렀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자
옛날처럼 좋았던 그 시절처럼
그가 곁에서 피아노를 치는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를 가리고 있는 어둠을 향해 말했다
'왜 난 니가 될 수 없었을까? 이렇게 사랑하는데..'
#사랑을 말하다_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