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두 종류의 기관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우리 역시 교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교회라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든 이 시대의 교회든 교회에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며 문제들의 종류 역시 비슷합니다. 성적인 음란의 문제, 율법에 메이는 문제, 이단의 문제... 이런 일들은 신약성경이나 오늘날의 교회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도 이 사실을 아셨습니다. 교회는 성화되어가고 있는 인간들의 모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문제를 그대로 두시지 않습니다. 교회는 계속적인 하나님의 간섭 속에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개신교회가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오면서 교회 내에는 계속적인 분열의 문제가 있어왔습니다. 물론 진리에 대해서 외치고 복음을 보존하기 위한 분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논리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이 사실이며 하나님께서 분명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 즉 십자가의 복음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까지 날선 기준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며 분열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하나 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하나 됨은 맹목적인 연합이 아닙니다. 에큐메니컬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리가 보존되는 개혁교회 내에서의 하나 됨, 그것이 오늘 나누고 싶은 주제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교회의 하나 됨에 필요한 원리들를 성경 속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주님께서 받으신 자를 나도 받아들이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흔히 흑백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이런 차이가 극명한 부분이 은사와 영성의 부분입니다. ‘게리 토마스’는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라는 책을 통해 영성을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며 아홉 가지 정도의 영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와 은사를 강조합니다. 이런 신앙의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영역으로까지도 뻗어나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은한 음악이 있어야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마치 퀘이커 교도들의 예배처럼 침묵해야만 기도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의 격식을 굉장히 중요시 합니다. 이런 모습은 전통적인 장로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예배 시작 전에 반드시 성가대의 찬양과 함께 목사님이 뒤에서부터 걸어 나오며 등장해야 하고 사도신경이나 교독문 낭독과 같은 의식적인 행동들이 반드시 예배 순서에 들어가 있어야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예배의 의식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예배의 순서를 파괴해서 열린 예배처럼 영상이나 연극을 메시지와 예배 중간에 넣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연스러움 속에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일까요? 여기에 가장 적합한 대답은 둘 다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롬14:1~3)
본문은 믿음이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님이 모두 받으신 이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온 이들은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의 차이는 본질과 진리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균형 가운데 있다면 그걸로 되는 것입니다.
저는 늘 문제가 생기면 기도를 부탁하고 나눔을 하는 순장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주로 많은 말씀들을 하십니다. 물론 그 이상으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환상 같은 것을 본 역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순장님을 만날 때마다 익숙하지 않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나눔 가운데는 언제나 은혜가 있고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귀한 메시지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놀리듯이 ‘자꾸 보이고 들린다고 그러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그 분도 제 스타일을 알기 때문에 장난삼아 넘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저는 그 분께 환상도 좋지만 분명 말씀에 비추어야 함을 이야기 했습니다. 당시 저는 마음이 교만해진 상태였습니다. 그 때 그분의 한 마디가 저를 쾅 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 민진아. 그런데 보이는 걸 어떡하니?”
그 때 깨달았습니다. 은혜와 은사는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주로 말씀을 주십니다. 어떤 이들은 어떻게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지 신기해하며 묻습니다. 그러나 ‘읽으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게 되는데 어떡하느냐’는 것이 제 대답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남을 업신여기는 실수를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14:10~14)
성경은 교만함으로 지체를 판단하는 것에 대해 책망합니다. 방언을 하면 천박하고, 조용히 묵상하면 품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의해야겠습니다만 환상을 보았다고 무조건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말씀에 비추어 봄이 선행되고 공동체에 선을 이루며 사람을 살리는 환상은 분명 공동체에 유익을 줍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모두를 손으로 혹은 다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즉 각자에 맞는 역할을 주셨고 그에 맞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때문에 지체들의 모습이 다름을 우리는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의 환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시간을 정해 지붕으로 기도하러 갔을 때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환상으로 부정한 짐승들을 먹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정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며 먹지 않았습니다. 세 번을 반복적으로 환상으로 본 베드로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즉 하나님이 받으신 것에 대해 우리가 뭐라고 말 할 권리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각자에게 다른 은사와 영성의 색깔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업신여기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주신 분들은 더더욱 자세를 낮추어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발행하던 페이퍼를 닫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중에 페이퍼에 들어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일과 찬양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저는 제가 썼기 때문에 제 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글을 쓰게 하셨고 그 글을 완전히 하나님 것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밑에 달리는 댓글은 저에 대한 칭송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영광의 찬양이었습니다. 우리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많이 받은 자나 적게 받은 자나 하나님 앞에 다 같은 죄인이며 은혜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맙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받으신 사람을 내가 받을 수 없다고 말하지 맙시다. 그래서 겸손한 태도로 주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권위를 알고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온전히 질서를 세우고 봉사의 일을 맡기기 위해 몇 가지 직분을 직접 세우셨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보면 초대 교회 이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두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사와 교사입니다. 직분은 섬기기 위한 역할입니다. 그러나 책임을 지는 것 역시 직분에 포합되어 있습니다. 책임을 진다는 의미는 공동체로 보면 곧 리더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는 사도들이 주로 했던 두 가지 일이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행6:2~4)
물론 지금 시대에는 사도가 없기 때문에 사도의 역할까지 함께 하는 것이 바로 ‘목사’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견지에서 교회를 운영하는 책임자는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모든 일에 대해 목회자가 책임을 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목회자의 말에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과거 한국교회는 목회자를 하나님처럼 생각했습니다. 물론 목회자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에 대해 그런 존경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해서 사람은 모두 무시하고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태도가 옳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교회를 공동체로 만드셨겠습니까? 저는 목회자의 행동은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목사라는 직책에 그만한 책임과 또한 그만한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질서와 은혜를 위해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분명히 유익한 일입니다. 성경은 지체들이 자유함을 가지고 방종 하는데 쓰지 말고 서로 종노릇 하라고 말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신 목회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더 없이 순리적인 일입니다.
목회자를 존경하지 않고 비난하게 되면 세 가지 영역에서 문제가 됩니다. 첫째는 은혜가 사라집니다. 은혜의 주된 통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전하는 자가 바로 목회자입니다. 그런 목회자를 존경하지 않고 비판만한다면 은혜를 누릴 수 없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은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합니다. 말씀보다 내가 높아져 있으면 은혜가 흐를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녀들에게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가치관을 심어주게 됩니다. 가정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비를 통해 가정의 질서가 세워지게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주인도 예수님이시지만 목회자를 통해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목회자를 비판하게 되면 그것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의 신앙에 악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권위와 진리 자체를 받아들이는 영역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비진리의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기 때문에 목회자를 존경하지 않고 비난할 때 문제가 됩니다. 현재 교회가 분열되는 이유의 대부분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기득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처럼 지금의 교회들도 당파를 나눕니다. ‘목사파와 장로파’로 교회가 갈립니다. ‘기존의 기득권 세력’과 ‘새로 들어온 신흥 세력’으로 교회가 나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교회가 마치 정치판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십자가의 그늘 안에서 하나 되는 곳이지 권력을 중심으로 나뉘는 세속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의 진리로 하나 되게 하는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자가 바로 목회자입니다. 따라서 신도들은 목회자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필요한 두 가지가 주님께서 받으신 자를 나도 받아들이는 겸손함과 주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권위를 알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바울은 사랑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부자 청년이 와서 구원을 얻기 위한 계명에 대해 물을 때 십계명을 말씀하시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마19:18~19)이라고 정리해주십니다. 사도요한은 또 무엇을 말합니까?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약간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약간은 무뎌지는 것입니다.
지체들의 허물에 대해 한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교회의 하나 됨은 하나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자를 나도 받아들이는 겸손함을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권위를 알고 순종하는 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모든 지식 위해 사랑을 더하여 지체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대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