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의 기적을 만들어낸 데포르티보
이게 가능한 일인가. 상대는 밀란이고 3점을 넣어야 한다. 만약 골이라도 허용한다면 3점차 이상으로 이겨야 한다. 처음부터 안되는 싸움이었다. 이미 1차전의 4-1 패배로써 더이상의 성적을 기대한다는건 희망사항일 따름이었다. 어제의 경기서 모나코가 레알마드리드를 이기는 기적을 펼쳤지만 그건 오히려 밀란의 방심을 파고들 한 줄기 희망까지 사라지게 만들었을 뿐이다. 워낙에 데포르티보란 팀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잘 연출하긴 했지만 더 이상의 기적이란 꿈일 따름이다.
데포르티보의 유일한 희망은 홈인 리아소르에서의 경기란 것. 양 팀 징크스에 따른다면 지금까지 양 팀은 홈팀보다 원정팀들의 성적이 좋았다.하지만 이번 1차전에선 홈팀인 밀란이 대승을 거뒀다. 그러니 이번엔 2차전의 홈팀인 데포르티보가 승리할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논리가 과연 통할까?
차라리 상대가 레알마드리드였다면 데포르티보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네스타와 말디니란 당대 최고의 수비수들이 지키고 있는 중원에서부터의 압박수비가 세계최고라 불리는 밀란이다. 어떻게든 1~2점을 넣는 일은 가능해도 3점 이상을 득점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보였다. 전문가들일 수록 결과에 대한 판단은 더욱 냉정했다. 그러나, 그러나 그 말도 안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밀란에겐 씻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았고, 데포르티보는 팀 역사상 최고의 승리를 거뒀다.
현실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을 축구란 스포츠는 가능으로 바꾸어 놓았다. 승리한 데포르티보 팬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고 원정온 밀란 팬들은 꿈같은 현실에 반신반의해야 했다.
경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밀란은 1차전에서 결장한 네스타와 최근 리그에서 활약이 좋은 토마손을 투입했다. 데포르티보 역시 1차전에서 결장한 빅토르를 투입하고 최근 활약이 좋은 파블로가 선발로 나왔다. 어제 경기를 의식해서인지 디펜딩 챔피언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고 데포르티보 역시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킥오프가 되고 거센 데포르티보의 압박이 진행됐지만 먼저 찬스를 잡은 쪽은 밀란이었다. 오른쪽 측면에서 카푸가 로메로를 제치고 셰브첸코에게 날카로운 크로스를 날렸고 파블로가 가까스로 걷어냈다. 계속되는 찬스에서 토마손은 결정적인 찬스를 얻지만 공은 몰리나의 정면쪽으로 갔다.
위기 뒤에 찬스라 했던가. 빠르게 역습을 진행한 데포르티보, 왼쪽 측면에서 로메로가 중앙에 있는 판디아니를 보았고 패스를 연결했다. 뒤에는 밀란의 상징인 말디니가 마크하고 있었지만 한 번 볼을 키핑하고 재빨리 터닝슛으로 연결. 골. 그렇게 좋은 찬스도 아니었지만 판디아니는 너무나 쉽게 밀란의 골대를 유린했다. 자, 이제 2점 남았다. 3점과 2점의 차이, 그것은 불가능과 가능의 차이와도 같았다. 선취골이 의외로 일찍 터지면서 데포르티보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 생겼다.
이후 계속되는 데포르티보의 찬스. 2분 뒤 중앙에서 세르히오가 오른쪽으로 내준 볼을 빅토르가 슈팅. 아깝게 빗나갔지만 밀란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안첼로티 감독도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어지는 빅토르의 돌파는 날카로웠고 밀란의 역습에서 이어진 토마센의 오른쪽에서의 크로스는 안드라데의 발에 걸렸다.
데포르티보의 공격도 공격이지만 오늘의 데포르티보의 수비는 밀란의 역습을 너무나도 잘 차단했다. 18분경 안드라데가 오버래핑 이후 슈팅까지 연결하기는 했지만 상대 수비에게 차단을 당하면서 오히려 역습을 초래, 카카가 몰리나와 1대1로 맞서는 상황이 연출됐다. 하지만 1차전의 히어로는 이 절호의 찬스를 날려버렸고 1분 뒤에도 중거리슈팅을 날려봤지만 1차전에서의 슈팅감각을 오늘 경기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다. 밀란선수 중 유일하게 공수에서 고군분투했던 카푸가 오른쪽에서 좋은 돌파를 하며 위협적인 크로스를 날려보기도 했지만 공은 데포르티보 수비수들의 발이 먼저 닿았다.
이후 이어지는 데포르니보의 찬스. 21분 세르히오의 중거리 슛은 불발됐고 이후 발레론-빅토르-발레론으로 이어지는 멋진 패스웍에 의한 결정적인 슈팅이 나오지만 디다의 동물적인 선방에 막히며 분루를 삼켜야 했다. 계속되는 데포르티보의 공격상황. 루케의 왼쪽 돌파는 날카로웠지만 밀란의 역습찬스에서의 판카로의 중거리 슈팅 역시 위협적이었다. 33분경 오른쪽 측면에서 빅토르와 파블로가 공을 주고받다가 파블로가 크로스한 볼을 빅토르가 절묘하게 발리슛으로 연결하며 골대 구석을 노렸다. 그러나 디다는 또 한번 괴력을 발휘하며 팀을 위기에서 구했다. 만약 이 경기가 밀란의 승리로 이어졌다면 오늘의 히어로는 단연 디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전 베티스전에서 부상을 당했다던 빅토르와 루케의 몸놀림은 최상에 가까웠고, 무엇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2분 후. 마침내 2번째 골이 터진다. 코너킥에서부터 시작된 크로스가 왼쪽 측면으로 흘렀고 뒤쳐져 있던 루케가 이 공을 잡아 그대로 중앙으로 연결했다. 공은 밀란 수비수들을 지났고 여태까지 최고의 활약을 보이던 디다가 나와서 잡으려 했지만, 아뿔사! 공은 디다의 손을 외면한 채 발레론의 머리로 향했다. 그리고 이 찬스를 놓치지 않고 가볍게 헤딩으로 밀어넣는 발레론, 골!
이제 급한 쪽은 밀란이었다. 더 이상 안심할만한 스코어가 아니다. 원정경기인데다가 1점이라도 준다면 그대로 패배하는 시나리오였기 때문. 밀란도 이제 공격을 서둘러야 했다. 38분 셰도로프의 프리킥 상황에서의 슈팅, 이어진 피를로의 프리킥이 날카로웠지만 셰브첸코는 데포르티보의 거친 수비로 인해 정확한 헤딩으로 연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급기야 우려했던 사건이 터지고 만다.
공을 잡은 몰리나가 바로 전방으로 깊게 연결했고 밀란 수비수의 볼 키핑이 불안한 틈을 타 루케가 재빨리 가로채며 네스타와 말디니의 사이로 뛰어들어갔다. 빠른 스피드로 밀란 수비수들을 제치고 디다와 맞서는 찬스에서 오른쪽 포스트를 보며 쏜 슛이 골문 왼쪽 구석으로 향한다. 디다를 완벽하게 속이는 재치 있는 슛. 그렇게 밀란의 수문장은 미처 손도 써보지 못하고 무너지고야 만다.
관중석에선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데포르티보 선수들은 이 기쁨을 만끽했다. 그대로 전반전은 끝이 나고 이제 이루레타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어쩌면 전반전에선 별다른 작전은 필요없었다. 무조건 밀어부치고 결과는 하늘에 맡겼을 것이다. 이젠 어떠한가! 더 이상의 득점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수비이다. 하지만, 1차전 패배의 경험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판디아니의 선취골에 안주하며 수비적인 전술로 나갔고, 이는 밀란에게 흐름을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며 대패로 직결되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섣부르게 공격하다 밀란 공격수들에게 공간을 내준다면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밀란은 후반전에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고 나올 것이고 셰브첸코나 카카 등의 공격수는 능히 혼자서도 2~3명의 수비수를 농락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들이다. 즉, 공간을 내주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다. 흐름이냐 실리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문제는 감독들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선택의 갈림길일 것이다. 정답이란 없고 오직 결과만이 진리일 뿐. 후반전은 시작됐다. 밀란은 역시나 공격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데포르티보는 전반과 다름 없이 미드필드에 많은 숫자를 두며 실리가 아닌 흐름을 선택하는 작전으로 나온다. 후반 초반엔 밀란의 공격이 거셌다. 48분에는 판카로의 크로스가 셰브첸코의 헤딩슛까지 연결됐고, 3분 뒤에는 토마손이 몰리나와 맞서는 결정적인 찬스를 허무하게 날려버리기도 했다. 밀란은 곧바로 프리킥 찬스까지 맞이하며 계속 흐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에 데포르티보도 질세라 맞불 작전으로 거세게 밀란을 몰아부치며 56분경엔 판디아니의 인터셉트 - 발레론 - 빅토르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슈팅찬스를 만들어낸다.
치열한 미들싸움은 계속되고 밀란은 피를로 대신 세르징요를 투입하며 현 상황의 타개책을 마련한다. 하지만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64분경엔 발레론 판디아니의 위협적인 2:1패스로 찬스를 맞이, 가까스로 디다가 클리어한다.
데포르티보는 체력이 떨어진 루케 대신 노련한 프란을 투입했고 밀란은 오늘 부진했던 토마손대신 인자기를 투입하며 다시 한 번 반전을 기대한다. 그러나 안첼로티와 이루레타의 용병술 싸움에선 이루레타의 승리인 듯 했다. 프란과 발레론을 중심으로 한 데포르티보의 패스 플레이는 마치 볼이 발에 붙어다니는 것처럼 보였고, 파울이 아니고서야 밀란 수비수들이 공을 빼앗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데포르티보는 공을 돌리며 시간도 벌고 밀란 선수들을 초조하게 만드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봤고, 오히려 밀란 선수들이 무리하게 뺏으려 하다 보면 역으로 찬스를 허용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쐐기골이 터진다. 빅토르가 오른쪽 사이드를 돌파하며 길게 올린 크로스를 왼쪽에서 달려들던 프란이 한 번의 키핑으로 수비수를 제치며 그대로 슈팅. 디다가 위치를 잡았지만 공은 카푸의 다리에 맞고 굴절되어 들어가며 행운의 골이 터져나온 것이다. 리아소르는 또 한 번 열광의 도가니로 변하고, 그렇지만 밀란은 포기하기엔 아직 일렀다. 1점만 넣으면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갈수 있었기에.....
77분, 밀란은 수비수인 판카로를 빼고 루이 코스타를 투입하는 강수를 썼다. 데포르티보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밀어부치는 듯 했지만 81분경 루이코스타는 꽤 먼거리에서 중거리슈팅으로 골대 사각을 노린다. 그림 같이 뻗어갔지만 몰리나의 선방 또한 환상적이었다. 이후 코너킥찬스에서 어이진 루이코스타의 재차 슈팅은 또 한 번 몰리나의 품에 안겼다. 이제 승리의 여신은 데포르티보에게로 기운 듯 했다. 진작에 루이 코스타를 투입했으면...하는 아쉬움만 남는 순간이었다. 원정온 밀란팬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비춰졌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 있냐"는 표정의 안첼로티와 전혀 표정의 변함이 없는 이루레타의 모습 또한 대조적이었다.
85분, 데포르티보는 세르히오를 빼고 파이팅이 좋은 두셰르를 투입하여 좀 더 압박을 강화했고, 89분엔 후방에서 볼을 잡은 가투소가 중앙의 인자기에게 결정적인 쓰루패스를 시도하였다. 인자기도 터닝슛까지 연결했지만 몰리나의 정면으로 가는 위력 없는 슈팅이었다.
데포르티보는 이날도 좋은 활약을 보여준 발레론을 빼고 잘미냐를 투입하며 이제 버티기 모드로 들어갔다. 이후의 양팀의 공격은 별 위력이 없었고 인저리타임 4분이 넘긴 시점에서 경기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디펜딩 챔피언을 4:0으로 꺾는, 그야말로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기적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오늘의 경기를 간단히 종합해보자.
1차전에서 의외로 쉽게 선취점을 뽑은 데포르티보는 그 때의 흐름으로 승부를 끝낼 찬스가 있었지만 스스로 포기를 하고 비겨도 그만이란 생각으로 실리를 택했다. 하지만 이것은 밀란 수비수들의 적극적인 오버래핑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밀란의 양 윙백들인 카푸와 판카로는 최고의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 심지어 말디니까지 오버래핑에 가세하는 등 1차전에서의 작전은 밀란의 잠재력을 극대화시키는 일만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의 경기. 전반전 3골을 넣은 이후 더 이상의 득점은 사실상 크게 경기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데포르티보는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이는 밀란 공격수들이 볼을 잡는 횟수를 자연스럽게 줄여 총체적인 부진으로 이어지게 했고, 물론 몇 번의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어줬지만 결과적으론 무실점으로 막았다.
밀란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늘 경기는 그야말로 다시 생각하기 싫은 경기일 듯하다. 그렇게까지 크게 실수한 것도 아니었지만 신들린 듯한 데포르티보의 공격에 그저 당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수비에서 4점이나 실점했다는 것 자체가 밀란으로서 상상하기 힘든일이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비수들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모습도 아니었다. 문제는 오늘 공격진이 그리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고, 이는 1차전과는 정반대의 양상으로 데포르티보의 수비수들이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종합해서 볼 때 역시 데포르티보와 밀란의 이번 8강전이야말로 축구에서 흐름이란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려준 한판이 아닌가 한다. 그 동안 유럽의 각종 컵에서 라리가 팀들이 강세를 보인 이유도 이런 흐름을 중요시하는 경기 스타일 때문이고, 오늘의 주인공인 데포르티보가 그 동안 아스날이나 맨체스터 유벤투스 등을 이길 때의 모습도 바로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밀란은 분명히 최강팀이었다. 오늘의 경기결과는 필자로서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결국 밀란의 실리적인 팀 스타일도 흐름이란게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완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수비만 잘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공격에서 위협적인 상황을 연출하며 쉽사리 상대팀이 공격할 수 없게 만든 후 안정적인 수비로 뒷받침해야 비로소 완벽한 수비가 나온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오늘의 경기는 챔피언스리그 역사상으로도 손꼽히는 경기가 될 듯 하다. 이 믿을 수 없는 경기는 이제 역사 속에 묻어두고, 이젠 두 팀 모두 제 갈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데포르티보의 선전을 기대하며, 그리고 내년에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일 밀란을 기대하며 이만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