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무신론과 그리스도인의 삶-
강영안
(서강대 철학과 교수)
1.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과 현대의 질문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함께 한 마음과 입으로 고백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담긴 문서를 우리는 신앙고백서라고 부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등 16세기 교회 개혁이후 새로운 신앙서가 있지만 세계 교회가 공유하는 신앙 고백으로는 고대 교회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니케아신경, 사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사도신경은 누구나 알고 있는 신앙고백 문서입니다.
‘사도신경’(使徒信經)은 사도들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지만 문자 그대로는 ‘사도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영어로는 The Apostles' Creed라고 하는데, 여기서 Creed라는 말은 라틴어 크레도(Credo), 즉 “내가 믿는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라틴어로는 '숨볼룸 아포스톨로룸'(Symbolum Apostolorum)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희랍어를 라틴어화한 표현입니다. ). ‘사도들의 숨볼룸’, 곧 사도들의 신앙의 표지, 사도들의 일종의 비밀 표시 또는 암호와 같은 것입니다. 비밀결사단에 입단할 때 자기들만 아는 기호나 표지를 쓰지 않습니까?. 사도신경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1)
라틴어나 희랍어로 된 사도신경을 보면 ‘믿습니다’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이 때는 믿는다는 말을 직접 쓰지 않고 ‘엣’(et), ‘그리고’란 접속사로 연결해 두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성령과 거룩한 공회와…영생을 믿습니다”라고 할 때입니다. ‘크레도’란 동사에 주목해 보면 사도신경이 삼위 한 분 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임이 쉽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최근에 새로 번역한 사도신경에 이르기까지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이 사실이 드러나지 않습니다(우리가 현재 예배 중에 쓰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믿는다’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사도신경이 지닌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였거나 무시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가운데 첫줄은 (우리가 익숙한 번역을 따르자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고 되어 있습니다. 라틴어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oeli et terrae. 라틴어를 보면 이 구절은 우선 무엇보다 크레도 인(Credo in),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신뢰합니다”, “나는 의탁합니다”, “나는 맡깁니다”라는 말이지요. 누구를 신뢰하고 누구에게 의탁한다는 말입니까? ‘데움’,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 ‘아버지’(Patrem)시고, '전능자'(Omnipotentem)시고,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Creatorem coeli et terrae)라는 것이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하여 맨 먼저 하는 고백입니다. 라틴어 순서대로 직역하자면 아마도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버지시고, 전능자시며,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
내가 믿는다는 것이 출발점이고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나에게 아버지이며, 전능자이며, 천지의 창조주라고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이 사도신경 첫 줄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번역에는 이것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를 보면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데, 그 분은 천지를 만드신 분이고, 천지를 만드신 이유는 그 분이 전능하기 때문인 것처럼 고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원문과 거리가 먼 번역입니다.
어떻게 번역해서 쓰든 간에 사도신경 첫 줄 고백을 할 때 우리는 당장 문제에 봉착합니다. 과연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도 사도신경의 고백은 유효한가 하는 물음입니다. 서양 근대 문화가 우리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해야 하고, 이를 감수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유아기에서 헤어 나오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우리가 이 사실을 신앙 고백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있었던 일들을, 마치 아무런 일도 있지 않았던 것처럼 여길 수 없습니다. 예전에 믿던 사람들처럼 그렇게 신앙 고백을 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다섯 가지의 도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씩 이 문제들을 간단히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첫째, 현대 우주론의 도전입니다. 지난 20년 사이에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 우주는 하나님이 창조해서 생긴 공간이 아니라 물질과 에너지가 폭발하여 생긴 산물입니다. 학교에서는 이 우주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 가르치지 않고 이른바 ‘빅뱅’(Big Bang), ‘대폭발’의 산물이라 가르칩니다. 우주가 하나님의 창조 결과라는 주장은 교회에서나 하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현대 우주론에서는 150억 년 전 대폭발의 결과로 우주가 생겨났고, 지구는 약 40억 년 전에 출현했으며, 지구 위에 생명체가 생겨난 것은 약 30억 년 전이라고 가르칩니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생명이 지구상에 출현한 후로는 돌연 변이(genetic mutation)와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의 과정을 따라 진화되어 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과학 이론입니다. 만일 이러한 이론들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존재하고, 그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빅뱅을 통해 우주가 시작되었고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에서 고등한 생명체로 생명이 진화되었다는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존재하고, 그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왜 이 땅에 악과 고통이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은 전능하고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선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곧장 생기게 됩니다. 무엇이나 할 수 있고, 무엇이나 아시고, 언제나 선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라면 그가 만든 세계에는 죽음도 없어야 할 것이고(왜냐하면 죽음은 나쁜 것 중에서도 나쁜 것으로 우리에게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질병도 없어야 할 것이고, 장애자도 없어야 할 것이고, 불평등도, 미움도, 질투도, 전쟁도 없어야 할 것인데, 실제로 이와 같은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은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거나, 선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은 분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악의 문제’(the problem of evil)로서, 오랫동안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괴롭혀 온 문제입니다. 고통과 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전능자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셋째, 페미니스트(feminist) 신학자들,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따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의 산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몇 년 간 여러 교회들의 총회에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새로 번역하여 채택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어려움을 주는 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여전히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여성의 권리가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겨우 한 세기 전의 일입니다.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여성의 권리가 인정받기 시작했고, 아직까지도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부차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표현을 따르면 여성은 ‘제2의 성’, 곧 남성이 우선하고 그 다음에 오는 성, 부차적인 의미를 갖는 성입니다. 우리는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전혀 말도 되지 않는다고 배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실 교회에서조차 지난 2000년 동안 여성들은 2차적인 위치에 있었고, 엄청난 헌신과 봉사가 있었음에도 그에 걸맞은 위치나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은 이를 신학적으로 교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에 대해 반성해 보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넷째, 생태주의자들의 도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다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축복)을 주셨습니다. 생태주의자들이 문제 삼는 것은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입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 때문에 땅이 정복의 대상이 되었고, 인간들이 과도하게 땅을 개발하고 착취하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기원(Historical Origin of Ecological Crisis)이란 논문의 저자인 린 화이트 2세를 따르면, 인간이 자연을 마구 개발하게 된 두 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습니다.2) 그 가운데 하나가 농업 기술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가 사고방식의 변화인데, 기독교가 사고방식을 바꾸어 놓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땅을 곧 인간 중심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땅을 마구잡이로 개발한 동기가 되었다고 린 화이트와 그를 따라 기독교를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보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환경론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우리에게 주신 땅에 대한 사명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네 번째 도전입니다.
다섯째, 무신론의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무신론에는 물론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현실적 무신론, 또는 실제적 무신론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흔히 practical atheism이라고 합니다. 이론적인 무신론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지요.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신앙생활의 외적인 모습은 잘 갖추고 있지만, 그의 실제 삶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무신론입니다. 무신론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무신론입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보다 덜 위험하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을 갖는 무신론이 있습니다. 흔히 ‘이론적 무신론’이라고 부르는 무신론입니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사르트르, 러셀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입니다. 설명은 다르지만 모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환상’이고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이 모든 주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전히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우리를 괴롭힙니다3)
2. 무신론의 한 유형: 증거론적 무신론
다섯 문제 가운데 이 자리에서는 무신론 문제에 국한해서 잠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무신론에는 이론적 무신론과 실천적 무신론이 있습니다. 이론적 무신론에 대해 먼저 짧게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신론적 무신론도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두 가지 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는 증거가 없다는 주장에 근거한 무신론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의 환상이고 착각일 뿐이라는 주장에 근거한 무신론입니다. 먼저 첫 번째 주장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어떤 무엇을 믿는 데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생각을 증거주의(evidentialism)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18세기의 흄과 20세기의 버트란드 러셀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관련해서 증거주의자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논리적으로 그 증거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연역적(deductive)인 것도 아니고 귀납적(inductive)인 것도 아니고 귀추법적(abductive)인 것을 통해서 증명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경험을 통해서도 증거를 얻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20세기 무신론자 가운데 대표적인 철학자가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입니다.4) 누군가가 그에게 혹시 죽어서 하나님을 만나면 무엇이라 할 것인가 물었습니다. 러셀의 답은 이랬다고 합니다. “하나님, 충분한 증거를 주시지 않았어요(God, you gave insufficient evidence)”5) 18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러셀에 앞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증거에 비례해서 믿는다.”(A wise man proportions his belief to the evidence).6) 증거가 많으면 많을수록 믿음의 강도를 높이고, 증거가 약하면 약할수록 믿음의 강도를 낮추라는 것이지요. 기독교 신앙은 믿을 만한 증거가 별로 많지 않으므로 믿음의 강도를 낮추거나 아예 믿지 않는 것이 좋은 전략이라는 것이 흄의 생각이었습니다.
증거주의자들은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서도 경험적인 사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전제로부터 곧장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관찰 사실들을 모아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서술하는 일반적인 명제를 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 가설이 경험을 통해 관찰한 현상들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들은 증거 없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며 이 믿음에 대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들이 증거나 논변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지적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7)
이렇게 생각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19세기 수학자요 철학자인 윌리암 클리포드(W. K. Clifford)였습니다. 그가 쓴 ‘믿음의 윤리’(The Ethics of Belief)라는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8) 우리가 무엇인가를 믿는다면(이 믿음은 아주 넓은 의미였습니다. 예컨대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 보드마커로 칠판에 쓰면 검은 자국이 생긴다고 하는 것도 믿음에 속합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 의무가 무엇인지 서술한 것이 이 논문입니다.
“만일 믿음을 불충분한 증거를 토대로 수용했다면 그 즐거움은 훔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실제로 우리가 소유하지 않은 힘에 대한 의식을 제공해줌으로써 우리를 속일뿐 아니라 인류에 대한 의무를 무시하는 가운데 훔쳐 죄를 짓는 것이다. 그와 같은 믿음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해야 할 의무는 마치 우리 신체를 곧장 점령해 도시 전체로 퍼지는 전염병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어하는 것과 같다.”
“요컨대, 충분한 증거없이 무엇을 믿는 것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잘못된 것이다”(To sum up: it is wrong always, everywhere, and for anyone to believe anything upon insufficient evidence).
클리포드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에게 빚이 있으면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고, 약속을 했으면 약속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믿는다면 믿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지적인 의무(intellectual duty)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믿는다면, 그렇게 믿어야 할 증거를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 기준을 따르면 하나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겸손히 순종하면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지적인 의무를 저버리고 산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자 100명을 세워두고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마치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증명하듯이 증명해 보라고 한다면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믿음이 불합리하고 말도 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상이 증거주의자들이 요구하는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최소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것이 과연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한번 눈을 감고서 제가 여기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눈을 떠 보십시오. 제가 사라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보드마커로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제 의지로 부정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믿음은 의지의 결과가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의 결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여기서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은 의지가 배제된 단순한 신념이나 믿음(belief)의 차원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의지가 포함된 신앙(faith)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문제는 단순히 belief차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지식과 의지와 감정이 모두 개입되어 있습니다. 신앙을 trust나 commitment라고 할 때 이 세 가지의 전인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돈 일억 원을 주면서 이 사실을 믿지 말라고 하거나 강제로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고 해도 그 믿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의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을 통해, 또는 말씀을 듣고, 기타 여러 계기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면, 이 믿음을 우리의 의지로 지워 버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교회에 참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의지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으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과연 우리가 모든 경우에 증거를 갖다 대야 할 의무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해 어떤 경우에나 증거를 요구한다는 것이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금방 명백해집니다. 예컨대 저는 아침에 커피를 마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침에 커피를 마셨다는 저의 믿음에 대해 증거가 있어야 합니까? 제가 기억하는 대로 분명히 저는 커피를 마셨고 만일 다른 사람이 묻는다면 제 기억에 의존해서 “그렇다”고 답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다른 증거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믿음과 생각은 사실 모두 다 따져 보지 않고 믿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상당히 많은 것들은 교과서를 통해 알고, 신문을 통해 얻고, 책을 통해서 익힌 것들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일일이 체크해야 한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적을 것입니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해 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피타고라스 정리는 여전히 참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믿음 자체로 충분한 것이지 어떤 증거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나의 믿음이 왜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지, 그것을 지지할 다른 믿음을 증거로 사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철학자인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 자체로 어떤 다른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 ‘적절히 기초적인 믿음’(properly basic belief), ‘그 자체로 적합한 기초적인 믿음’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어떤 다른 증거를 기초로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증거의 필요 없이 믿었으면 그 믿음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커피를 마셨다는 믿음이 어떤 다른 증거나 논변을 요구하지 않고 그 자체로 ‘적절히 기초적인 믿음’이듯이 내가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도 다른 ‘증거’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적절히 기초적인 믿음’입니다.9)
여기 앉은 분들 가운데(이 책을 읽는 분들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알기 위해서 증거를 수집하고 충분히 저울에 달아본 다음 믿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우리 삶 속에서 현존하심을 믿습니다. 우리 자신이 도무지 헤어날 수 없는 큰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셨다는 확신을 갖는 순간, 캄캄한 산속에서 텐트에 혼자 자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올림픽대로를 운전하다가 서쪽 노을 진 그 모습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온갖 서술할 수 없는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주시고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증거주의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증거가 없다는 데 대해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만일 모든 것에 다 기초가 있고 증거가 있어야 된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수업을 마치고 하루일과가 끝이 나면 지하철을 타기 위해 이대입구 전철역으로 갑니다. 만일 오늘 지하철이 안 다닐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역으로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다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전철이 다니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이죠. 아침에 빵을 먹으면서, 이 빵을 먹으면 과연 배가 부를까 하고 의심을 한다면 빵을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고민 없이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먹으니까 요기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계몽주의 이후의 무신론이 지닌 기본적인 태도는, 우리의 믿음은 신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만들어 낸 대표적인 인물이 데카르트입니다.10) 확실하게 검토해 보기 전에는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거기서 출발하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무엇을 배우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전혀 올바른 권고가 아닙니다. 수를 익히거나 글자를 배울 때, 또는 지리에 관한 내용들은 배울 때, 아이들은 스스로 검토해 보지 않은 채로 선생님이나 부모께로부터 들은 내용을 바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지식에는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대개 중고등학교 때까지 배우는 것은 지식의 재생산일 뿐이고, 실제로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나중에 연구자가 되면 잘못된 많은 것을 깨닫고 수정을 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지식이라도 기본적으로는 신뢰에서 출발하고 신뢰를 통해 받아들일 수 있어야 그 다음에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참다운 지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의심에서 출발한 근대 인식론은 결국 무신론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많은 다른 문제들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의심에서 출발한 결과 근대 인식론은 우리 외부의 문제(the existence of the external world), 바깥 세계에 대한 의문을 낳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저기 나무도 있고 해도 있고 달도 있는데 이들의 존재를 아무도 증명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타인의 존재에 대해서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를 ‘the problem of the other mind’(타인의 마음의 문제)라고 합니다. 타인이 과연 존재하는지, 타인이 생각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 사람이 정말 사람인지, 로봇인지 도무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의심에서 출발하니까 하나님뿐 아니라 우리가 눈 뜨고 보면 당연히 존재하는 세계 자체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데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책상을 내리치면 손이 아프다는 것을 알고 딱딱한 데 내 머리가 부딪치면 머리가 깨진다는 것을 알고, 저기에 자동차와 집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이미 우리가 신뢰 가운데 수용한 세계이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을 믿으며 사는 것이 사람도 제대로 알고 이 세상도 제대로 알고 하나님도 제대로 아는 방법입니다.
3. 무신론의 다른 유형: 혐의론적 무신론과 칼빈의 답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사람[증거주의적 무신론자]들의 논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으며, 보이는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종류의 무신론입니다. 바로 우리의 믿음이 환상이나 착각에 불과하다고 보는 태도입니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니체가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믿는 믿음에는 무엇인가 나쁜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 프로이트의 생각을 들어 보겠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리의 형태로 주어지는 종교적 관념들은 경험의 침전물도 아니고 사색의 최종 결과도 아니다. 그것들은 환상이며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하고 절박한 원망의 실현이다.”11)
프로이트는 우리에게는 어떤 바람이 있는데 그 바람을 지어낸 생각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 종교라고 봅니다. 폭풍이나 번개, 천둥 같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자연의 힘을 경험한 원시 상태의 사람들이 아버지와 같은 인물을 상정해 놓고, 마치 하나님이 아주 능력이 있는 아버지인 것처럼 상상하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프로이트는 종교를 ‘인류의 보편적인 강박 신경증(노이로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12) 종교란 제거해야 할 일종의 정신병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종교로부터 해방될 때 비로소 인간이 처해 있는 처절한 현실을 아무런 환상이나 착각 없이 직시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적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여전히 유아기적인 미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지요.
프로이트가 하나님을 믿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다른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13) 이 책의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통해 프로이트가 하나님을 못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을 따르면 프로이트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비엔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프로이트는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비엔나 시내를 걸어가다가 아주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반유대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 프로이트의 아버지가 쓰고 있던 모자를 걷어 시궁창에 버린 일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일언반구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길을 돌리고 피하고 말지요. 프로이트의 아버지는 덩치도 크고 힘도 세고 아주 권위주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자신이 인종 차별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프로이트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상이 완전히 일그러지게 됩니다. 그 후로 프로이트는 자라가면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여러 차례 더 보게 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들이 프로이트가 경험한 여러 사건들과 더불어 아버지를 불신하도록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불신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프로이트가 설명하는 방식으로 프로이트의 불신에 대해 설명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경우도 프로이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종교를 하나의 착각이요 환상으로 봅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종교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어디선가 또다시 자신을 잃어버린 인간의 자기의식이요 자기감정이다. 하지만 인간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인간은 인간들의 세계요, 국가, 사회다. 이 국가, 이 사회가 종교, 곧 그릇된 세계의식(ein verkehrtes Weltbewusstsein)을 산출한다. 왜냐하면 이 국가, 이 사회가 그릇된 세계(verkehrte Welt) 이기 때문이다.…종교는 영혼이 결여된 상태의 영혼이요, 억압받은 피조물의 신음이요, 심장 없는 세계의 감정이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das Opium des Volks)이다.”14)
다른 부분은 몰라도 아마 “종교는 민종의 아편”이라고 하는 마지막 문구는 다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는 자본자와 노동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가진 자가 있는 이 왜곡된 사회 현실 속에서 고통을 견디게 하는 일종의 마약, 마취제와 같았습니다. 이 부당한 현실을 직시해서 정면해서 대항하고 싸우지 못하고 내세를 바라보면서 현실에 있는 모든 고통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구절을 한 군데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환상적인 행복인 종교의 폐지는 진정한 행복을 위한 요청이다. 민중들이 그들의 조건과 관련해서 환상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하는 것은 환상을 필요로 한 조건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라고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15)
사람들은 종교라고 하는 환상에 사로잡혀서 자신이 마치 행복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종교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습니다. 종교를 없애 버리기 전까지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폐기하면 자동적으로 종교도 폐기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프로이트가 종교를 심리학적 문제로 보았던 데 비해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사회 경제적인 질서와 관련하여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종교를 그릇된 의식으로 보았다는 데서 프로이트와 견해를 같이합니다. 그을 따르면 착취와 억압 속에서 민중들이 유일한 안식처로 삼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그는 종교를 폐지하려면 그릇된 세계 질서를 폐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종교를 폐지하는 것과 계급적인 사회 질서를 바꾸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종교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가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회를 바꾸려면 종교를 없애야 하고,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왜곡된 사회 질서를 비판하기 위한 전제가 됩니다.
증거주의자들은 신앙에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증거가 문제가 아니라 인식 기능 자체의 오작동으로 인해 신앙이 생긴다고 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은 착각에 빠져 있으며, 실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상상하는 것이 마치 실재인 것처럼 본다는 것이지요. ‘환상(幻想)’을 뜻하는 영어 단어 ‘illusion’에 이러한 뜻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illusion은 라틴어 in(속으로)+ludus(놀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상상을 통해 놀이 속으로 들어간 결과, 그것을 마치 현실인 것처럼 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우리의 인식 기능과 감각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면,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게 느끼고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도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인식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삭제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천지창조도, 사후세계도 천국도 지옥도, 심판자 등도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고, 한 백성을 택하여 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백성을 택하셨다고 믿는 것은 정말로 착각이고 환상일까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인식 기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잘못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오작동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혐의를 가져볼 수 있습니다. 플랜팅가와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 같은 개혁주의 인식론자들, 포담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메롤드 웨스트팔(Merold Westphal)의 주장을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 기능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16) 죄의 영향 때문에 사물과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불신은 죄의 결과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 19-23)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죄가 참된 인식, 참된 현실을 보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생각을 신학적으로 가장 잘 정리한 이가 아마도 칼빈일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1권 3장 1절 시작 부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상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知覺)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신선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생명을 바쳐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된다.…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확신을 갖지 못할 만큼 미개한 국민이나 야만적인 종족은 없다. (중략)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항상 무엇인가 종교의 씨앗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 (중략) 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하나의 무언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17)
이어 3절 초두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에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하나님 의식[神意識]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항상 확신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떤 신(神)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나면서부터 고유하다. 그리고 이 믿음이 모든 사람의 골수까지 깊이 고정되어 있다.”18)
이처럼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너무도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칼빈은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무감각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본성적으로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배의 씨앗’(종교의 씨앗)을 억눌러 자라지 못하도록 하는 까닭은 우리가 무감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생래적인 의식에 의해 아낌없이 내적으로 제시되었으나 오만하고 상습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져,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기억을 미친 듯이 쫓아버리는 사람들이 많다”(강요, I, 4, 2)는 것입니다. 둘째, 죄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강요당하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반항하며 끌려가기 전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강요, I, 4, 4).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과 존경을 보내지 않고 자신을 끝까지 지탱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이 있고, 이것이 죄로 인해 억압을 받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기에 나무가 서 있다는 것을 믿듯이,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있고 생각할 줄 알고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믿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존재도 믿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믿지 못하는 까닭은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까닭은, 칼빈을 따르면, 우리에게 일종의 인식 기능상의 결함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환상이나 착각으로 본 것이 실제 현실이고, 그들이 현실로 본 것이 오히려 착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우리의 현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우리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합리적인가 합리적이지 않은가, 말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은 결국 이 세계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인식론의 문제는 결국 존재론과 인간학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번 가정해 보지요. 예를 들어 이 탁자의 존재가 무엇입니까? 생김새, 재료, 누가 만들었는가, 이 모두가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이것의 쓰임새, 곧 연단에 두고 강의를 할 수 있는 보조 도구로서의 이것의 적절한 기능일 것입니다. 옷의 존재는 무엇일까요? 몸을 가려 주고 보온을 해 주며 겉모습이 예뻐 보이도록 하는 것이겠지요. 신발의 존재는 무엇일까요? 발을 보호하고 걸을 때 발을 편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어떤 것의 존재는 그것의 쓰임새, 그것의 적합한 기능을 하는 데 있고, 그 각각의 기능은 만든 사람과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와 설계에 달려 있습니다. 의도와 설계를 떠나 탁자, 옷, 신발의 존재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요? 방금 이야기한 것의 연장선에서 보자면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기능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기능해야 인간이 인간답게 기능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선택의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기독교적 유신론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현대 세계관을 지배하는 사상이 주장하는 바를 따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를 따라 우리의 존재론과 인간론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현대의 세계관 중 가장 강력한 사상으로 자연주의(naturalism)와 반실재론(anti-realism), 그리고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을 들 수 있습니다.19) 이 가운데서 아마 인간의 존재와 기능과 관련해서 가장 유력한 후보를 들자면 자연주의일 것입니다. 자연주의를 가장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며 자연을 구성하는 물질의 원리에 따라 모든 것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어떤 ‘의도’나 ‘설계’를 말할 수 없습니다. 물질이 가지고 있는, 자연 자체에 내재한 운동의 법칙이나 우연성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모든 것의 존재와 기능을 설명해야 합니다. 자연주의자들은 이로부터 과학, 도덕, 예술, 심지어 종교의 출현까지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자연주의를 철저히 옹호할 경우 이어지는 결론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저는 버트란드 러셀이 도달한 결론이 가장 정직하고 솔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러셀의 ‘자유인의 숭배’라는 글에 나오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사람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원인들의 산물이라든지, 사람의 출생, 성장, 그가 가지고 있는 희망과 두려움, 그의 사랑과 믿음은 단지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든지, 어떤 정열도, 어떠한 용맹도, 어떠한 강렬한 사유와 감정도 내세에서는 개인의 삶을 보존할 수 없다든지, 모든 세대의 수고와 헌신과 영감과 번쩍이는 천재성도 태양계의 종말이 오면 소멸할 수밖에 없다든지, 인류의 업적을 자랑하는 전당도 이 우주가 파멸하면 어쩔 수 없이 분토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말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없더라도 너무나 확실해서 어느 철학도 그것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영혼의 거처는 차후에 이러한 진리들을 발판으로 할 때에만,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기초할 때에만 안전하게 세워질 수 있다.20)
러셀을 따르면 1)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원인들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2) 사람의 출생, 성장, 사람이 가지고 있는 희망과 두려움, 사랑과 믿음은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3) 어떠한 정열도, 어떠한 용맹도, 어떠한 강렬한 사유와 감정도 내세에서는 개인의 삶을 보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세대의 수고와 헌신과 영감과 번쩍이는 천재성도 태양계의 종말이 오면 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주의의 결론은 우리 인간의 삶에는 자연 바깥에서 주어진 어떤 근거나 목적,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삶을 근거지어 주는 근거, 토대, 목적, 의미, 목표가 없다는 생각을 일컬어 ‘아무 것도 없다(nihil, nothing)는 주의’, 곧 ‘허무주의’(nihilism)라고 부릅니다. 러셀은 자연주의의 정직한 결론이 허무주의일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와는 반대로 만일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와 설계를 수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는 인간에게 주어진 기능을 가장 적절하게 발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 기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합당한 존경을 돌려 드리고, 이웃과 자연, 그리고 나와 더불어 평화롭고, 나에게 주어진 삶을 정성과 마음과 힘을 다해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잘 사용하여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 능력은 사물을 인식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삶을 계획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자면 우리의 인식 기관들이 제 기능(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기억하고, 추론하는 일 등)을 해야 합니다. 마치 냉장고가 설계자의 의도대로 제대로 작동될 때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듯이, 우리의 인식도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작동할 때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냉장고는 냉장고를 만든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죄로 인하여 억압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이것이 칼빈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를 깨우쳐 주시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하게 알게 되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어떠하심에 대해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강요』 1권 6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필연적으로 공허와 오류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21)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해야 할 이유는, 무엇보다도 말씀과 기도, 삶의 기쁨과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정들어 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 가까이 있는 타인이나 멀리 있는 타인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교회마다 교제를 부쩍 강조하고 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할 때 우리 자신과의 교제나 타인과의 교제나 자연과의 교제는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어느 책도 성경만큼 우리가 알아야 하고 합당한 존경을 드려야 할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책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힘써 연구하고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말씀 앞에 내어 놓고 말씀을 읽는 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삼위 한 분 되신 하나님을 배우고 삼위 한 분 되신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직 삼위 하나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근거이며, 삶의 주인이며, 삶의 희망임을 알고, 이로부터 깊이 우러나온 감사로 인해 우리의 삶을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우리에게는 감사와 찬송이 우러나오고, 감사와 찬송이 우러나올 때 그야말로 우리의 삶 전체가 감사로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4. 신자들 가운데 있는 무신론: ‘현실적, 실제적 무신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이론적인 무신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현실적, 실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m)입니다(이 용어는 현재까지 제가 확인한 바로는 칸트가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우리의 교회 현실에서 중요하고 더욱 심각한 것은 바로 이 현실적,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왜냐하면 이론적 무신론자들은 교회 바깥에 있지만 실제적, 현실적 무신론자들은 교회 안에 있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의 백성의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적, 현실적 무신론자란 누구를 말합니까? 디도서 1:16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이처럼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말하고 고백하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바로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시편에도 이와 꼭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편 14:1-3을 읽어 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이 구절은 나중에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대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삶을 들여다보면 선행을 하지 않고 악행을 합니다. 시편 10:4에도 꼭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이들은 이론적인 의미에서의 무신론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무신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인터넷을 통해서 읽은 글에서 뉴욕주 픽스킬 루터교회에서 목회하는 윌리암 터지슨(William P. Terjesen)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무신론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실제적 무신론자들은 수백만이나 주변에 있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다.”22)
바깥에서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 삶에서 무신론자처럼,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실제적, 현실적 무신론자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터지슨은 네 가지를 그 방법으로 제안합니다.
첫째, 신자임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많은 의견 가운데 단지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경험이나 세상 상식이 더 중요한 잣대와 기준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성경의 가르침은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 삶의 기준이나 잣대가 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따라 살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나 관점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둘째,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그의 세계관과 철학, 삶의 가치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철학과 가치관에 의존해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 세습을 하거나 세속적인 가치관에 따라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는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따라서 기도할 필요 없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넷째,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은 기대를 하는 사람입니다. 예컨대 도덕적으로 선하게 행하면 천국 갈 것이고, 약간 문제가 있더라도 하나님이 천국에 들여 주리라 믿는 사람입니다. 행위의 의로움이 의존하는 사람을 두고 터지슨은 현실적 무신론자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 네 가지 기준에 대해 대체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 기준은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일종의 ‘지식’에 치우쳐 있습니다. 현실적 무신론자는 단지 이런 지식 면에서 잘못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데서 그 자신을 더 드러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실제로 무신론자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요? 입으로 주여, 주여 외치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기도하는 자리에 자주 앉지만,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하나님 자리에 대신 두는 사람이면 그야말로 현실적으로 무신론자라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 할수록, 현실적 무신론자가 될 가능성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높아 보입니다.23)
6. 신앙 고백과 그리스도인의 삶
서두에서 언급했던 신앙 고백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루터의 해설을 통해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아버지이시고, 전능자이시고,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라는 나의 고백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어떤 실천적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교회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누구보다도 이것을 잘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1529년 작성한 『루터 박사의 소요리문답』(Dr. Luther's Enchiridion: Der Kleine Cathechismus)가운데 사도신경 첫 고백 부분에 대한 해설을 함께 보기를 제안합니다. 루터는 첫 고백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몸과 영혼, 눈, 귀, 나의 모든 지체와 나의 이성과 나의 모든 감각, 옷과 신발, 먹을거리와 마실 것, 집과 가정, 아내와 아이, 땅과 가축과 나의 모든 재산을 나에게 주시고 지금도 붙들어 주신다는 것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날마다 풍족하게 공급하시며 모든 위험에서 나를 보호하시며 모든 악에서 나를 지켜 주신다는 것과,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그분의 순전한 부성적이며 신적인 선함과 자비로부터 행하셔서 어떤 공적이나 자격을 나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나는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분께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참된 것입니다.”24)
저는 사도신경의 첫째 구절을 이렇게 간명하게 설명해 준 사례를 보지 못했습니다. 루터의 해석은 짧고도 쉽고 대단히 실제적입니다. 전문적인 신학적 해석이 여기 없습니다. 구체적인 나의 삶에서 시작하여 그분이 누구이시고,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루터의 설명은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설과 구별됩니다. 아퀴나스의 논지는 이렇습니다.25)
-신자들이 믿어야 할 진리 가운데 으뜸 되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은 만물의 통치자이며 섭리자임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섭리하심을 믿는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이고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있게 된 것이라 믿고자 하는 이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그러므로 한정된 시간과 질서 가운데 작동하는 모든 존재가 어떤 분의 통치와 예지와 질서 잡힌 배려에 종속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이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자연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인간사를 통치하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악인이 번창하고 선인이 고난 받는 일을 세상에서 보기 때문에, 이것으로부터 하나님이 인간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추론한다.
-이러한 추론은 불합리한 데, 그 까닭은 의사가 분명한 의학적 이유 때문에 어떤 이에게는 물을 처방하고 어떤 이에게는 포도주를 처방하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의학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연히 그렇게 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사의 통치자이며 섭리자임을 확고하게 믿어야 한다.
아퀴나스의 사도신경 해설은 이런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그의 해설도 비교적 간단하고 실제적이지만 역시 보편적 원리를 먼저 드러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 세계는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창조주와 섭리자 되신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선한 자들이 당하는 고통도 당사자는 비록 그 이유를 모르더라도 하나님은 선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루터의 해설은 아퀴나스와 달리 ‘나’에게서 출발합니다.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로 신앙 고백을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나와 관련해서 믿음의 내용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루터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를 하나님이 다른 존재하는 것들과 함께 창조하였습니다.” 이 때 ‘나’는 주격이 아니라 목적격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독일어 말하자면 Ich glaube, dass mich Gott geschaffen hat..."(나를 하나님이 .... 창조하신 것을 나는 믿습니다, 필자 강조)라고 루터는 첫 고백을 풀어씁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고 지금도 보존하신 것들에 대해서 얘기할 때 루터는 ‘몸’을 먼저 언급하고는, 그 다음에 이어 영혼을 말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점점 범위를 넓혀 갑니다. 매우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루터의 방식은 사도신경의 고백이 하나님을 우리와 지극히 친근한 아버지에서부터 시작하여 전능자로, 전능자에서 다시 창조주로 확대해 가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역시 ‘나’를 (주격이 아니라 목적격으로 배치했다고 하더라도) 직접 하나님과 대면해서 신앙 고백을 한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굳이 말을 붙여 얘기하자면 근대의 특징인 “‘나’라는 주체로의 관심 전환”이라 부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루터가 여기에서 말하는 ‘나’는 데카르트의 ‘주격적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레비나스적인 ‘목적격적 주체’라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26) 내가 생각하고, 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서 선 존재, 하나님의 부름으로 인해 나를 그 분께 응답으로, 반응으로 내어 놓는 주체, 하나님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부름을 무시할 때, 그 무응답으로 인해 ‘고발될 수 있는’(accusable) 주체, 타인의 짐을 짊어지고 책임질 수 있는 주체,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와 낯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주체가 아니라, 먹고 마시고 잠자고 타인과 더불어 일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주체가 루터가 여기서 ‘나’라고 표현한 존재의 모습입니다.
루터는 『소요리문답』에서 사도신경 첫 고백에 대해서 믿는다고 고백하는 내용 네 가지와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 한 가지를 제시합니다.
-나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몸과 관련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