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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새먼] 경복궁을 죽이는 문화재 행정

이예나 |2008.03.05 10:55
조회 79 |추천 0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다들 그랬듯 나도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전소된 사건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솔직히 "문화재청이 이번 일로 국민들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게 돼서 잘됐다"는 생각도 했다.


숭례문 화재 직후의 어느 일요일, 나는 관광 책자마다 '최고의 명소'라고 써 있는 경복궁을 찾았다. 매표소에 외국인용 오디오 가이드와 지도가 없어 깜짝 놀랐다. 궁궐엔 이런 것이 당연히 잘 구비된 줄 알았다. 어쨌든 들어갔다



경복궁은 건축학적 걸작이다. 흥례문을 액자 삼아 북악산을 등지고 선 근정전을 바라보자니, 태조와 무학대사가 궁궐 터를 제대로 잡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경복궁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이다. 그곳에 산 왕과 비, 문관과 무관, 후궁과 내시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떤 즉위식과 반란, 승리와 재난, 스캔들과 음모가 벌어졌을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런 궁금증에 대해 아무 대답도 얻을 수 없었다. 궁궐 외관에 경탄하고 나서 내부를 들여다보니 먼지 쌓인 컴컴한 방들이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침전에 들어서면서 나는 왕족들의 일상이 궁금했다. 왕족들은 무엇을 먹고 어디서 목욕을 했으며, 여가 시간엔 무엇을 했을까? 역시 아무 대답도 얻을 수 없다. 표지판에는 "경회루의 면적은 933㎡이며 기둥 24개가 있다"고 써있을 뿐, 거기서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몇 안 되는 표지판에 쓰인 영어라곤 '출입금지(Keep Out)'뿐이었다. 안내문이 들려주는 역사는 일본의 만행뿐인데 그나마 부정확했다. 
 

경복궁 옆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의복, 그림, 무기, 휘장 등이 빽빽하게 진열돼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왜 궁궐 자체를 박물관 같은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지 않는 걸까? "조선의 제12대 국왕 인종의 태실(胎室·왕의 탯줄 보관함)"이라는 안내문을 예로 들자. 누가, 왜 국왕의 탯줄을 보관했을까? 관광객이 알고 싶은 정보는 바로 이런 '이야기'인데, 문화재청 안내문에는 삶도, 인간도 없고 정보만 있다.

나는 경복궁을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다. 경복궁은 훌륭하지만, 건축물 이상이 되어야 한다. 유물을 방안에 진열해서 생활상을 보여줘야 한다. 방 안에 조명을 켜고 궁중 음악이 흐르게 할 수는 없을까? 드라마 '대장금'의 무대인 궁궐 수라간을 실감나게 보여줄 길은 없을까?

한국의 기술력이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능히 과거의 왕궁을 복원하고 역사적 사건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안 하는 것뿐이다.

 

어째서 오디오 가이드가 없을까? 베이징 자금성(紫禁城)조차 '007 시리즈'로 유명한 영화배우 로저 무어가 낭독하는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한다.

해외에선 전통의상을 입은 가이드가 실감나는 설명을 한다. 가령 런던탑 가이드는 이런 식이다. "1649년 추운 겨울 아침, 국왕 찰스 1세가 처형대에 올라갔습니다. 망나니가 도끼를 휘두르자 행인들 손수건에 피가 튀고, 국왕의 머리통이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경복궁을 디즈니랜드나 사극 세트장으로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다. 존엄성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유적에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방법이 여럿 있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경복궁은 무능한 교사처럼 역사를 가르친다. 이름, 연도, 면적을 나열할 뿐 생생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지명이나 숫자보다 이야기를 잘 기억한다. "읽히게 쓴다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미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매컬로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대로라면 외국 관광객들은 사진만 잔뜩 찍고, 일본의 만행만 배운 채 경복궁을 떠날 것이다.

문화재청은 관광객 안내가 아니라, 문화유산 보존이 자기네 본연의 업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관광 수입은 전 세계 GDP의 10%를 차지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관광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공약했다. 궁궐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토록 멋진 궁궐을 그처럼 구태의연하게 운영하다니!




▲ 앤드루 새먼(Salmon)


영국 더타임스紙서울 특파원



[앤드루 새먼(Salmon) 영국 더타임스紙서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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