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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원 |2008.03.11 23:52
조회 41 |추천 0

 

 

재미있었지만 한편에선 씁쓸하다. 새벽에 잠에서 깰 정도로 끔찍한 몇몇 장면들이 기억에 가장 오래 남겠지만, 그것 외에도 여러가지 생각할 점들을 주는 영화다. 워낙 복잡해서 몇 가지를 정리해보기로 했다.


 

1. 여성의 지위

 

이 글을 쓰는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지라 이런 말 하기 쑥쓰럽지만, 이 영화를 보다보면 정말 우리 나라에서 여성은 노예는 커녕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포주에게 뜯기는 성매매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도 그러하거니와, 왜 유독 연쇄살인범은 여성만을 겨냥하는가 하는 물음도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젊은 여성, 그것도 윤락녀.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억울함을 제기해도 누구하나 들어줄 사람 없을 뿐더러, 사라져도 전 사회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아니, 역설적이게도 오직 포주만이 관심을 가질) 사람들이 범죄의 희생양이 된다는 현실에 대해 우리 중 죄책감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거기다 여자 형자 역시 단지 여자란 이유로 용의자의 성희롱 대상이 되고, 그녀 역시 용의자에게 욕 몇 마디 하는 것 이외에 하소연할 길이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 아닌가.

 

살인자 지영민은 여자를 죽이기 전에, "니가 살 이유가 있어?" 하고 물어본다.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 그들은 살인자가 보기에 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살인자를 비난하기 전에, 그녀들을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로 전락시킨 우리 사회를 먼저 비난해야 이치가 맞지 않을까? 포주가 만든 철창에 갇혀서 타죽어간 2000년 군산의 성매매 여성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2. 불평등

 

새벽부터 재래시장에서 유세를 돌다가 인분을 맞은 서울시장. 경찰들은 오로지 시장이 인분을 맞았다는 것(그리고 이 때문에 경찰의 위신이 실추됐다는 것), 그래서 이 사건을 덮기 위해 다른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것, 조영민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서라도) 구속해서 사회적 주목을 이쪽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처음부터 그들은 사라진 여성 미진의 생사 여부에는, 미진의 딸의 목숨에는 관심이 없다. 역설적으로 미진을 살인자에게 팔아넘긴 포주 엄중호만이 미진을 구하고 싶어 안달이다.

 

정말이지 미친 세상이 아닌가? 빈민들을 철거해서 인분을 얻어맞은 서울시장의 명예가 피해 여성의 생명보다 존중받는 세상, 고작 인분을 얻어맞았을뿐인 시장은 VIP룸에 눕지만 미진과 그의 딸은 누구도 돌봐주지 않은 세상 속에서 그 누가 인간이 평등하다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을까?

 

3. 경찰, 제대로 엿먹다

 

 제대로 경찰을 엿 먹이는 영화다. 범인이 죄다 진술을 하는데도 증거를 찾지 못하고 헛군데다 삽질만 하다가 결국 범인을 풀어주고, 자기들끼리 의견일치가 안 돼서 이전투구를 벌이고, 처음부터 범인을 잡아서 성과를 올리는 데에만 급급할 뿐 사람들의 생명에는 관심 하나 없고, 신고가 들어와도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고, 결국 대낮에 범인이 여자 두 명을 망치고 때려죽이고 시체와 함께 쬐끄만한 창문으로 도망쳐서 시체를 토막을 내서 어항에 가두고 느긋하게 담배를 즐기는 동안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경찰의 모습은 한심하다 못해 귀엽기까지 하다. 제기랄.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오는 날, 경찰들은 데모진압하는 데 동원되었고 이 때문에 범인이 여중생을 살해해서 그의 음부에 필기구까지 집어놓는 동안 경찰들은 살인이 일어날 줄 '알면서도' 이를 막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는가?

 

정태춘의 노래 '아 대한민국'의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하는 여자들은 말고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의 백골단과 함께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 있지 않나." 화성 연쇄살인사건 때부터 유영철 사건에 이르기까지. 경찰은 시민의 생명보다는 '데모진압'에, 시민의 안전보다는 정권의 안전에 더 큰 관심이 있는 것 같다. 한심한 경찰들. 그들이 '민중을 지키는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을 패는 지팡이'로 오늘도 강남 뉴코아-킴스클럽 본점을 둘러싸고 있는 동안(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감시하러) 범죄자들은 또 다른 희생자들을 노리고 있지 않는가(벌써 전직 해태 야구선수 이호성이 아녀자 넷을 때려 죽였다는 보도가 나온다). 

 

4. 대안은 없을까?

 

경찰도, 검찰도 아닌 포주 엄중호가 미진을 구하러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역설적인 상황 말고, 정말 대안은 없는 것일까? 성매매 여성들의 '생명'과 인분 맞은(맞아도 싼) 서울시장의 '체면'이 평등하게 대우받지 못하는 세상에 대안은 없을까? 이 끔찍한 세상에 대안이 없다면 정말로 우리, 살 가치가 있는 걸까? 대안이 있다고 믿고 싶다. 인간들이 평등한 조건 속에서 살고, 여성이 인간으로 대접받고, 부패한 경찰들이 사라지고, 이웃과의 담벼락을 허물어도 연쇄살인범은 커녕 소매치기 한 사람 들어오지 않을 세상에서 살고 싶은 욕심. 이런 욕심은 정당화될 수 있는 거 아닐까? 존 레논이 노래 '이매진(Imagine)'에서 말했듯이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 말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라고 외치고 싶다.

 

 

p.s: 엄중호 연기 맡은 김윤식 연기 진짜 짱이다. 김윤석이 '후달릴까봐'라는 표현을 쓸 때 타짜의 '아귀'(아귀도 똑같은 단어를 사용했다. 아시는 분 아시겠지?)가 생각나서 혼자 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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