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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어 윌 비 블러드

이영주 |2008.03.24 22:23
조회 25 |추천 0

 

 

 

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 2007)

감독 : 폴 토마스 앤더슨

 

 

 

검은 피, 검은 기도가 만나 세워진 제국

 

 

꼭 일주일이 지났다.

이 영화를 본 뒤, 너무 심장이 떨려서 미치겠다는 둥, 아직도 소름끼치는 불협화음으로 조용하기 짝이 없는 영화 내내 공포를 자아냈던 조니 그린우드의 현악기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는 둥,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드디어 접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둥, 온갖 호들갑은 다 떨어놓고도 리뷰 쓰기를 미뤄둔 채 일주일을 보냈다.

그저 엄청난 영화였다는, 3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심장이 오그라붙는 줄 알았다는, 시답잖고 추상적인 표현 외에 별 다른 말을 덧붙이기 어려웠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평소 영화 본 뒤 리뷰 쓰듯 그저 이건 좋았고 저건 나빴고, 이건 재미있었고 이건 지루했고, 이런 식으로 편하게 수다떠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간의 어떤 속성을 이용해 그 세력을 뻗쳐가는지, 그리하여 생산관계가 규정한 생산양식을 초월한 이데올로기로 굳어지는지, 논리적으로 풀어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 논리적인 글을 쓰기에 나는 한참 모자란 사람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글 쓰기를 주저할 수밖에.

일주일이 지난 뒤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빈약한 지식의 소유자이고, 여전히 논리적인 글쓰기를 할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늘 그랬듯이 감정에 한참 치우친 채로, 억지를 쓰듯 내가 이 영화에서 느꼈던 '공포'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또 수다떨듯 늘어놓겠다. 아마도 1800년대 말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와 짓기 시작한 자본주의라는 제국에 대한 염증과 분노로 얼룩진 수다가 될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한 남자다. 영화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아서 그 남자의 태생이 어떠한지 가족관계는 또 어떠한지 알려주지 않는다. 보아하니 술병을 늘 옆에 끼고 사는 걸로 봐선 알콜중독자 같고, 처음에는 금광을 찾아 힘겨운 곡괭이질을 하던 채굴꾼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그가 캘리포니아에 불어닥친 검은 황금, 즉 석유 채굴 바람을 맞고, 탁월한 예지력 때문인지 화려한 언변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도 아니면 행운이 따르는 사나이였는지는 모르나, 석유사업가로 꽤 성공한다.

영화는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한 남자가 석유사업가로 성공하며 나이들어가는 모습을 화면에 담는다. 한 남자의 일대기, 성공한 사업가의 일대기가 공포스럽다고 하면 의아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남자가 의 연쇄살인범 지영민이나 의 냉혈 킬러 안톤 쉬거처럼 이유 없이 잔인한 것도 아니다. 채굴꾼으로서 석유 채굴이 돈이 되는 장사라는 걸 알았고, 석유가 있음직한 땅을 찾아다니며 되도록 싼 값에 매입해 유정을 건설하고, 석유 운송비를 아끼기 위해 송유관을 설치하고……, 그저 사업가로서 열심히 사업을 확장시킨 것이 전부다.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 근면성실한 사업가라면 전경련이나 중소기업청 같은 데서 표창장이라도 주어야 마땅할 게다.

그러나 한 자본가의 거침없는 돌진을 지켜보기란 결코 편치 않았다. 아니,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는 대다수 가족 중심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농민들인 땅 주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어린 양아들 H.W. 플레인뷰를 앞장세운다. 자신은 가족을 중시하는 가족적인 자본가라는, 그러니 믿고 땅을 맡겨도 좋을 인간적인 사업가라는 시위인 셈이다. 그러나 양아들이 유정 폭발사고로 청력을 잃자 바로 농아학교로 보내버리는 이가 또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사람이다.

다니엘이 석유사업으로 성공한 소문이 짜하게 퍼졌는지 그의 이복동생이라고 나타난 헨리 역시 잠시 동안 그의 사업파트너가 된다. 그러나 결국 헨리의 말이 거짓임이 드러나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다니엘은 헨리의 관자놀이에 총을 발사한다.

그에게 가족은 사업을 위한 도구이다.헨리를 죽이고 다시 데려온 양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자기 방식으로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하니 다니엘은 또 금세 얼굴을 바꾸고 협박조로 말한다. "넌 단지 내 경쟁자일 뿐이야"

오로지 자본가라는 정체성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다니엘에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다니엘에게 가족이 오로지 사업의 수완이었듯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송유관 설치를 위해 반드시 매입해야 하는 땅의 주인이 자신이 믿는 제3계시교의 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자, 주저 없이 예배에 참석한 다니엘. 그의 인생 최대의 라이벌이자 걸림돌인 목사 일라이로부터 뺨따귀까지 맞아야 하는 굴욕적인 회개 의식을 가진다. 물론 의식이 끝나자마자 희미한 미소까지 머금은 채 외친다. "송유관은 내 거야!"

물론 굴욕적 회개에 대한 다니엘의 복수는 역시나 검붉은 피다. 계산기 두드려 정확한 수입 지출 나오듯 자본가답게 당한 대로 철저하고도 정확하게 갚고야 마는 다니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알콜중독 노인네가 돼서도 기어이, 자신이 일라이 앞에 무릎꿇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자백했던 것처럼 일라이에게서 "나는 거짓 선지자요, 신은 사기입니다"라는 자백을 받아내고야 마는 다니엘. 끝내 일라이에게서 석유처럼 검고 찐득거리는 피를 뽑아내고야 마는 다니엘.

 

다니엘 플레인뷰의 철저한 자본가적 마인드는 마치 산수 계산처럼 정확하다. 그것은 가족이나 종교처럼 계산과 실리 너머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존재와 가치마저도 숫자로 뽑아낼 수 있는 정확함이다. 가족이 어떻고 신이 어떻고 하는 것들보다 한치도 흔들림 없는 다니엘의 계산이, 그의 비정함이 오히려 더 순수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가족과 종교는 자본의 거침 없는 돌진 앞에서 무력하다. 아니,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다니엘 플레인뷰는 영리하게도, 가족과 종교는 원래부터 자본주의의 비정함을 포장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차린 것뿐이다.

비록 양아들이지만 자본가를 대표하는 다니엘의 아들과 종교를 대표하는 일라이의 동생은 결혼으로 가족이 된다. 자본과 종교와 완벽한 앙상블, 이것이 19세기의 끄트머리에서 자본가(다니엘 플레인뷰)와 종교(일라이 선데이)가 만나 검붉은 피를 흩뿌리며 나눈 정사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다니엘과 일라이의 후손인 자본주의는 지금까지도, 가족과 종교는 물론이고 인간과 생명의 가치마저 계산기 두드리며 전 지구적 돌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 다니엘과 일라이가 출산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가족과 종교처럼 실리 너머, 계산 너머에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란 착각에 빠져, 평소에는 이 영화를 보며 가졌던 섬뜩한 느낌, 몸서리치는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더욱 엄청나게 느껴졌다. 조금의 윤활유도 바르지 않은 채 아메리카 서부의 황량한 사막에서 벌어지는 자본과 종교, 가족의 탄생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제국의 탄생사(史)이자 현재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예고편에 다름아니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악의 화신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악의 존재도 아니다. 그저 악당이라고 욕할 수도 없는, 이런 복잡미묘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양반, 다니엘 데이 루이스밖에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긴 머리 휘날리며 말 달리던 다니엘 오빠. 비록 굵은 주름 가득한 얼굴이지만 여전히, 아니 더더욱 매력적이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했더니 에서 묵언수행하시던 오빠 역을 맡았던 폴 다노였다. 광기 어린, 탐욕스러운 목사 일라이 선데이. 어린 배우에게서 이런 에너지가 나오다니!

 

 

폴 토마스 앤더슨. 얘기만 많이 들었지 이 양반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다음 작품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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