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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더 레즈보우

이영주 |2008.04.20 02:04
조회 210 |추천 2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특징을 꼽자면, 우선 10주년을 맞아 무척 거하게 밥상이 차려졌다는 것이다. 상영관도 늘었고 당연히 상영편수도 늘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특징은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밥상을 앞에 뒀는데도 정작 젓가락질이 가는 반찬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 내가 영화 선택을 잘못해서 그런거겠지, 참 능력도 없지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수요일에 여성영상집단 움 관계자랑 잠깐 만나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올해 서울여성영화제에 대해 솔직한 심경을 밝혔더니, 그분도 동감을 표하셨다. 그리고 나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꽤 된 듯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제라면 영화제답게 신선한 시도로 바람을 일으키거나 관객들의 트렌드를 확인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같은 작품들이 펑펑 터져줘야 하는데, 올해는 왠일인지 그런 게 안 보인다. 단지 서울여성영화제 측의 준비가 미숙했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뭔가 찜찜하다. 정말 영화계의 위기인가? 모르겠다. ㅡㅡ;;

아무튼, 터지는 영화, 흥미로운 영화, 재미있는 영화가 궁했던 올해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단연 약진했던 섹션은 퀴어 레인보우였다. 흥미롭다, 재미있다고 입소문난 작품들은 퀴어 레인보우 섹션이든 걸즈 온 필름 섹션이든 대개 퀴어영화에 속했다. 이건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각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는 퀴어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 영화제 팀에서 몇명이 대략 분야를 나누었는데 퀴어는 내 분야가 아니어서 그렇기도 했고, 시간이 맞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래도 여성영화제 왔는데 퀴어영화 한편쯤은 봐둬야 하는 것 아닌가 의무감이 들어 퀴어 단편 묶음인 를 보았다.

오홋, 초단편부터 중단편까지 극영화부터 다큐까지 흑백부터 컬러까지 다양한 색깔의 퀴어영화 퍼레이드는 무척이나 경쾌했고 즐거웠다. 올해 서울여성영화제에서 퀴어영화의 약진을 눈으로 확인한 셈이랄까?

 

 오버 더 레즈보우

 

웬 멋진 남자? | What Hot Guy? 메리 톰슨   미국   2006   3'   Beta   color   코미디

Oh, My God~~!!

 

3분. 초단편 영화다. 그러나 3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은 단편영화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전날 밤 술마시고 점심 나절 술에서 깨어보니 자신의 집에 낯선 이가 와 있다. 그런데 지난 밤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낯선 이를 집에 끌어들인 경험은 없지만 필름 끊긴 경험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계로 남일 같지 않았던 영화.

지워진 필름 안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세상이 담겨 있다. 지금 떠올려도 웃음이 난다.

 

 

공원, 꽃, 그리고 첫키스 | Flowers at the Park (or First Kisses) 마리엘 마시아 스페인   2006   10'   Beta   b&w   드라마

 

두려움과 설레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이 영화 역시 단편의 미덕을 잘 살린 영화다. 채팅으로 번개를 하게 된 레즈비언 커플. 한 여자는 경험이 많아 보이고 또 다른 여자는 첫 경험인 듯하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이 여자 내숭이 장난 아니다. ㅋ) 여자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동성애자는 아닌 것 같은 모호함은 1초 상간으로 내숭과 들이댐을 오락가락하게 만든다.

사흘 동안의 내숭과 들이댐, 두려움과 설레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연애 도입의 짜릿한 긴장을 그려내기에 10분은 딱 적당한 러닝타임인 듯. ^^

 

 

서큐버스 | Succubus 앨리슨 레이드   캐나다   2006   14'   Beta   color   코미디

  레즈비언 부부의 부모되기의 욕망

 

사실 황우석 덕에 줄기세포니 뭐니 그런 얘길 들어본 무식쟁이인지라, 신문에 생명공학 관련 기사가 나면 제목조차도 제대로 읽지 않는 인간인지라(내가 이과 전공자라는 건 나 역시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야... ㅡㅡ;;) 이 영화 속 레즈비언 부부가 현대의 생명과학에 기대했던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레즈비언 부부가 왜 저렇게 핏줄에 연연해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전제에 대해 나는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한 채 이 영화를 봤다.

그러나 이 영화, 무척 재미있다. 이야기 전개가 드라마틱하고 상큼한 코미디가 기분을 좋게 만든다. 14분이란 러닝타임이 참 짜임새있게 채워져 있다.

이 영화 덕에 동성부부의 출산과 가족관계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브루클린과 조르단 | Brooklyn's Bridge to Jordan 티나 마브리   미국   2005   20'   Beta   color   드라마

 

동성애가족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오버 더 레즈보우 퀴어영화 단편묶음을 보면서 동성애에 대해 꽤 많은 생각을 해왔다고 생각했던 나의 자만을 확인해야 했다. 레즈비언 친구들을 생기고 그들과 일상을 나누며 내 안의 편견들이 많이 깨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속해 있거나 떨어져 있더라도 그 영향권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족', 여성주의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 화두인 '가족'. 그러나 내 머릿속의 동성애자들은 가족 바깥에 있는, 가족과는 무관한 존재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쩜, 동성애가족에 대해 이렇게도 생각이 없었을까?

낳아준 엄마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으면서 드러나는 동성애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을 그린 을 보며 나는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욕구에 시달려야 했다.

부르클린과 조르단은 가족으로 살았다. 조르단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젖을 떼고 옹알이를 하고 걸음마를 하고 머리 굵어져 사고치고 다니는 청소년이 될 때까지 부르클린은 부모로서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나단의 생모가 죽으면서 부르클린과 조르단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된다. 조르단의 엄마는 조나단과 부르클린을 이어주던 유일한 끈이었던 것이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일까? 반드시 혈연으로 엮여야만 가능한 집단인 것일까? 혈연은 가족구성원 간의 사랑이 만들어지는 유일한 원인인가?

물론,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혈연이 가족 구성의 유일한 조건이라면, 입양가족이나 재혼가족은 가족이 아니란 말이 된다. 가족은 관계이지 선천적으로 결정된 구조일 수 없다. 그러나 조르단은 자신의 생모가 죽자마자 함께 살아온 부르클린을 마치 벌레보듯 한다. 호모포비아, 이성애중심주의는 이처럼 몰이성적인 행동과 가치관을 낳는다.

결국 조르단이 부르클린 혼자 있는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나름 해피엔딩으로 영화는 끝이 나지만, 이성애중심 사회에서 조르단은, 부르클린은 앞으로 얼마나 거친 길을 걸어가야 할까 생각하니 막막함이 밀려온다.

 

 

지붕 위의 세상 | Top of the World   마야 케니그 이스라엘 2005 15' Beta color 드라마

 

영상 참 예쁘다... 

 

여성영화제에서밖에 만나본 적이 없지만, 그간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이스라엘 영화는 영상이 참 예쁘다. 이 영화도 그렇다. 실제인지 환상인지 플래시백인지 분간할 수 없게끔 과거와 현재가 경계선 없이 흐르는데, 감독의 의도는 잘 읽히지 않았지만 그 모습 자체가 예뻤다.

하지만 영상이 아무리 예뻐도 소통하기 어려운 영화를 보는 일은 쉽지 않다. 상징을 많이 썼나?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이야기를 끌고 간 건가? 피곤해서 이 영화 볼 때 집중력이 떨어졌나? 이럴 줄 알았으면 감독과의 대화가 있을 때 보는 건데... 후회막급이다. ㅠㅠ

 

 

가족에게 커밍아웃하는 다양한 방법 | Family Reunion 이졸드 우가도티르   아이슬란드 2006 21' 35mm color 드라마

 

유쾌한 웃음으로 풀어낸 커밍아웃 직전의 긴장 

 

동성애자 친구들의 말을 빌자면, 커밍아웃하기 가장 힘든 대상은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는 가족이란다. 가족이기에 서로에게 가지는 믿음은 기본적으로 이성애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위반(?)했을 때 따라오는 배신감은 여타 다른 관계에 비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 뉴욕에서 여자친구와 동거 중인 카타가 외할아버지의 칠순을 맞아 고향 아이슬란드로 오면서 벌어지는 커밍아웃을 둘러싼 일종의 소동극이다. 사실 가족에게 커밍아웃하는 것은 그 어떤 순간보다도 두렵고 공포스러울 수 있을 텐데, 이 영화는 외할아버지 칠순잔치를 매개로 커밍아웃 직전의 긴장을 잔치처럼 풀어낸다. 동성애에 대한 사람들의 비뚤어진 시선을 가감없이 그려내면서 유쾌한 깜짝사건으로 반전을 뽑아낸 감독의 낙관이 유쾌했던 작품.

 

 

Keep Walking | Keep Walking 배수경 한국   2008 19' HD color 드라마

 

삶은 여행, 사랑 역시 어딘지 모를 길을 따라 걸어가는 과정 

 

이른 아침 홍대 앞을 걸어가는 동성애커플의 걸음을 쫓아가는 일종의 로드무비(?). 갓 연애를 시작한 연인의 설렘과 레즈비언 커플의 불안이 길지 않은 여정에 솔직하게 담긴다. 이와 대비되는 혹은 이들의 가까운 미래같은 8년차 레즈비언 커플의 인터뷰가 중간중간 삽입됨으로써 이성애중심 사회에서 동성애커플의 불안정성을 극명히 드러낸다.

극영화이면서도 인터뷰 등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사용해 현실감이 더욱 높아진 영화. 마치 레즈비언 친구의 연애상담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추천수2
반대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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