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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 2004)

류영주 |2008.04.25 14:08
조회 194 |추천 1


 

  한국 / 스릴러 / 118분 / 감독: 변 혁

  (★★★☆☆)

 

  다소 심심했던 사랑 영화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신작 에서 변혁 감독은 작정한 듯 표변한다. 소소한 연애 감정에서 치정과 불륜으로 주목 대상이 바뀐 걸 변화랄 수도 있겠으나 첫눈에 달라진 건 로맨스의 ‘색깔’과 ‘강도’다. 살인 미스터리와 치정 로맨스가 중심을 이루는 통속적인 소재도 그러하거니와 앞뒤 가리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뚝심에도 날이 서 있다. 멀쩡한 아내 수현(엄지원)을 놔두고 재즈 가수 가희(이은주)와 천연덕스럽게 두 집 살림을 즐기고 있는 강력계 형사 반장 기훈(한석규)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다정함 뒤에 야비함을 숨긴 이 야누스적 형사는 한가로운 오후의 평화를 깨는 살인 사건의 수사를 맡게 된다.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사진관 여자 경희(성현아)를 취조하면서 기훈은 미스터리한 치정 살인극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게 되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는 꽤 공들인 ‘구조’를 통해 드라마를 꾸민다. 이 영화의 플롯 구조는 아내와 애인 사이를 오가는 기훈의 이중 생활이 사진관 살인 사건을 품고 있는 액자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관 살인 사건과 기훈의 이중 생활이라는 두 개의 이야기 단위가 두서없이 나열되는 까닭에 둘 사이의 간섭은 크지 않다. 실제와 허구를 교묘하게 섞어 놓았던 에 이어 변혁 감독은 다른 스타일로 찍힌 바깥 이야기와 안 이야기, 서로를 반사하는 거울 이미지의 인물 등 형식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다. 의 액자는 동일한 현상에 대한 상이한 입장 혹은 진실을 가리는 욕망의 속성을 보여 주기 위한 틀이다. 기훈을 둘러싼 치정의 트라이앵글은 겉보기에 평화로워 보이지만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저열한 탐욕과 유혹의 산물이다. 정작 문제는 그토록 똑똑하고 잘난 기훈의 모든 걸 깡그리 망가뜨리는 이 ‘유혹’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다는 데 있다. 스파까지 갖춘 가희의 으리으리한 옥탑방(?)과 기름진 화면으로 관객의 시선을 유인하고 싶었다면 뭔가 부족하다. 평행선을 달리는 두 이야기 단위를 매개하는 기훈의 심리를 이해하는 건 쉽지 않다. 시작부터 기훈은 이미 가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그의 감정은 시종일관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사진관 여자 경희와 명식(김진근)에게 이입돼 보여진다. 하지만 혼외 관계에 대한 공모 의식을 제외하고 기훈이 용의자들에 의해 심리적 교란 상태에 빠지는 이유를 찾기는 힘들다. 용의자들 간의 엇갈리는 진술이 강력계 형사에게 그렇게 혼란을 줄 만한 일인가. 미스터리 플롯과 멜로 플롯 사이의 커넥션을 만들기 위해 매설한 장치들이 설득하는 힘 역시 약하다. 제법 세공력을 발휘한 세트와 매끈한 촬영은 보통 이상이지만 무척 고민했음직한 상징들(둔기로 사용되는 성모상, 권력의 상징으로서의 권총에 대한 메타포)은 참신성이 떨어진다.
  탐욕과 유혹이 생기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이 야기한 ‘결과’에 주목하기 위해 는 잘못된 선택을 한다. 기훈의 교만한 자신감을 자멸로 되돌리려는 극적 반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서서히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 별안간 놀라운 진실을 폭로하는 것으로 재미를 보려는 반전 수법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대반전의 예고탄들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다. 수현과 가희가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가 잘 들리지 않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을 때, 그리고 기훈과 수현의 무난했던 관계가 갑작스럽게 위기로 치닫는 순간에 수상한 징후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반전이 닥칠 때면 이전의 모든 사건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반전의 내용이 아니라 '반전이 있다'는 사실 자체다. 적어도 반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관객에게 의 그것이 남기는 충격파는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나 처럼 이건 일순간 섬광 같은 깨침을 주기보단 분위기를 흐리는 쪽이다.
  이전까지의 전제를 무너뜨리는 극적 장치를 동원하며 는 관객의 선택권을 박탈한다. ‘선의에 의한 행동일지라도 (원)죄는 용서가 안 된다’는 게 이 영화의 주장이다. 무리다 싶은 반전도 마다하지 않는 건 이 같은 예정된 결론에 당도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죄의식과 처벌이라는 종교적인 주제를 간파하도록 만들기 위해 는 적절한 메타포를 찾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창세기 3장 6절, 살인 도구로 사용되는 성모상, 성당에서의 고해(고해를 받는 신부는 이 한 장면을 위해 아무 이유 없이 연주회 신에서 얼굴을 비친다) 장면 등이 내포한 종교적 상징성은 영화적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다. 감독의 말마따나 이 영화를 종교 영화로 부를 수 있다면 그건 ‘성서적 진실을 겸허히 수용하라’는 그 완강한 어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는 '각성을 촉구하는' 영화인 것이다. 죄의식의 심연에 대해 정의한 창세기의 예화를 '원초적인 사건'으로 상정한 의 도덕적인 시선에는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 이 영화의 진짜 문제는 그 결정론적 세계관, 진실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단호한 태도에 있다. 영화 한 편을 통해 인류사를 관통해온 종교적 진리를 설파하려는 거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는 는 전지적인 위치에서 우리를 조종하려 든다. 여기서부터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의 문제가 발생한다. 정숙하고 아름다운 아내와 섹시한 정부, 신비로운 미망인 등 남성 판타지의 전형인 고루한 여성 인물들을 배치한 것이나 모든 인물들에게 죄행에 따른 철퇴를 내리기 위해 반전을 사용한 것, 투박한 종교적 상징을 남발한 것은 모두 이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치명적인 건 예외를 허용치 않는 이 같은 태도가 변혁 감독이 즐겨 쓰는 형식적 구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이는 형식과 주제와 불화를 야기한다. 이중의 액자 구조와 캐릭터들이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 구조는 ‘한 가지 현상에 대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일방의 시선으로는 부족하며 다중적인 시점에서의 관찰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도입된 것이다. 하여 경희와 명식, 동네 양아치의 진술이 엇갈리고 기훈의 믿음이 흔들릴 때까지만 해도 이건 진실의 상대성을 입증하려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태도가 흔들리면서 영화는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만다. 한 가지 입장만으론 객관적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중 구조를 택한 영화가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종교적 진실'을 상정하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 경우의 수들을 차단하고 모든 인물들을 패잔병으로 만들어버리는 순간, 의 이중 구조는 작가적 자의식에 의한 형식적 제스처로 전락하고 만다. ‘탐욕을 부린 죄인에겐 응분의 대가가 주어진다’는 근엄한(?) 주장을 받침하기 위해 전형성을 남용하고 생뚱맞은 반전을 끌어들이는 건 옳은가? 더 본질적으로 물어보자. 죄인은 반드시 처벌받는가? 선의의 사랑도 죄가 되는가? 감독은 “그렇다”고 말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시선으로 만사를 재단하는 동정 없는 세상에서 도덕률과 법에 저촉되는 사랑은 모두 죄란 말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필시 완고한 도덕론자거나 교조적 종교인일 것이다.
  는 태고적부터 면면히 내려온, 그래서 이미 결론이 나 있는 명명백백한 기독교적 교리를 다시 한번 되새김질한다. 이 지극히 결정론적이며 수구적이기까지 한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이런 심리적 저항감은 최후의 참극을 보고 있는 동안의 불편함, 즉 인간은 본디 사악하고 졸렬하기 짝이 없는 죄인임을 영화가 아프게 각성시키기 때문에 생기는 반감이 아니다. 되려 신기한 건 20여 분 동안 지속되면서 충분히 ‘감각적인’ 끔찍함을 느끼게 하는 트렁크 신의 신랄한 비주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경고가 뜨끔하게 폐부를 찌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관객을 유인하기 위한 장르적인 미끼, ‘웰메이드’에 값하는 완성도, 반전을 통한 쇼크 효과, 자극적인 결말, 종교적인 메시지를 모두 관철시키려는 야심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결정론적 인식론을 전파하려는 건 헛된 욕심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용서가 되지 않는 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기훈처럼 가증과 방자함에 들뜬 인간에게나 어울리는 처벌이다. 결론적으로 는 창세기적 교훈담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하여 ‘주홍글씨’라는 제목에 담긴 속뜻이 드러난 뒤의 허무함은 더욱 커진다.

추천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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