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랜만에 내려와서 형이랑 수다를 떨다가 김규항씨가 쓰고 있는 예수전이 언제쯤 책으로 나올까하는 이야기를 했다. B급 좌파라는 그의 말처럼 세상은 어쩌면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이분법적인 계급의 틀로 나뉘어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너를 구분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다 자신 안에서 하나가 되게 만들었음에도 또 다시 몇 개의 이념으로 나뉘어져 서로를 잡아먹으려 눈을 부라린다. 형은 나와 김규항이 닮았다고 한다. 그런데 난 사회주의의 실현에 대해서 솔직히 현재는 자신이 없다. 완벽한 사회주의의 얼개라는 것도 사실 어떤 모습인지 자세히 청사진을 그려낼 엄두도 나지 않는다. 세상은 완전한 선과 완전한 악으로 규정지을 수 없을만큼 그렇게 모호하다. 인간이 선과 악의 양면성을 동시에 함유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완전한 절대악으로 규정짓고 몰아치려는 사람은 사실 조금 피하게 된다. 허나 평등, 사랑, 평화와 같은 가치들에 희망을 걸고 가슴이 설레는 나를 보면 내 안의 왼쪽 심장이 오른쪽 심장보다 강하게 뛰는 듯한 느낌이 든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라는 누구의 말이 생각날 만큼 현재 시국은 그때처럼 혼란스럽다. 그런데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는 것이 아닌 죽음의 수입을 걷어 치워야하는 판국이다. 본질적으로 정치도 소통의 문제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 정도는 그 소통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가라는 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과 정부와의 관계도 그런 소통의 관계가 필요하다. 싫으면 먹지말라는 식의 비상식적이다 못해 몰상식한 류의 말을 내뱉는 대통령을 보는 국민의 가슴은 애가 탄다. 어떤 대화도 없이 혼자서 일을 진행시키는 독재와 같은 일의 처리도 염증이 난다.
그런데 사실 난 국가주의나 감성적인 애국주의를 혐오하는 사람이다. 파시즘 역시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베이징올림픽을 맞아 빨간 옷을 무더기로 입으며 성화봉송을 자축 하는 것을 보고 난 2002년 월드컵에서 빨간 옷이 거리를 메운 그 한국의 진풍경을 기억했다. 월드컵 경기에서의 상대국들은 모두 적이요 한국인만이 하나였다. 예수님은 그런 편가르기는 없다고 하셨다. 이라크 파병을 비롯한 여러가지 논란이 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너무 잠잠하다. 이렇게 여론이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너무 감사하지만 한편으로 광우병 문제만 이슈가 되는 것이 내가 죽을지 모른다는 그런 개인주의의 발로에서 나온 것 뿐이라면 이는 너무 아쉽다. 평등, 평화라는 가치보다 현재 내 눈앞에 보이는 돈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남들보다 잘 살기 위해서 이명박을 뽑았다. 있는 사람이 더 나누어서 못 가진 사람도 잘 살 수 있기를 바란게 아니라 내가 더 가진 사람의 자리에 올라가기를 바랬다. 욕망이 사회를 변화시킨 원동력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nimby와 같은 이기주의의 발로 였다면 사회는 어려워진다.
완전한 선과 완전한 악은 없다. 선과 악은 안타깝지만 항상 혼재해 있다. 허나 완전한 선에 가까운 모습이 존재하는 시간이 있다. 그것은 짧지만 폭팔적인 그런 순간이다. 그 순간이 삶을 변화시킨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의 순간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계속 점차적으로 증가하여 시간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사회는 어떻게 변할까? 사회는 보다 좋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통증을 느끼면서 그렇게 변화해왔다. 국민들은 더 몰아칠 것이다. 그리고 몰아쳐야 한다. 대화를 위해서, 그리고 소통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