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스물셋의 미팅 이야기

송지현 |2008.06.04 04:18
조회 396 |추천 0

"쏭지 너 혹시 지금 만나는 남자 있어?"

 

처세술서, 경영학적 마인드, 여자친구들과 손잡고 화장실가기,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류의 남녀 이분법, 소주맛, 엘리트 주의... 그냥 미운 것들이 있다. 그 자체로 나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데도, 그들을 접하게 되면 온몸에서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듯 이유를 채 생각해내기도 전에 몸서리 치게 싫은 것들이 있다. 소개팅도 그 중에 하나였다. 사랑에 있어서 가학적인 성향을 가진 나는 그런식의 만남을 지독하게도 싫어한다.

"아니 없어, 근데 나 이제 곧 교환 나가잖아. 절대 안 할 거야!"

 

친구가 대답했다.

" 정말? 같이 미팅나가자그럴라그랬는데... 무리야?ㅋ"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 오바쟁이가 또 너무 앞서나간 것이었다. 나는 언제 딱 잡아뗐냐는 듯이 꼬리를 내리고 "아 미팅? 난 또 소개팅이라고... 미팅 정도야..."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대학교 2학년 9월 어느날, 우리학교 체대생들과의 미팅이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미팅이었다. 대학 입학 전후, 꼭 어른들 하시는 말씀이 "대학 가면 미팅도 많이 해보고..."가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팅을 꼭 많이 해봐야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거의 유일한 남녀 사교의 장이었던 그 시절의 미팅과 짝을 지우는 일조차 사라지고 그저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놀기 정도의 의미만을 지닌 요즘 세대의 미팅에 다소 간의 의미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그날의 미팅도 사실 신입생들이 으레 하는 미팅답지는 않았다. 나보다 세살, 한살 많은 언니들과 함께 했던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상대방이 체대생이라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고, 우리 셋 중 나를 포함한 둘이 술을 못 마시는 것이 마지막 이유였다. 그렇게 뭔가 다른 한 번의 미팅을 경험한 나는 '통상적인 미팅'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스무 살 끼리가 아니면 하지 못하는 그런 파릇파릇한 대학교 1학년들의 미팅...

 

소개팅이라면 상대방이 어느 집 아드님이든, 무슨 시험 합격자든, 돈 많은 벤처 사장님이든, 슈퍼 초 꽃미남 급이든 간에 일단 'no'부터 외쳐놓고 둘러댈 핑계를 생각할 정도로 거부 반응을 보이지만, 이 나이를 먹고도 미팅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이유는 미팅은 '남녀 간의 만남'이라는 목적 실현의 기능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부담감도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뒤돌아 설 수 있는 만남, 쿨하지 아니한가 ㅋ

 

우리학교 선배라는 거, S전자에 다닌 다는 거... 내가 가지고 있던 정보의 전부였다. 직장인이라... '사랑의 스튜디오'나 '좋은 사람 소개시켜줘'를 연상시켰다. 좋소를 시청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나에겐 '사랑의 스튜디오'적인 이미지가 더욱 강하게 와닿았다. 열여섯 즈음의 시각에서 보았던 '사랑의 스튜디오'... 직장인, 직장인, 직장인... 확- 멀어지는 느낌이랄까. 내 나이, 스물셋...의 절반 이상을 넘겼구나. 정말 많이도 먹었다. 이제 직장인하고 미팅을 하는 나이라니, 정말이지 곧 '좋소'에 나오는 여자들같이 시집 갈 준비라도 해야하나 싶었다.

별 거 아니겠지. 직장인. 그래 얼마나 많아 내 주변에... 현민오빠 정수오빠 현웅오빠 정욱오빠 진희오빠 학수오빠 승찬오빠 그리고 갓, 갓 직장인이 된 상훈오빠까지... 그래, 직장인 까짓 그렇게 멀지 않겠지. 그냥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같겠지... 그렇게 수 없이 되뇌이면서도 마음 한 켠이 이상했다. 그들이 직장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직장인과 미팅을 할만큼 늙어버린 우리들 때문에...

 

나는 적극적으로 주선자를 대신해 남자들 중 한 사람과 연락을 취하며 스케줄 조정을 담당했고, 눈 씻고 찾아봐도 흔치 않은 우리 과 동기들 중 솔로를 아주 능동적인 자세로 찾아 헤매기 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우리 셋, 공교롭게도 나를 제외한 둘은 4학년 1학기 까지를 스트레이트로 마쳐버린 친구들이었다. 사회 진입을 눈 앞에 둔, 실제로 그들 중 하나는 벌써 회사라는 곳을 다니고 있는...

 

양복을 입은 세 명의 아저씨를 상상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의 나이는 비교적 젊었고 모두 캐쥬얼한 차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직장인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직장인은 없었다. 내가 삼십분이나 지각을 해버린 것을 포함하여 우리 여섯 명은 일곱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때가 때이니 만큼, 나는 진로 상담 하기에 바뻤고 그건 다른 다섯 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다루었다. 우리들 스스로도 이건 미팅이 아니라 너무 학회 분위기라며 웃었지만, 맞다. 우리는 게임하고 술 마시고 짝짓기를 하기에는 익숙치 않은 나이임에 틀림 없다.

 

초면인 사람들과, 그리고 그런 생각을 나눌 정도로 친하지 않은 친구들과 함께였는데도 섹/스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등장했고, 누구도 그 단어에 크게 긴장하거나 심히 불편해하지 않을 정도로, 아니 그 단어의 등장이 당연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마치 섹/스 역시나 우리가 나누었던 진로 문제나 사회적 이슈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우리 나이에 밀접해 있는 소재인 것처럼 말이다.

 

몸이 피로하고 졸음이 올 때면 나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다. '집에 가고 싶어'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표출하면서 일곱 살 먹은 어린 애 마냥 짜증 섞인 잠투정을 동반한 냉소를 보이는 나는 그 날도 예외가 없었다. 집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나갔는데도 뭐가 그렇게 피곤한지 네 시간을 버티고 난 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런 나의 외침와 달리 아무도 그럴 생각이 없는 탓에 그 상태로 세 시간을 더 버텼다.

나이가 들을만큼 들었음은 단지 내가 직장인 뻘인 사람들과 미팅을 하고 있는 사실이나 미팅 자리에서도 시사나 성에 관한 문제를 논한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맥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도 피로를 호소하는 나의 바닥난 체력에서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나운서 삘이 나는 아릿답고 도도한 신방과 여학생 세 명을 기대했을 지도, 신입생들의 그것처럼 게임하고 술 먹고 즐기고 누구 한 명 쯤은 뻗어서 집에 돌려보내는 미팅을 기대했을 지도, 어쩌면 반대로 알만큼 아는 언니들과 진득한 스킨십이 오가는 어른들만의 미팅을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이 기대했던 바가 이런 것들이라면 그 어느 것도 충족시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대로 만족이었다.

적절히 어색하고 예의 바른 관계는 내가 어떤 생각을 이야기하든 직접적인 반박 없이 그것을 그저 들어주게 하였고, 1회성이 되어도 부담 없을 관계는 내가 어떤 태도를 보이고 어떤 행동을 해도 부담이 없게끔 나를 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남자가 아니라 인생의 선배들을 만나 나의 생각에 조금이나마 발전을 이끌어 낸 것이 좋았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나서 일곱 시간 이상으로 끝 없이 웃고 울고 수다를 떨고픈 친구들과의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은 유일하고도 커다란 아쉬움이다. 그래 사실은 너희들과의 만남이 좋았고, 우리들 끼리만이었다면 평생 나누지 않았을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어 그게 가장 좋았다.

 

사회로 향하는 마지막 단계에 던져져 있는 우리들, 스물 서넛의 여자들은 이렇게 나이 먹고, 이렇게 철이 들고, 이렇게 늙어 간다. 아직은 아름다울 수 있는 시절이라 자위하면서-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