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던 볼로도스이지만, 16세 때인 1987년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한 레코딩을 듣고 영감을 받기 전까지는 전혀 피아노를 전공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작 그가 피아니스트가 되가를 원했을 때 당황스럽게도 레니그라드 콘서바토리 피아노과는 볼로도스의 피아노과의 입학을 거부했었다. 그 후 그는 레닌그라드 콘서바토리는 자신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모스크바에 와서 콘서바토리의 갈리나 에구이자로바 교수의 학생이 된다. "그녀는 단지 피아노 선생으로서뿐만 아니라 제자의 미래를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위대한 음악가였다." 볼로도스는 말한다.
그는 라흐마니노프, 코르토, 기제킹과 슈나벨의 레코딩을 열심히 들었고, 러시아의 피아니슴 계보인 사무엘 파인베르그,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마리아 유디나의 레코딩과 친해졌다. 에구이자로바의 지도아래 이 음반들은 그의 든든한 음악적 동료들이 된 것이다.
21세이던 1993년 볼로도스는 러시아를 떠나 1년간 파리 콘서바토리에서 자크 루비에르를 사사했다. 그후 마드리드로 가서 에구ㅡ이자로바가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쿤 레이나 소피아 음악 고급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러시아 피아니스트 드미트리 바슈키로프에게서도 사사를 받는다. 마드리드가 마음에 든 볼로도스는 외딴 집에서 '정정과 고독'속에서 그의 음악 작업을 심화시켜 갔다.
23세 때인 195년 볼로도스는 소니 클래시컬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고, 1962년부터 호로비츠의 레코딩을 담당했던 프로듀서 노마스 프로스트가 그를 테스트하게 된다. 이 첫 만남에서 볼로도스는 호로비츠의 1968년 레코딩 '카르멘 변주곡'을 암보로 연주했다. 프로스트는 극도로 뛰어난 테크닉, 자연스러운 표현이 호로비츠와 비슷한 점 뿐만 아니라 볼로도스만의 개성에도 감명을 받았다. 비슷한 기질의 아니스트였지만, 호로비츠의 사운드가 아닌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사운드를 볼로도스는 갖고 있었다.
독일의 주드-도이치 차이퉁은 그의 첫번째 앨범인 피아노 편곡집의 독일 음반 평론가 상 수상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음악인들도 클래식 음악 팬들도 노랐다. 금세기 동안 우리는 어떤 피아노의 명인도 이런 비르투오조적 연주를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리스트-치프라- 호로비츠 그리고 이젠 아르카디 볼로도스이다. 이 25세의 러시아 피아니스트는 그의 첫번째 CD로 이 상을 수상했다.'
"음악에는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우수꽝스러운 것이다." 라고 말하는 볼로도스는 콩쿠르를 경멸한다. 하지만, 프로스토가 말한 것 처럼 그는 상상력, 색채, 열정, 테그닉의 모든 것을 갖추고 그의 피아니슴을 피어나가고 있기게 그는 음악계에서 승자라고 말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