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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감기약

최연주 |2008.07.19 15:37
조회 106 |추천 0


 

그런 때가 있었다. 사랑 하나면 무엇이든 되던 때가 있었다. 나의 스무살이 그러했다. 사랑, 그것은 마치 종합 감기약 같은 것이었다. 기침 감기든, 열 감기든 혹은 몸살 감기든 종류에 상관없이 한 알이면 되었다. 때로는 종합 감기약을 넘어 만병통치약이 되기도 하였다. 약은 마치 몸 속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독소를 차츰 희미한 색으로 바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지독한 약에 중독되어 버렸다.

 

그때로부터 세 걸음 멀어졌고, 나는 감기약 없이 몇 번의 감기를 앓았다. 그러는 동안 사랑은 걷잡을 수 없이 퇴색되어 만병통치약도 종합 감기약도 아닌 비아그라가 되어 있었다. 사랑은 필요할 때 사랑이었다. 마음을 열기도 전에 닫는 법을 숙지해야 하고, 많이 기대하지 말라는 충고를 마음에 각인시키는 것 또한 필수다. 지금 나의 그대는 언제 어느 때고 다른 누구의 그대가 될 수 있으며, 그대는 내가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독립된 개체이다. 나 또한 그러해야 한다. 그대가 아니어도 잘 살 수 있음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잘 살 수 없다 하더라도 붙잡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는 처사로 여겨진다. 그저 사랑이란 더 큰 행복 창출을 목표로 둘의 독립 개체가 맺는 일종의 산업적 혹은 상업적 동업계약이 되었다. 마치 오르가즘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먹는 비아그라처럼. 혹은 아주 통속적인 비타민제와 같이 사랑은 있으면 더 좋은 것 쯤이 되어버렸다.

 

그 영원할 것 같던 사랑마저 부질없게 변모시킨 시간은 내 머리 속에 엉성한 조직으로 상념을 수북히 채워 놓았다. 머리 속에 얽히고 설킨 생각들때문에 불규칙하게 채워진 쓰레기통 안을 들여다 보는 것 마저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바깥 공기도 쐴 겸, 아직 반도 다 차지 않은 쓰레기통을 비우러 나갔다. 요 앞으로 쓰레기를 버리러 가면서도 나는 수시로 불어대는 바람에 현관문이 닫힐까봐 열쇠를 꼭 쥐고 문밖을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곳의 문은 호텔처럼 닫히면 바로 잠기기 때문에, 열쇠를 깜빡하고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문이 잠기면 낭패를 보기 쉽상이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 졌을 이러한 도구가 문득 싸늘하게 느껴졌을 때, 나는 잠시 문에 머리를 기대고 사랑마저 편리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변하게 한 시간을 탓 해보았다.

 

비타민으로는 부족했는지 나는 호되게 여름감기에 걸렸다. 환절기를 별 탈없이 지나 한동안 잊고 지내던 종합 감기약이 떠올랐다. 사실 종합감기약은 대부분이 안정제 성분이라 한다. 감기는 밝혀진 것 외에도 그 바이러스의 종류가 너무 많아, 각기 다른 바이러스를 진단하고 그에 알맞은 치료약을 개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종합 감기약이란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기능보다 안정을 유도하여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약의 주된 기능이라 한다. 몸이 노근해져 있는 틈 새로, 한때 중독되 살았던 그 약의 향수가 짙게 퍼져왔다. 나를 늘 행복한 온도로 유지시켜 주려 애쓰던 그가 많이 그리웠다. 그리고 나는 바랬다. 내게 사랑은 언제까지나 종합 감기약이기를. 비록 그것이 신경을 무디게 만들어 오르가즘을 방해할 지라도, 변하지 않기를. 더 많은 시간이 지나도 사랑은 내게 종합 감기약으로 남아주기를 기도했다. 그것이 내 생에 몇 번이고 다시 찾아올 감기로부터 나를 온전히 지켜 나갈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랬다.

 

 

 

- Written by M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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