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한다고 가르친다.
그분의 능력은 다른 세계(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도덕적 능력이 필요한 연역한 사람들에게 임한
성령님의 능력이요, 은혜이다.
진짜 성령 VS 가짜 성령
“성령님은 ‘언제나’ 다른 수단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직접 일하신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소경을 고치실 때 침을 사용하셨듯이 성령님도 때에 따라서는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신자에게 복을 주기 위해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실 수 잇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무지와 불신앙을 감안한 임시방편용 수단일 뿐이다. 하나님의 영이 책이나 노래, 설교, 선행, 그리고 자연의 위엄과 신비를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시지 않으시면 이 모든것들은 허사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많은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예배는 참으로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는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능력의 부재(absence) 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다. 심지어 겉보기에 미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로 완벽하다.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화려한 강단 장식, 상징성이 풍부한 예복과 탁원한 음향시설 이건 것들이 모두 어우러져 예배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거기에는 결정적으로 초자연적인 영적 감동이 없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위로부터의 능력을 알지도 못하고 사모하지도 않는다. 인간적인 정교안 장치들과 제법 그럴듯한 흥분을 조장해내는 성공 최면술이 성령의 감동을 대체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가짜 성령이 진짜 성령의 자리를 꿰찬 공백의 냉랭한 파급효과를 처참하게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비극이다.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 짓는 기독교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더더욱 비극이다.
성취하시는 능력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느낄 수 있는 막연한 공허감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셩령님의 부재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실체가 없고 그림자만 남았다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려는 사람은 교회 안으로 들어와 웬지 불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는다. 그의 마음은 꿈을 꾸듯이 멍한 상태에서 무감각해진다. 설교 말씀이 선포되지만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자기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지도 못한다. 목사의 축도로 예배가 끝날 때쯤 ‘어디에 가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까?’ 라는 생가이 그의 머리를 스친다. 예배는 그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예배 시간에 그는 어떤한 영적 능력이나 성령님의 임재도 느끼지 못한다. 설교자의 메시지나 찬송가의 가사에 담긴 내용들이 그의 마음에 전혀 와 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전혀 신령한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능력’ 이라는 말뜻은 ‘어떤 일을 해낼수 있는 힘’ 이다.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놀라운 일은 교회와 신자들의 마음속 에서 벌어진다. 성령님은 영적인 것들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드신다. 성령님의 능력은 마치 창으로 찌르듯 그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휘발성 물질이 공기중에 퍼지듯이 그것은 인간의 마음 구석구석으로 퍼져서 소기의 목적을 성취해낸다.
이런 작용은 우리의 '지성' 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성령님의 능력은 비현실적인 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지만 이제껏 영혼에 감추어져온 것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렬히 느낄 때 우리는 흔히 성령님의 능력을 가장 먼저 체험하게 된다. 그분이 진짜 인격체로 느끼지며, 아주 친밀하고 가까운 분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될 때 다른 모든 영적인 일들이 마음속에서 분명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은혜, 죄사함 그리고 성결의 영 같은 것들이 마치 손에 잡힐 듯 분명히 느껴진다. 이전에는 기도가 무의미하다고 느껴졌지만, 이제는 옆에 계신 분과 나누는 달콤한 대화처럼 느껴진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이 영혼을 가득 채운다. 우리가 천국에 더 가까이 와 있다는 느낌이 들고, 땅과 세상은 마치 그 그림자처럼 느껴진다.
땅과 세상의 실재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순간적으로 머물렀다가 이내 사라지고 말 것임을 분명히 느낀다. 내세가 좀 더 뚜렷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다. 이런 새로운 깨달음은 우리의 삶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그리고 그 영향은 영구적이다. 그래프의 선이 오르락내리락 하듯이 신앙생활에 약간의 기복이야 있겠지만 근본적인 방향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능력으로 변화된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가? 이런 아름다운 삶과 너무 대조되지 않는가?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구하라
지금 하나님의 교회에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성령님의 능력이다. 더 많은 교육, 더 탄탄한 조직, 더욱 세련된 방법들, 그리고 예배당의 화려한 시설들과 더 비싼 장비들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환자가 죽은 다음에 가져온 인공 호흡기와 같다. 환자가 이미 죽은 상태라면 아무리 좋은 인공호흡기로도 그 사람에게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어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다” (요 6:63)라고 말씀하셨다. 사후약방문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지만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시 62:11).
교회들이 소위 ‘연합 전선’을 펴서 자기들의 힘을 과히사며 세상적으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한다면 크게 착각 하는 것이다. 공동묘지의 묘비들이 반듯하게 열을 맞추어 ‘연합전선’을 펴는것 같아 보여도, 세상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날 때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무력하게 서 있는 거처럼,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조직의 연합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이다.
내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종교 활동의 일시 정지를 선안하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기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할 것을 제안한다.
지금의 복음적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육신적인가! 어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전혀 경건하지 않다. 우리의 종교적 취향은 완전히 타락해버렸다. 돈으로 예배당을 도배하고, 그 안에서 연예오락같이 떠들썩한 공연을 벌인다고 해도 거기에 성령님의 능력은 없다.
이 시대야말로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영적 능력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침묵과, 자기반성의 기간을 선포하고, 각자의 마음을 살피고, 영적 능력을 받기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큰 영적 유익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위로부터 능력이 임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문제가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거기에 따른 처방을 내려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이 없는 기독교의 멍하고 실재하지 않는 것 같은 이 상태를 고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을 보여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과, 가슴 떨리는 신비를 우리에게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오직 성령님의 능력의 내적 작용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