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배가 모든 것이 되는 교회를 만들라.
1)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이 빠지기 쉬운 오류가 예배보다는 봉사와 교제를 우선으로 하는 교회를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는 많은 봉사나 교제를 나눈다. 하지만 이러한 봉사나 교제가 세상의 봉사활동이나 사교클럽과 다른 하나의 이유가 바로 예배인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자 하나님을 위한 처소이다. 흔히 잘못 생각하기를 교회가 모든 성도를 위한 장소로 여기고는 하는데, 이것은 교회를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축복 때문에 모든 성도를 위한 교회로 생각 되어지는 것 같다.
2) 사실 교회에서는 예배보다 봉사나 교제의 시간이 더 많은것이 사실이다. 또, 당연히 예배보다 봉사와 교제의 시간이 더 많이 할당 되야만 한다, 어찌보면 말 하기의 차인 것 같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분명한 교회의 존재이유에 대한 교인들의 명확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이런말을 하는 이유는 많은 교회들이 봉사와 교제에 치중한 나머지 예배와 찬양을 2순위에 밀어 두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2. 기도하는 교회를 만들라.
1)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다. 왜 하나님은 하늘곳간의 차고 넘치는 보화를 두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소량의 양식만을 내려 주실까? 출애굽의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맛나를 내려주실 때에도 안식일 전에 만 이틀치의 양식을 주시고 그 이상 모아 두었을 때에는 먹지못하게 상하게 하셨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매일매일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의지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이를 명확히 알수 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로 부터 매일 받는 필요한 부분의 물질에 만족하지 않았다. 탕자의 아비는 부자였으므로 탕자가 매일 받는 물질은 부족함이 없는 차고 넘치는 것 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필요한 것이 생길 때 곳간의 보화는 언제라도 그것을 채워줄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어느날 탕자는 하루하루 받는 자신의 분깃을 한번에 요구하게된다. 이 사건을 보다 더 깊게 들여다 보면 탕자의 욕망은 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하고 싶은 자유의 욕구였다.
결국 탕자는 자신의 요구대로 그것을 받게되고 먼 이방 땅에 가서 모든것을 나쁜 친구들과 탕진하게 되고 돼지 먹이를 먹는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평범한 인간의 삶이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날 그날 필요를 채워 주시고 우리에게 매일 간구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2) 집을 떠난 탕자처럼 우리 믿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 이상의 과도한 축복을 받게되어 부족함이 없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집을더난 탕자가 만난것은 자신을 속이는 거짓 친구들과 죄악분이었다. 그것은 탕자의 재산을 유익하게 사용하여 이익을 주기는 커녕, 탕자를 타락과 몰락으로 이끌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떠난 크리스쳔에게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닥치게 마련이다.
3) 그러므로 쉬지않는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의 표현이며,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차고 넘치게 받을수 있는 통로이다.
3. 크리스찬을 흉내내는 성도가 아니라 체질을 크리스찬으로 바꾸는 성도로 교육하라.
1) 미인대회를 보면 누가누군지 구분이 안갈 때가 있다. 성형으로 인해 미인의 이목구비가 다 비슷해 졌기 때문이다. 왜, 모든 이들이 미인대회에 참여하면서 비슷하게 외모를 성형할까? 낮은 코에 쌍커플 없는 네모난 얼굴의 미인은 없는 것 일까?당연히 없다이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외모의 부족한 부분을 수술로 미스코리아 답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쳔들을 바라보면 각 개인들이 참으로 다양한 인격으로 존재한다. 기도하는 방법이나, 봉사할때의 획일성등을 볼때는 오랜시간의 교회생활로 형식적인 면에서 자연스레 교인다운 태도가 몸에서 배어 나온다. 하지만 개인의 인격이란 수십년을 신앙생활을 하고서도 천차만별로 차이가 난다. 헌신과 봉사와 사랑과 열정, 겸손, 성실함, 진실함, 배려, 예의바름등이 드러나 있는 성도가 있는 한편
2) 어떤 이들은 수십년을 교회에 다니고도 이기주의와 시기, 무책임과 위선, 교만함과 무례, 게으름과 미움등의 감정이 자신의 인격으로 정형화되있는 성도들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많다고 말하는편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성도들은 세상에 대하여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세상에 나가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향하여 화살을 당기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교인이 공장에서 찍어낸 로봇처럼 획일화 되어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미인이 얼굴을 미스코리아다운 외모로 만들 듯 우리성도들도 우리의 마음에 예수의 커다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그것을 단지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완전히 체질화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3) 한국인이 김치를 못먹으면 해외에서 병이 나듯이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접했을때 몸에 알러지반응이 일어나듯이, 커다란 덩치의 서양여인이 한복을 입었을때 어색함이 드러나듯이 우리 크리스천은 예수의 성품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죄악과 시기, 무절제와 게으름, 교만, 광포, 무례, 인색함, 위선, 이기심등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켜야만 된다.
그것을 성도들에게 체질화 시키는 것이 교회 교육인것이다.
4. 성도들의 헌신을 당당히 요구할수 있는 교회를 만들라
1) 위의 말은 자칫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성도들의 헌신을 당당히 요구하라" 이말은 그야말로 성도들을 들볶아 교회의 필요한 것을 채우라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위의 문장을 좀더 주의깊게 분석하면 "당당하게" 라는 말을 볼수 있다. 남에게 당당하려면 자신이 그 이상이 되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헌신 없이는 교회가 절대 성장할 수 없으며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힘들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세워졌고, 크리스쳔의 헌신으로 성장한다.
2) 우선 성도들에게 요구하기 위해서는 담임 교역자가 성도들에 앞서 그 이상의 희생과 헌신을 자청해야만한다는 것이다. 주들의 모임에서 대장쥐가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를 묻는다면 이는 어떠한 쥐에게도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쥐들이 만류를 하더라도 대장 쥐가 먼저 자청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다면 그 파급효과는 나중에 모든 쥐가 방울을 다는것에서 그칠뿐만이 아니라 고양이에게 덤벼들어 집 밖으로 완전히 고양이를 물리쳐 버릴수도 있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3) 두번째 성도들에게 요구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성도에게 요구하는 헌신 이상의 것으로 성도들을 위해 어떤 것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교회에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상당히 애메한 말 이어서, 축복이 무슨형태로 왔는지 증명하기도 힘들뿐더러 자칫 하다가는 형이상학적인 말장난으로 끝날수가 있다.
상당히 모순적인 것은 대부분의 많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형이하학적인 각종 헌금과 십일조등의 물질적인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나눠주는 것은 축복과 말씀이라는 매우 애매하고도 형이상학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받지못하는것의 책임은 교회가 아니라 성도들에게 전적으로 돌리고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성도들에게 사랑과 헌신과 진실한 믿음을 강조하지만 그 사랑이나 헌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는 역시 물질로 표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성도들에게 교회가 주는 것은 그냥 축복이다. 강단에서 그냥 말로, 권능으로 축복하고 축복을 주었다 말하면 그것으로 끝이다.......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 것을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단지, 교회를 건축한 구성원들이 이제가지의 관행대로 행하던 모든일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갖자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란 물건을 생산하여 이윤을 내는 집단과는 차이가 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볼때 항상 물질이 모자라며 사회에서 생산적 활동에 전혀 기여를 못하는 단체인 것이다. 이런 집단에서는 성도들의 물질적 헌신이 절대적이며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나눠줄것 또한 무형의 축복밖에 없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단지, 지금의 대형화되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많은 헌신을 요구하면서도 실제로 주체들은 무형의 축복만을 교회를 부풀리는 도구로 남발하는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성도들 가정의 가장큰 슬픔인 장례식 마져도 참석하지 않는 목회자가 너무 쉽게 축복을 무책임하게 입으로만 남발하는 것을 우려해 하는 말이다. 다음은 어느 성도와 목회자의 대화의 일례이다.
목사 / (기도를 해주며)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신장염으로부터 치료해 주시옵소서,~ 아멘~!!!
성도 / 아! 목사님 감사한데요... 제가 요즘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는데...깜박잊고 말씀 안드렸는데..그것도 좀 기도해 주세요......,
목사 / (뒤에 줄 선 다른 사람을 보고...귀찮아하며) 아~ 그거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그것까지 다 기도가 된거예요~ 자! 다음 분~
위의 예는 직접 목격한 일례로 그 사람이 후에 피부병이 치료가 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나. 위의 목회자는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치료가 되고 안되고를 떠나 죄인과 병든자를 긍휼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인 것이다.
사실 믿음에 관계없이 신유기도를 받는 100명의 교인중에 몇이나 치료를 받을까? 단지 통계로써의 자료로 말이다.
중요한것은 신유기도를 하는 목사의 능력이 아니라 마음 자세인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 목사님은 자신이 기도를 하면서도 치료에 대한 기대를 별로 하지 않은것 같다. 단지 직업인으로서 틀에 밖힌 멘트를 날린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것은 무슨일을 행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성도들에게 당연한 헌신을 당당히 요구할수 있다.
5. 성도들의 도덕적 상태를 야경꾼처럼 감시하라.
1) 이것은 소구룹의 구역 모임이나 셀조직의 활동을 강조한 얘기다. 성도들간의 상호 감시는 타 성도의 인격적 도덕적 타락을 방지하는 역할을 해야하며, 혹 잘못된 길로 빠지는 교우를 목회자를 중심으로 각 구역장이나 셀리더들이 바로 잡아줘야하는 의무를 지닌다는 얘기다.
교회 내에서의 개인적 타락이 사소한것으로 보일수 있으나 이것을 조기에 바로잡지 못하면 그 파장이 다른 성도에게 까지 퍼질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잘못을 지적해내라는 의미가 아니라 형제의 그릇된 길을 보고도 침묵하는 현 구역 조직의 나태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타인의 결점을 건드리는 것이 상처를 줄수 있는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쉬쉬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것은 결점을 건드려 상처를 주라는 얘기도 아니요, 잘못된 길로 행하는 성도를 교회에서 내어 쫓으란 얘기도 아니다. 타락한 교우를 보고 진심으로 애통해 할줄 아는 성도라면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눈물로 회개시킬수 있는 설득력이 출분히 있을 것이다. 단지 타인의 결점을 미운 마음으로 건드리지는 말아야겠다.
2) 한 소수의 도덕적 타락을 간과할 때는 전체교회의 도덕적 타락을 야기할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커다란 항아리에 담긴 맑은 생수에 자그마한 참새 똥이 떨어졌다고 치자. 참새의 배설물은 그 많은 물에 그야 말로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느껴진다. 참새의 배설물은 곧 희석되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되고 항아리의 생수는 맑은 채 그대로이다. 즉, 눈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물은 예전과 같이 식수로 마실수 있는것은 아니다. 사실을 아는 사람은 누구라도 아까운 생수를 그대로 전부 동이째 하수구에 쏟아버릴 것이다.
이와같이 내가 아는 모 교회에 금전적으로 또 이성간의 부적절한 문제로 자그마한 스캔들이 생겼다. 이 사건은 쉬쉬하는 분위기에 이내 덮여졌지만 그것을 아는 모든 교우들 사이에 불신이 싹트고 심지어는 모방된 사건이 수시로 생기게 되었다. 한 부분에서의 영적 타락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교회는 한참이 지난 후에도 사기와 타락으로 그 물이 흐려져 흐린 분위기가 교회의 기운을 지배하게 이르렀다.
목사님과 직분자들은 특히 장로로 세워진 분들은 이런 부분에 막대한 책임감을 지녀야겠다. 장로는 결코 돈 대는 사람이 아니다.
6. 아이들과 청소년 교육에 전폭적인 투자를 하는 교회를 만들라.
1) 성북구에 위치한 어느 한 대형교회의 이야기이다. 교회쪽에서는 진보적 성향의 이 교회는 정신은 조선시대 인 것 같은 생각이든다. 조선 시대만 해도 어린이나 여성에 대한 인권적 존중이나 배려가 없었으며 노동력과 생산력이 떨어지는 어린이는 얘들, 심지어는 얘새*들로 불려지며 천대받기 일수였다. 왜 이 교회와 전근대적 사고를 결합시켜 생가하게 되었는가 하면 이 교회는 예배나, 지원, 물질배분의 모든형태에 대해 어린이들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듯 행동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의 헌금의 주된 수입원이 성인이고, 그에 의해 교회가 운영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 나라를 보더라도 교육은 100년지 대계라하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 하듯이 교회의 청소년은 이 땅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기둥이자 미래의 희망인것이다.
어린이 성전을 냄새나는 교회 지하에 처박아 두면서 정원이 내다 보이는 1층의 넓고 쾌적한 공간을 교역자들을 위한 교구실로 쓰는 대형교회.......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2) 평소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충실하던 어느 여전도사님의 이야기이다. 한 명 성도를 전도하려 영혼구원의 막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정성을 들였다. 매일같이 찾아가는 한편, 그 대상을 위해 기도를 끊이지 않았으며 지속적인 관심과 전화심방을 했다. 결국에는 이 전도 대상자가 마음이 돌아 서려는 찰나였는데 그만 조그만 오해가 생겨 교회 출석 직전에 마음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이 여전도사님이 미혼으로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평소에는 전도대상자의 아이를 예뻐하는듯이 보이다가 무의식중에 귀찮아 하는 마음이 여러번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것이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앞에서 있던 아이를 밀쳐버린 이 전도사님은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을수 있으나 거의 넘어져 당바닥에 내동댕이 쳐질뻔한 아이의 부모는 심한 충격을 받았으며 그후로 교회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이는 첫째로 아이의 어린 마음에 심한 상처를 주었으며 그 부모가 예수께 돌아오는 계기를 결정적으로 차단해 버렸다.
자식이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느끼는 것이 누가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보다 자신의 자식에게 잘 대하며 배려해 주는것을 훨씬 더 기뻐하며 감사해 한다. 아이들은 그 부모에게만 귀중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어른들 모두의 귀중한 보배이며 미래의 재산이다. 예수를 섬기는 마음으로 어린이를 대해야 할것이며 교육과 훈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7. 선교와 구제에 목숨 거는 교회를 만들어라.
1) 교회의 목적은 첫째로 예배공동체의 역할이고 두번째로는 선교공동체의 역할이다. 예배라함은 일정한 형식의 틀안에서 무형식의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칭송하고 찬양하며 높여 드리는 행위이다. 이것이 선행된 다음은 실제적 일을 해야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명하신 전도와 선교, 그리고 구제이다. 후자가 따라오지 않는 예배만 드리는 교회는 마치 행함이 없는 믿음과도 같고 실천 없는 탁상공론과도 같다.
그리고 우리의 기본적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는 예배로 인해 채워지고 봉사와 구제, 선교를 통해 유지되며 더욱 풍부해 질수 있다. 선교와 구제는 교인의 헌금으로 충당 되어져야만 한다. 원래 헌금의 의미는 그런 사역을 하라고 있는 것이다. 각 교회에서는 여러가지 명목으로 헌금을 걷고 있는데, 일반 예물 외에도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것들은 사회에 봉사하고 안믿는 영혼들을 위한 주의 사역에 쓰라고 있는 것이다.
교역자와 교회회계를 맏은 직분자는 이것이 함부로 쓰이지 않게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물질을 함부로 남용하는것은 죄악이다. 하지만 어던 경우에는 교회에서 물질을 움켜 쥐고 아끼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것 또한 죄악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는 방법은 모두 잘못이다. 개인의 물질이 개인의 것이 아니듯 교회의 물질도 하나님의 것이다.
서울의 한 대형교회의 지교회에는 총무장로가 있는데 이 분은 여타 교회의 장로님처럼 명예와 헌신의 직분자가 아니라 교회의 행정을 담당하며 교회에서 급여를 받는 장로님으로 목사님들을 제치고 연봉 몇 순위 안에 드는 막강한 파워가 있는 분이다. 그 영향으로 그 장로님 아래의 직원들도 소소한 일에서 제법 파워를 행사 하고는 한다. 결국 교회에서 이 사람들한테 개인적으로 잘못 보이면 봉사 하는데도 많은 지장이 있고 순수한 봉사자가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안 건드리려 하는 실정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장로님은 교회의 온전한 사역에 힘쓰는것이 아니라 본 교회에 잘 보이려 지교회의 허리띠를 과도하게 졸라매 예산보고를 하고 남은 돈을 본교회로 돌려 주었다. 이로인해 정작 그 지역을 위해 사역해야 할 지교회의 사역자들이나 봉사자들은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 물질을 움켜쥐어 발생하는 죄악인 것이다.
8. 교회안의 뇌물수수와 매관매직, 직분자의 이권개입을 철저히 봉쇄하라.
1) 대형교회는 교인이 전국에 걸쳐 널리 퍼져 있는데 목회자 한 사람이 사역지 하나를 평생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대기업 발령 나듯이 이리저리 돌아 다닌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여러 사역지를 경험할수 있다는데 있지만 이것의 긍정적 효과는 사실상 미비하다고 본다. 재미있는 사실은 땅투기 업자가 전국 지도를 펼치고 돈이 될만한 땅을 찾듯이 각 교구에도 인기교구와 비인기 교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일부의 교역자들이 인기교구로 여러가지 인맥과 아부,그리고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고 있는 현실이다. 개탄할만한 일이다.
2) 이런 부패는 직분자들 사이에까지 이루어져 외부 업체로부터 교회공사에 관여해 뇌물을 받는다거나, 이권에 직접 개입해 부당 이익을 남기거나 하는 사례도 있다. 이것은 가난한 교인의 호주머니에서 나와 하나님께 드린바 되는 헌물이며 하나님의 사역에 쓰일 귀중한 물질이다. 교회의 구성원은 이런 문제를 사전에 철저히 봉쇄 해야만 교회가 건강하고 영적으로 아름다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 해야만 할 것이다.
9. 목회자의 기를 살려라!!! 목회자의 자존심을 회복시켜라!!!
1) 누가 뭐래도 교회의 목회자는 부리더이다. 그럼 리더는? 당연히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시다. 즉, 교회의 목회자는 인간 중에 절대적 리더임을 인정 해야 한다. 물론 목회자도 사람이기에 잘못된 판단으로 사역을 할수도 있다. 그럴때 잘못된 판단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어느 교회나 교역자와 성도들 사이에 약간의 불협화음을 일으킬수 있고 그럴때마다 성도들이 양보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역자와 성도들의 침밀한 유대관계에서 불협화음을 최대로 줄이고 합심하여 무엇을 해낼때는 그 맨 앞에 교역자를 두어야 하며 그 성과물에 대한 칭찬을 교역자에게 돌리는것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올림픽 경기 개막식을 보면 맨 앞에선 기수를 볼수 있는데 대개는 기수를 뽑을때 선수들 중에서 키가 크며 잘생긴 사람을 뽑는다. 한 교회의 담임 교역자나 한부서의 담당교역자는 올림픽 개막식의 기수와도 같다. 그 사람을 기수로 뽑을 때는 기수가 다른 선수보다 잘생기고, 멋있어 보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대하기 때문에 입장식에서 한나라의 깃발을 손에 든채 당당하게 입장할 수 있는 것이다. 뒤의 선수들이 기수를 구박하며 입장하는 나라를 본 일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모든 나라의 선수들은 불평없이 깃발을 든 기수의 뒤를 따라 이끄는 대로 입장한다.
성도는 목회자의 기를 살려라!!!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고 교회가 잘되는 비결이다.
2) 목회는 경력이 짧던 길던, 나이가 어리던 많던 상관없이 하나님이 내리신 사명이다. 한 교회에 여러 목회자가 있을 때 물론 담임목사님과 부교역자간의 서열은 존재하며 담임목회자의 사역방향에 따라 부교역자가 따라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부교역자는 담임목사님의 부하가 아니다. 오히려 담임 목사님에게는 부교역자에게 명렬할 권한 보다는 부교역자가 맡은 부서의 사역을 어려움 없이 감당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야 할 의무가 더 그카고 말할 수 있다.
3) 내가 청년부로 있던 어떤 교회의 실화인데 이교회는 한 분의 담임 목사님이 여러분의 부교역자와 함께 동역하시는 교회였다. 이 담임목사님 또한 그 위의 본교회의 지교회 교역자였다. 교회가 커서 그런지 한 담임자가 수 십명의 교역자를 거느린 모양이 되었고, 이 목사님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교회의 청년 교역자로 있던 전도사님을 청년업무중에도 개인의 용무에 따라 수시로 불러들였으며 청년의 일에 힘써야 될 직분자가 그 위의 담임목사님의 비서역할을 감당하며 나중에는 개인 기사노릇까지 해야만 했다. 교회의 헌금으로 하나님께서 청년을 위해 세우신 사역자를 자신의 비서와 운전기사로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지금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며 이 교회는 교역자간의 선후배 관계를 중요시한 나머지 자신이 해야될 설교와 예배인도마져 무조건 아래 교역자에게 넘기고 개인의 볼 일을 보는것이 관례처럼 되어 버렸다.
이런 일들이 바로 목회자의 자존심을 꺽어 버리는 심각한 사례이다. 이러한 사례가 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배 교역자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목회자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라!!! 이것이 교회가 잘되는 아홉번째 비결이다.
10. 성도의 교제가 아름다우며 화목한 교회만들기에 힘써라.
1) 적극적으로 교제하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배려하는 성도가 되기에 힘쓰라. 이것은 그냥되는것이 아니며 의도적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2) 성도의 어려움을 모른척 하지 말아야 하며 도움을 바라는 손길을 뿌리치지 말며, 위로받기 원하는 자에게 무관심하지 말며 작은 것 이라도 베풀기에 힘쓰며, 대접하기를 좋아하며, 이웃과 나누기를 좋아하며, 타인의 승함을 같이 기뻐하며, 타인의 아픔을 같이 기뻐할줄 알아야한다. 그런 사람이 되도록 성도들 각자가 노력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