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영리한 '반미'
득실과 명분 따져가며 친미·반미 적절히 오가
초강대국 미국의 대선(大選)이 미국인들만의 관심사가 아님은 유럽에서 피부로 느껴진다. 지난주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버락 오바마(Obama) 상원의원이 유럽의 세 강대국 독일, 프랑스, 영국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미국 대선의 열기는 유럽 땅에도 상륙했다.
오바마의 유럽 방문은 그의 대단한 인기를 실감케 했다. 미국에서 록스타처럼 팬을 몰고 다닌다고 해 그의 이름 오바마와 마니아(mania)라는 단어를 합한 오바마니아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오바마니아는 유럽에도 등장했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오바마는 20만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인상적인 연설로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니콜라 사르코지(Sarkozy) 대통령을 만나고 단 몇 시간만 머물고 갔지만 좌우 성향 가릴 것 없이 프랑스 언론들이 일제히 오바마의 유럽 방문을 1면 톱기사로 다뤘다.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몽드는 '버락 오바마의 매력에 사로잡힌 유럽'이라는 제목으로 1면에 보도했다. 지난 2005년 아프리카와 아랍 이민 2세들의 소요를 겪은 프랑스에서는 소외된 이민 2세 젊은이들 사이에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오바마가 우상으로 떠오른다.
오바마에 대한 유럽 언론의 뜨거운 반응은 얼마 전 유럽을 고별 방문한 조지 W 부시(Bush) 대통령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당시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어깨가 축 처진 부시의 뒷모습 을 실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샌드백이었던 부시가 떠나면 이제 유럽 언론들은 누구를 두들겨 팰까"라고 논평했다.
임기 말년이라 관심이 시들해진 탓도 있지만, 이라크 전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것 때문에 부시 대통령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럽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지도자였다. 부시 대통령은 팬클럽 대신 시위대를 몰고 다녔다. 4년 전 미국 대선 때 프랑스 언론들은 "부시 떨어져라"를 열심히 외치기도 했다.
남의 나라 대통령 후보를 두고 인기 투표를 한다는 건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일이지만, 유럽에서는 미국 대선을 놓고서도 그런 여론조사가 벌어진다.
프랑스의 한 여론조사에서 오바마의 인기는 84%였다. 미국 공화당의 대선후보 존 매케인(McCain) 상원의원도 지난 3월 프랑스를 방문했지만 오바마처럼 눈길을 끌지는 못해 지지도가 33%에 불과했다.
유럽 입장에서는 부시 대통령처럼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일방적인 외교 정책을 밀어붙이는 지도자 대신, 말이 잘 통하는 미국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파트너로 등장하기를 바라는 속마음이다. 그러기에 껄끄러운 부시 시대가 끝나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유럽 정치인들이나 언론, 외교 전문가들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기며 공화당 후보 매케인이나 민주당 후보 오바마와 외교적 주파수가 잘 맞나, 안 맞나를 따져보고 있다.
국제 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유럽에도 친미, 반미 감정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지난 몇 년간 유럽 대중 사이에 높아진 반미 정서는 더 정확히 말하면 반부시 정서, 그러니까 이라크전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패권주의 외교에 대한 반감이었다.
특정 지도자, 특정 정책을 두고 외교적 득실과 명분을 따져가며 구체적으로 호감, 비호감을 나타낸다. 그러니 '미운 부시'가 물러나면 반미 감정도 줄어들고 새 대통령이 등장해 미국과 유럽 사이에 새로운 협력의 물꼬를 터나갈 기회도 마련된다.
우리 사회처럼 정치적 선동에 의해 막연한 반미 감정을 집단 표출하며 외교적 자해 행위를 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영리하고 실속 챙기는 반미요, 국익 따지는 대외 의식이다
강경희 파리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