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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되찾기

리틀제이콥... |2008.07.31 14:03
조회 130 |추천 0

6년 남은 간도 영유권 시효

 

"6년밖에 남지 않았다."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일제와 청나라 간에 1909년 맺은 간도협약이 6년 후인 2009년에 100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국제법에는 불문법(不文法)에 속하는 관습법에서 시효제도를 인정하고 있다. 시기가 명료하진 않지만 100년설이 정설이다.


간도 문제를 끈질기게 연구해온 국제법 학자인 김명기 천안대 석좌교수와 노영돈 인천대 교수도 100년설을 옹호하면서 2009년 안에 정부가 어떤 식으로 간도 영유권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 교수는 '역사적 응고이론'을 설명하며 "한국이 간도문제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지 않으면 그냥 인정하고 넘어갔다고 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시아영토문제연구소 양태진 소장은 "영토는 침묵하는 자에게 권한이 없다"면서 국제법적인 확실한 증거가 있으 면 100년이 넘더라도 찾을 수 있지만 우리 같은 약소국으로서는 시효 만료 이전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독도 문제를 언급하는 공문서인 구상서를 거의 매년 한국에 보내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는 구상서 자체가 영토 분쟁의 시효정지에 충분한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국제법 학자들의 의견이다.


정부 "간도 문제 당장 제기 어려워"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그동안 정부에서 어떤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우호적인 관계가 간도영유권 주장으로 금이 갈까 우려하는 측면이 강하는 것이다. 한 사학자는 "남북한의 통일에 관해 하나의 키를 쥐고 있는 중국이 간도 영유권 문제로 통일을 방해할지 모르기 때문에 정부는 물론 학자들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간도 문제를 제기하는 전문가들은 최소한 정부 차원에서 연구는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12월 12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대해 범정부 차원에서 대처해나가기로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왜곡 대처 방안을 마련하고 있는 외교통상부 문화협력과의 한 관계자는 "간도 문제는 당장 제기하기 어렵다"고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면서 "외교통상부도 준비는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2009년이 시효만료 기간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거기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정부에서 간도에 대한 연구 작업을 시작한 사실은 비공식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한 한 사학자는 "외교부에서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면서 "하지만 매번 사람이 바뀌고 그럴 때마다 똑같은 일을 다시 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학자는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기구를 설치하고 전문 인력을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교수는 최근 간도에 대한 논문을 쓰지 않는다. 노 교수는 "중국 정부와 학자들이 한국에서의 간도 연구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우리 정부가 연구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료를 내놓으면 중국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하는 꼴이 된다"고 말했다. 정부가 이제라도 연구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까지 간도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은 주로 재야사학자와 영토문제연구가, 일부 국제법 학자들이다. 영토 문제에 대한 사실 확인과 여론 주도를 책임져야 할 정통사학자들은 거의 찾아보기 드물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간도 영유권 주장은 허황된 꿈이라는 인식이 널리 팽배해 있다. 한 전문가는 "정부 쪽 관계자에게 간도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미친 놈 취급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재야사학자인 김득황 박사는 "일제의 역사 교육에 영향을 받은 사학의 전통 때문에 정통 사학자들이 간도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분은 하지만 이슈화는 이르다"

1993년 11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정부는 〈중조변계사〉(中朝邊界史)라는 책을 발간했다.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국 학자들의 논리를 중국측의 입장에서 반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에서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학자들이 한국측 전문가들의 연구를 반박하는 대응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중 국경 논쟁은 현재 중국 정부-학자 대 한국 재야사학자 간의 대결 국면이다.


사학에 있어 재야에 속하는 이들 인사들이 평생의 업으로 삼아 끈질기게 간도 문제를 거론하는 반면 정통사학자들은 다소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대해서 정통 사학자들이 대거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정통 사학자로서는 드물게 조선후기사를 통해 간도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강석화 경인 교육대 교수는 "실증을 중시하는 학계에서 간도 연구를 꺼려하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친일사학 때문에 정통 사학이 간도 문제를 등한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부정했다.


간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강 교수는 "공분은 하지만 이슈화는 이르다"며 신중한 입장을 표명했다. 강 교수는 "감정적으로 거론했다가 중국측에서 철저히 준비해 대응하면 오히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충분히 싸워볼 수는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간도 영유권 문제를 줄기차게 주장해온 민간학술단체인 백산학회의 육낙현 총무간사도 다소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육 간사는 "지금 고구려사 문제로 역사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간도 문제까지 거론하면 역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지금 중국과 싸워봐야 이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간도 문제를 지금 이슈화할 경우 중국만 자극하게 된다는 것이다. 

 

 

간도 수복 시효 6년 남았다

 

 

"정부가 적극 나서서 공론화해야 한다."(강경론) "국리민복을 따져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신중론)

이렇게 간도 반환을 보는 국제법학자들의 시각은 '강경론'과 '신중론'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같은 사안을 놓고 대비되는 전략을 내놓고 있는 셈이다. 굳이 따지자면 강경론은 '이상주의'에 가깝고, 신중론은 '현실주의'에 가깝다. 물론 양자는 간도협약의 불법성에 대해서는 똑같은 시각을 갖고 있다. 즉, 1909년 당사국인 대한제국(한국)을 젖혀두고, 청나라(중국)와 일본이 맺은 간도협약은 적법하지 않다는 것이다. 간도 문제를 40여 년간 연구한 노계현 전 창원대 총장(외교사)과 서울대 이상면 교수(국제법)는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조선의 영토를 일본이 팔 권한은 없다"면서 "을사조약에 조선의 영토를 일본에서 팔 수 있는 권한이 규정된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간도협약은 조약체결의 권한과 자격이 없는 일본이 한쪽 당사자로 돼 있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얘기다.


"청-일 간도협약은 원천적 무효"

그러면 간도 반환에 대한 전략에서는 견해가 왜 엇갈릴까. 이는 한국이 처한 현실적 어려움을 고려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이다. 현실적 어려움이란 남북한의 분단이다. 남한이 한반도 중 북한 지역에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 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은 간도 문제에서 북한보다는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신중론자들은 간도의 거주민들이 조선족이 대다수라고 해서 민족 감상주의에 빠져서는 얻을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면 교수는 "국가의 이익을 고려할 때 한국 정부가 적극 대처하는 것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과의 교역, 북핵 등 현실적인 문제를 따져봐야 한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을 때, 즉 남북통일이 됐을 때 하는 것이 국익에 더 도움이 된다"면서 "현 시점에서 중국과 분쟁을 일으켜봐야 좋을 것 없다"고 설명했다. 북한과 접경해 있는 지역을 한국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실익도 없고,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강경론자들은 정부의 즉각적인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강경론을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인 노계현 전 총장과 인천대 법학과 노영돈 교수(국제법)는 "정부는 간도영유권을 확보할 의지와 행위가 있어야 한다"면서 "당장 정부가 행동이나 협상에 나서기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 영유권을 주장하는 공식선언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토 문제는 계속 주장하지 않으면 점유한 나라에 우선권이 돌아간다.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해서 '영토분쟁'이 있는 곳이라고 세계 각국에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노 전 총장은 "중국과의 교역 등도 중요하지만 영토 보전은 원초적 문제"라며 "이는 선후가 뒤바뀐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강경론자는 간도 문제를 국제법에 호소할 수 있는 시기가 협약체결 100년째를 맞는 2009년이라고 못박고, 간도 반환 시한이 6년밖에 남지 않았다며, 국제소송 등 강경하게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간도 문제에 있어 정부의 무대응과 무관심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통일 이전 문제제기 땐 소탐대실"

노 전 총장은 "새로 협의를 진행하자고 하면 중국은 분명 피할 것"이라며 "그러나 이에 개의치 말고 우리는 우리대로 주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설령 회담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후손들에게 좋은 자료를 남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궁극에는 간도협약을 무효화하고, 합법적 당사자인 한국과 중국이 1909년 이전의 분쟁 상태로 되돌아가 서 역사적-지리적-경제적-정치적-법적 요소를 검토하고 협의해 다시 귀속 문제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경론자들이 무능력하다고 성토(?)하고 있는 우리 정부의 입장은 어느 쪽일까. 정부는 철저한 신중론 편에 서 있다. 정부는 강경론자들의 지적에 상당히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적 문제 때문이다. 어쩌면 지레 겁을 먹고 스스로 꼬리를 내린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정부가 마냥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다. 외교통상부 국제법규과 제동환 외무관은 "중국과 일본이 맺은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전제하에 정부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유리한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해왔다"고 말했다. 제 외무관은 "다만, 간도는 북한과 접해 있어 한국이 나서는 것은 명분을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100년이 지나면 간도를 못 찾는다는 조항은 국제법 어디에도 없고, 그런 관례도 없다"면서 "남북통일 이전에 간도 문제를 꺼내는 것은 소탐대실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남북통일 이전에는 북한의 행보가 중요하다. 하지만 중국과 국경이 접해 있어 간도 문제에 관해서는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북한은 이미 중국과 비밀협약을 맺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1960년 맺은 것으로 알려진 비밀협약은 말 그대로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다. 한국 정부도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 후 1962년 중국이 한국전쟁의 참전 대가로 북한에 백두산 지역 양도를 요구했으나 북한의 요구대로 백두산 천지를 분할해, 간도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이 더 이상 요구하기 어렵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북한의 주도적인 역할은 난망한 실정이다.

 

 

밀고 당긴 간도분쟁 300년

 

 

백두산에서는 3개의 큰 강이 발원하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송화강이 천지 주변에서 시작해 각 방향으로 흘러나간다. 압록강은 서쪽으로, 두만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송화강은 북쪽으로 향한다. 한국과 중국의 경계선에 대한 논란은 강줄기에서 출발한다.

"제1조 청-일 양국 정부는 두만강(圖們江)을 청-한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원(江源)에 있어서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로써 양국의 경계로 한다."

1909년 일본과 청의 양국 대표가 맺은 간도협약의 내용이다. 이때 이후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은 압록강-두만강 선으로 완전히 굳어져버렸다. 


간도협약 석을수 경계선 그어

간도협약에 나타난 석을수는 두만강의 지류이다. 백두산으로 뻗어 있는 두만강의 지류는 4개이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류가 홍토수(紅土水), 그 다음이 석을수-홍단수(紅丹水)-서두수(西豆水)이다. 석을수는 두번째에 위치하고 있는 지류이다.

두만강 석을수 경계선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한-중의 국경으로 남았다. 북한은 1962년께 중국과 '조-중 변계조 약'을 맺어 석을수보다 위쪽에 있는 홍토수를 경계로 했다고 전해진다. 이 조약은 아직 원문이 공개되지 않은 비밀조약이다.   

간도협약 때보다 280㎢가 더 많은 영토를 얻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간도가 중국땅임을 사실상 인정해주는 결과를 초래한 조약이었다. 또한 천지의 절반을 중국측에 내준 셈이됐다. 당시 중국에서는 2인자인 저우언라이를 보내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군사지원을 상기시키며 국경협상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김명기 천안대 석좌교수(국제학)는 "이 조약이 비밀에 부쳐져 있기 때문에 국제법상 실제적으로 인정받기에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남북 통일 이후 북한을 비합법적 정부로 인정할 경우 조-중조약이 무효화될 가능성이 높다.

1905년 외교주권을 빼앗은 일본이 멋대로 체결한 간도협약(1909년)과 비밀스럽게 체결한 조-중 변계조약을 통해 한국과 중국의 경계선은 두만강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백두산에는 두만강뿐만 아니라 송화강도 있다.

1712년 조-청 양국 대표가 세운 백두산정계비에 따르면 양측 경계선은 압록강과 토문강이다. 토문강이란 명칭이 논란의 대상이었다. 청은 토문강을 중국식 발음인 투먼(도문)으로 해석, 도문강의 한국식 이름인 두만강이 경계라고 주장했다. 조선은 토문강이 북쪽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의 지류라고 주장했다. 이때 이미 토문강의 동쪽인 간도에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909년 간도협약 전까지 200년 동안 '토문강 논란'으로 이곳은 국경분쟁 지역이었다.

청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킨 위력을 앞세워 국경분쟁의 씨앗을 없애려 했다. 청의 요구로 열린 1895년 을유감계담판(국경회담)에서 양측의 주장은 팽팽하게 맞섰다.

당시 청은 두만강이 양국의 국경임을 전제로 여러 갈래 지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측 대표였던 감계사 이중하는 비문에 나타난 토문강이 국경임을 주장하며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자고 맞섰다.

조선과 청의 대표는 3팀으로 나뉘어 홍토수와 홍단수, 서두수를 따라 정계비를 향해 출발했다. 현장을 답사한 후 이중하는 정계비 비문에 나타난 대로 강이 갈라지는 분수령을 기준으로 한다면 압록강과 토문강이 가장 근접한 분수령 이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 사이에 정계비가 있으며 양쪽 경계선의 표시인 울타리 역시 두 강의 발원지 사이에 놓여있음을 보여주었다. 두만강 지류 중 정계비와 가장 가까운 홍토수도 울타리와의 거리는 40∼50리나 됐다. 

청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이중하의 주장을 반박했다. 첫째는 당시 청의 강희제 때 만주문자가 있었는데 비문에 만주문자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비문이 새겨진 지 200년이 지났지만 자획이 완전하다는 것이며, 셋째는 비의 자리를 옮겼다는 것이다. 


협상결렬로 여전히 분쟁 지역

결국 을유담판에서 경계 문제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 문제는 2년 후인 1887년 정해담판으로 넘어갔다. 정해담판에서 청측은 더욱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청은 홍단수를 경계선으로 주장했다. 이곳에 15개의 비석을 세우려고 했다. 조선측 대표였던 감계사 이중하는 "내 목이 잘릴지언정 땅은 한치도 내놓을 수 없다"며 양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중하는 끝내 홍토수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노계현 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외교사)는 "당시 이중하는 석을수가 협상의 최소 조건이라는 청국의 공문을 간파한 후 협상을 고의적으로 결렬시키기 위해 토문강 주장을 버리고 청이 받아들일 수 없는 홍토수를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은 두번째 백두산 답사 후 석을수로 양보했다. 하지만 이중하는 홍토수를 고집했다. 협상은 결렬돼 간도땅은 그대로 분쟁 지역으로 남게 됐다.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한국사)는 "을유담판과 정해담판를 통해 양측 대표의 국경회담이 결렬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 문제가 여전히 분쟁 상태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해석했다.

1888년 4월 28일 청국교섭공사인 원세개가 조선 외무독판 조병직에게 보낸 문서에서 "1887년의 감계는 협정에 이르지 못하고 경계는 후일의 감계를 기다릴 것"이라고 인정한 부분은 당시 국경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이 없어지자, 1900년 대한제국은 간도에 있는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해 두만강 인근에 변계경무서를 설치했다. 또한 1902년 종3품 이범윤을 간도로 파견해 관리토록함으로써 영토주권을 행사했다.

 

출처:http://blog.daum.net/thomasyk/5329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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