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애들은 영미음악 안따라하나. 서태지랑 차이는 서태지가 여러장르를 시도해서 다 성공시켰다는 거고 인디애들은 한 장르만 파도 하나도 성공시키지 못했다는 거 밖에 없다. 그리고 영미애들도 영미음악 따라하는 건 마찬가지다. 즉 진짜 새로운 음악은 영미그룹들 중에서도 아주 드물다는 것. 그래서 다른 음악들 평가할땐 새로움? 이런건 거론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서태지나 되니까 새롭다라는 단어가 나오기라도 하는거지. 그리고 이번 앨범은 진짜 새롭다. 소스가 새로운건 아니고 조합이 새롭다.
네티즌 평점 2350명이 참여해서 9.6. 다들 좋게 듣고 있다는 얘기다. 평론가들도 기본적으로 좋게 듣고 있다. 잘만들었다는 건 그들도 기본으로 인정하고 있는 거고. 문제는 새로움인데 사실 이거는 서태지에게만 적용되는 특수한 잣대라는 생각도 든다. 다른 음악에도 새로움이라는 잣대를 적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새로움이라는 잣대를 적용해도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는 거다. 여기서부터는 토론이나 논쟁이 가능해지는 거고. 그런데 그 이전에 잘만들었고 듣기 좋다는 건 평론가들도 다 인정하고 있다는 것. 서태지보다 평점이 높다는 한희정한테도 새로움이라는 잣대를 적용해보자. 과연 평점이 더 높게 나올지. 한희정이 평점이 더 높은건 서태지가 문제가 아니라 평론가들이 문제다.
모아이의 새로움은 조합에 있다.
드릴 앤 베이스 + 피아노 + 록음악 편성의 드럼,베이스,기타 + 하프 + 현악 스트링 엠비언트
이런 조합은 서태지가 최초이고 다른 음악중엔 이런 조합을 가진 음악은 없다.
이런 조합이 다른 음악엔 없는 이유는 만들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록음악과 융합이 가장 힘들다.
휴먼드림에서는 토이트로닉을 소스로 록음악과 융합시키고 있다.
이걸 가지고 모던록이나 신스팝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나 음악 안듣는다고 광고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드릴 앤 베이스나 토이트로닉 idm을 소스로 사용하는 신스팝 혹은 모던록은 없다.
틱탁에서는 록음악을 메인으로 하고 글리치 idm을 도입하고 있다. 세곡 중에서 가장 덜 새로운 음악이다.
위에 두곡이 화학적 융합이라면 틱탁은 물리적 접붙이기 혹은 첨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리치 idm의 도입은 신선하다.
한희정을 거론한 것은 한희정의 음악이 전혀 새롭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움이라는 잣대로 한희정을 평가해도 과연 좋은 평점이 나올거냐는 것이다.
이어서 서태지 음악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이번 서태지의 음악이 예전 음악과 다른 점은 기존의 장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장르들은 소스로 다른 장르와 합쳐져서 융합되서 사용되고 있다.
모던록과 신스팝같은 단어들은 서태지의 음악을 설명해주기 보다는 그 진면목을 적당히 얼버무리는 단어들이다.
그것은 장르를 다른 음악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음악과 유사성만을 지적하기 위해 억지로 끼워넣기 위해 사용하는 안좋은 사용법에 해당된다. 실제로 모던록이나 신스팝 중에 서태지의 이번 신보같은 음악은 '없다'
서태지의 실험은 조합의 실험이다. 재료들은 새롭지 않다.
하지만 이 재료의 수준에서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문 것 같다.
모아이에서 드릴 앤 베이스, 휴먼 드림에서 토이트로닉(리코더를 소스로 사용하는 신스팝은 없다.), 틱탁에서 글리치(glitch) idm.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런 재료들이 장르 컨벤션으로 그대로 7집의 이모코어처럼 차용되는 게 아니라 서태지 자신의 조합으로서의 장르인 네이쳐 파운드에서 융합된다는 점이다. 이 융합이 바로 이번 서태지 음악의 실험이고 그 실험의 목표는 단순히 멜로디나 댄서블같은 평면적인 차원이 아닌 입체적인 총체적인 사운드로서의 대중성이다.
사운드-쾌적함. 이것은 시부야와 방법론적으로는 유사하고 (이지리스닝 & 언이지메이킹) 그래서 느낌도 비슷할지 모르지만 레시피가 다르다.
즉 구체적으로 사운드-쾌적함을 얻는 조합이 다르다는 것이다.
요리는 재료의 새로움으로 하는게 아니라 레시피, 즉 조합의 새로움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서태지의 네이쳐 파운드라는 요리는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새롭다. 게다가 맛도 좋다.
가치판단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조합의 새로움은 가치판단이 아니라 사실판단이다.
음악을 듣고 좋다 구리다 라고 말하는 건 개인의 주관적 취향이다.
여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문제는 사실판단에서 틀릴때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된 사실판단에 의거한 가치판단은 역시 필연적으로 잘못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평론가가 서태지를 까는 이유는
오버 그라운드 - 서태지 - 인디
외국 - 서태지 - 한국
이 두가지 삼항 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태지는 이 두가지 삼항조에서 묘하게 둘 모두 중간적인 미묘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오버와 인디와의 관계에 있어서 서태지는 오버에서 거의 유일하게 인디보다 음악성이 뛰어난 뮤지션이다. 이것은 인디의 찬양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들이 인디를 찬양하는 것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서다.)
그리고 외국과 한국의 관계에 있어서 서태지는 외국의 음악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역시 거의 유일한 뮤지션인데 여기서 외국 음악에 비교적 빠삭하다고 자부하는 평론가들이 그 음악에 대해 별로 새로울 건 없다고 아는 척 하면서 까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평론가들과 서태지 사이에 음악적 내공 대결이 은근한 경쟁구도로 펼쳐진다. 서태지가 들고 나오는 새로운 음악을 평론가들은 별로 새로울 것 없다고 말해야 하고. 근데 여기서 평론가들이 리얼 타임으로 이긴 적은 별로 없다. 그러니 더욱 기를 쓰고 새로울게 없다고 서태지를 깔려고 하는 것이다. (일부 매니아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인터넷 시대를 맞이해서 서태지는 오히려 평론가들과의 격차를 더욱 벌려놓은 모양새이다. 왜냐하면 서태지도 인터넷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드릴 앤 베이스, 토이트로닉, 글리치 idm, 이런 소스 재료들을 제대로 언급하는 평론가들이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기껏해야 모던록, 신스팝이다. 왜냐, 그들이 아는게 그거 밖에 없기 때문이다. 드릴 앤 베이스도 홍보자료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언급하는 것이다.(게다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러니 평론가들은 서태지의 이지리스닝적 측면(결과)만 듣고 그것을 들리게 만든 과정, 실험, 그런 모든 언이지메이킹한 음악적 원인들은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분석이란 결과에서 원인을 추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평론가들은 이지리스닝, 대중성이라는 결과만을 말할뿐, 전혀 원인을 분석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엔 새로움도, 실험성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한다는 건 바로 이런때 사용하라고 있는 말일 것이다.
평론가들의 문제는 단순히 가치판단을 과소평가나 과대평가를 하고 있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평가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소스와 조합, 그리고 멜로디와 사운드 외에도 리듬이라는, 아마 이번 서태지 음악에서 가장 실험적 요소에 속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고드는 평론가가 없다. 리스너라면 이런거 신경쓸 필요없이 그냥 결과만을 즐기면 된다. 열매의 맛을 즐기면 된다. 굳이 왜 맛있는지를 설명할 필요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런데 평론가는 다르다. 평론가가 리스너랑 마찬가지로 아 맛있다 아 맛없다 이거만 하고 있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여기엔 어떤 재료가 들어가 있고 어떤 조합이 이루어져 있고 어떤 요소가 전체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으며 등등. 이런게 평론가가 해야할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 평론가들은 명백하게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 그냥 대충 형식적으로 리뷰를 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니 리스너들로부터 제대로된 전문가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더 이상 새로운 '장르'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으며,
- 필요 많다.
그가 더 이상 '새로움'의 영역에 천착하지 않고,
-천착하고 있다.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모던락이라는 장르군에 속하는 앨범이다. 일렉트로니카에 소프트한 락을 버무린 셈이다.
- 전혀 아니다.
3번트랙인 'T'IKT'AK'을 제한다면 스웨디시 팝(Swedish Pop)의 아름답고 가벼운 리듬에 전자적인 요소를 더한 격이다.
-스웨디쉬 팝-_- 아름답고 가벼운 리듬에 전자적인 요소를 더했다고 하는데 리듬이 바로 전자음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모아이의 리듬은 아름답고 가볍지 않고 한국에 나온 모든 음악 중에 가장 복잡하다.
전체적으로 사운드를 만드는 방법에 있어서는 전작들과 동일한 자세를 취한다.
- 전혀 그렇지 않다. 전작들은 메인 장르에 서브적인 첨가물을 더한 모양새였다면 이번엔 메인 장르 자체가 서태지의 창조물이다. 즉 기존의 장르를 메인장르로 하지 않은 최초의 음악이 되는 것이다.
샘플링이 좀더 적극적으로 차용된다는 점이다. 1번 트랙인 'moai'의 경우 물방울 소리로 시작하여, 드릴앤 베이스 비트와 스네어 그리고 폴리네시아 퍼커션(모르는 소리지만, 보도자료에 따르면), 건반, 기타사운드가 중첩되면서 촘촘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 샘플링. 여기서 우리는 모아이의 사운드 대부분을 샘플링이라고 선언하는 용감한 주장과 만나게 된다. 서태지는 갑자기 샘플링만으로 음악을 만든 디제이 쉐도우가 되버린다.
2번트랙인 'human dream'은 8비트의 전자음이 경쾌하게 배치된다. 국민(?)핸드폰 cf에도 삽입된 015B의 곡처럼 뿅뿅되는 음으로 시작되는 점에서 익숙하다.
- 중간에 활용되는 리코더 소리도 과연 익숙할까?
이 익숙하다는 말은 음악이 익숙하다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음악에서 익숙한 것 밖에 듣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소리가 소리에 그치지 않고, 귀에 감기는 훅(hook)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멜로디는 리듬감 있고, 사운드의 결도 세밀하다. 솜씨 좋은 장인에 의해 잘 만들어진 싱글곡이다. 다양한 소리를 농밀하게 묶어냈다. 한방에 집착하지 않고, 세밀하게 음을 다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멜로디가 리듬감있고(멜로디와 리듬은 음악의 세 요소중 두 요소들이다. 즉 멜로디는 리듬감있을 수 없다.) 만 제외한다면 이 부분은 동감하는 바이다. 다양한 소리가 그 자체로 훅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바로 이번에 서태지가 실험한 총체적인 사운드로의 대중성(사운드-쾌적함)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단지 이 분석의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엉망진창이어서 문제지만.)
참고로 내가 최성욱씨의 리뷰에 반론을 한 것은 최성욱씨 리뷰가 제일 나빠서가 아니라 그 반대다. 그나마 가장 음악적으로 분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다른 리뷰나 코멘트엔 반론할 최소한의 가치도 없다. (가치도 없을 뿐더러 반론할 수 있을 만한 음악적 내용조차 없다. 어째서 서태지 음악리뷰에 서태지란 인간을 얘기하고 있는지 =_=)
좋다 싫다 라는 주관적 취향 차이의 담론은 관용과 존중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음악이야기에는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맞다 틀리다 라는 객관적 합리적 근거를 대는 논쟁적 담론이 있다. 문제는 객관적 담론에 차이에 대한 관용을 강요하거나 주관적 담론에 객관적 정답을 강요하는 데 있다. 좋다 싫다는 객관적 정답과 상관없이 이루어질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합리적 근거를 통한 논쟁은 좋다 싫다와 상관없이(혹은 그걸 초월해서) 이루어진다. 그 둘은 공존, 병행할 수 있다. 하지만 범주를 혼동하게 되면 맞다 틀리다를 가리는 논쟁을 관용을 통해 봉쇄하거나 좋다 싫다의 관용적 차이의 영역에 객관적 진리를 강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훌륭하다와 좋다의 차이다. 우리는 꼭 훌륭해야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좋은 것이 꼭 훌륭한 것은 아니다. 평론은 좋다 싫다를 말하는 차이에 대한 주관적인 관용의 담론이 아니라 훌륭하다 아니다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따지는 합리적 근거를 들어 논쟁을 하는 객관적 담론이다.
그것은 꼭 사실판단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평론에서 훌륭함은 그 자체로 합리적 근거를 들어 객관적 논쟁이 가능한 영역이다. 내가 관심있는 것은 사람들의 주관적 취향이 아니라 작품의 객관적 훌륭함이다. 그리고 이것을 따지는 것이 바로 평론이라는 담론이다. 단지 한가지 주의할 것은 이 객관적 훌륭함으로 타인의 취향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훌륭함은 훌륭함이고 좋고 싫은 건 좋고 싫은 것이다. 그것들은 서로 별개이다. 다른 범주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좋고 싫고를 가지고 평론이라는 객관적 담론을 원천봉쇄할 수는 없다. 관용은 비판에 대한 관용 또한 포함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여기서 평론가와 팬들의 두가지 방향에서의 오류가 탄생한다. 평론가는 훌륭하니까 좋아해야해 라고 말하고 팬들은 좋아하니까 내 취향을 존중하고 비판하지마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둘은 서로 객관적 담론과 주관적 담론을 혼동하고 상대방의 영역에 자신의 기준을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오늘의 뮤직에 올린 서태지 관란 글들.|작성자 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