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D수첩의 PD들은 에이젠슈테인을 알런가요. 당연히 알겠지요. 러시아 영화의 아버지요, 영화 몽따쥬의 정립자인 에이젠슈테인을 모른다면, PD수첩의 PD들은 사실 PD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겠지요.
게다가 에이젠슈테인은 혁명을 위한 영화, 영화를 혁명에 바치고자 한 영화인이 아니던가요. 영화야말로 혁명의 선전수단으로서 진정으로 유용한 예술이라고 인지한 어쩌면, 최초의 인물이 에이젠슈테인일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에이젠슈테인, 영화를 혁명에 바치고자 한 에이젠슈테인을 모르기란, PD수첩의 PD들 역시 PD저널을 혁명에 바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라 보는 게 합당할 것입니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중에 러시아 5월 혁명을 다룬 영화가 있습니다. 제목이 '파업'이던가요, 아님 '전함 포템킨', 아님 '10'월(?). 지금 제목은 확실히 기억에 없지만, 러시아 민중에게 러시아 혁명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알리는 데 이처럼 큰 역할을 한 영화는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영화입니다
PD수첩의 광우병 프로를 보면서 느꼈던 것 가운데의 하나가, 이 프로가 에이젠슈테인의 고전적 영화들, 몽따쥬 영화들을 몹시 닮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편집을 그렇게 했기 때문이겠지만, '당신은 광우병에 걸리고 싶습니까'하는 클래카드성 메인화면을 배경에 깔고, 주저앉는 소의 영상과 아레사 빈슨의 사망원인이 광우병이라는 영상을 겹쳐보여주는 게 영락없는 에이젠슈테인의 수법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광우병을 알리는 선전문구와, 주저앉는 소, 광우병에 걸려 죽은 환자의 모습을 겹쳐보여주면, 시청자는 이 모두를 하나의 의미,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을래야 않을 재간이 없게 됩니다. 이게 영화 언어의 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PD수첩의 광우병 프로가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가 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볼 때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PD수첩의 광우병 프로가 영화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고전적 형태인 러시아 몽따쥬 영화를 답습한, 혹은 재시도한 몽따쥬 영화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PD수첩은 PD저널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광우병 관련 프로에 관해서만큼은 그와 같지 않았습니다. 한편의 잘 짜여진 영화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지금 PD수첩의 광우병 프로가 영화냐 저널이냐의 공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영화라는 너무 많은 자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번역에 참여했던 정지민씨의 설득력있는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검찰에서 이게 영화인지 저널인지 확증하겠다고 PD수첩에 취재영상전체를 요구하고 있기도 하구 말이지요.
PD수첩은 검찰의 자료제출 요구에는 불응하면서 이를 언론탄압이라 항변하고 있습니다. 자사의 새파랗게 젊은 여자 앵커를 내세워 1인시위를 벌이면서, 동정여론을 유발시키고자 하는 행태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이건 언론탑압이 아니지 않는가요. 언론탄압 이전에 PD수첩이 언론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사례가 아닌가요.
PD수첩의 그간의 행태를 보면 영화를 만들기 위한 저널 뒤집어쓰기였다는 게 분명한 듯 하지만, PD수첩이 영상을 혁명에 바치고자 하는 열정을 지니지 않았다 하더라도, 광우병 프로만큼은 저널이 아닌 영화인 게 틀림없습니다. 에이젠슈테인의, 2000년 버전, 한국판 후예라고 하는 것입니다.
PD수첩의 PD들에게 함 물어보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야비한 짓을 할 것인지. 그럴 작정이라면, 이름과 실제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정명이라는 차원에서, PD수첩은 문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 PD수첩의 프로들은 저널을 표방했으나, 그 실질은 영화였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