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바오로의 생애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고 나서 예루살렘에 창립된 원시교회도 한동안 예루살렘과 그 주변 유다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하였다. 서기 36년경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달아난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몇몇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전했다.(사도11. 19-21)
이것이 이방인 전도의 효시라 하겠다. 물론 그 전에 필립보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한 일이 있고(사도8. 26-40), 베드로가 카이사리아로 가서 고르넬리오 백부장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 사례가 있지만(사도10.34-38),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공은 아무래도 바르나바와 바오로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일 년 동안 함께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본 다음(11.25-26)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에서 전도했다. 특히 바오로는 세 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했다.(사도13.1~21.16)
그의 노력으로 민족적, 지역적 종교가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한 세계적 종교로 탈바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오로는 전도 여행 중에 테살로니카 전서, 코린토 전·후서, 갈라티아서와 로마서, 필립피서, 필레몬서 등 친서를 전도한 교우들에게 보낼 정도로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삶을 꾸린 철저한 그리스도인이요, 지중해 곳곳에 주 예수님을 널리 선전한 신학자요, 사도였다.
출생연도
바오로의 출생 연도는 학계에서는 기원5-10년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기원 36년경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맨 처음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사울로”라는 젊은이가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던 사람들의 겉옷을 맡았다고 한다(사도7.58). 그리고 55년경 에페소에서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는 노인으로 자처한다(필레 1.9). 바오로의 출생 연도 또는 나이를 가늠케 하는 정보는 이 두 구절뿐이다.
출생지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타르수스는 지중해에서 16km 내륙에 위치하고, 그곳은 지중해로 흘러들어 가는 시드너스(Cydnus) 강이 있고 타우러스(Taurus) 산이 있어 킬리키아(Cilicia)지역에서는 비옥한 땅이다. 지중해 연한의 중요한 상업, 산업, 문화,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기원전 64년 로마에 병합되었고, 기원전 57년에는 킬리키아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었다. 타르수스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민 와서 정착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바오로는 자연스레 헬라어와 셈족어 헬라문화를 익힐 수 있었다. 현재 타르수스에는 바오로 시대의 유적은 없다.
가족
바오로는 자신의 출생, 할례, 성장, 처신 등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보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았으며, 철저한 바리사이로 처신했다. 부모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바오로는 태생 로마 시민이었다는 사실이다(사도 16,37-38;22,25-29;23,27). 바오로는 코린토 전서에서 자신의 처지를 독신이라 하였으나 정확한 자료는 없다.(1코린 7,7-8;9,5-6)
필립피3,5-6: “나는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벤야민 지파 출신이며, 히브리 족에서 나온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의한 올바름에 있어서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로마11,1: “나만해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났으며, 벤야민 지파에 속합니다.”
이름
바오로는 친서에서 자신을 일컬어 언제나 “바오로“ 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7,58과 13,7에서는 ‘사울‘이라고만 하다가, 사도13.9에서는 ”사울로“, 일명 ”바오로“라고 동일시한 다음 사도 13,13과28,25에서는 “바오로” 라고만 한다. “사울로”을 그리스어로 음역하면 “사울”이 된다. “바오로”는 로마. 그리스도 식 이름이다. 바오로는 이스라엘 문화와 언어권, 그리고 그리스 문화와 언어권에 살았기 때문에 “사울(로)”과 “바오로” 두 가지 이름을 지녔던 것이다.
직업
바오로는 전도할 때 스스로 생계비와 전도 비를 조달했다. 성격적으로 신도들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했고 무엇보다도 수입을 노려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8장3절에 그의 직업이 명시되어 있는데, 바오로는 51-52년경 코린토에서 전도할 때 아퀼라와 브리스킬라와 함께 천막 짜는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부부는 49-50년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은 추방했을 때, 코린토로 쫓겨 와서 임시로 눌러 살다가 바오로의 전도에 큰 도움을 준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었다.
건강
개심 전의 건강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지중해 각지에서 전도할 무렵에 만성적인 지병을 앓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기 자신에 관해서 말하기를 싫어하고 자신의 병명을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가 고질병에 시달린 것만은 틀림없다.
갈라 4.13-14절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는 육신의 어떤 병이 기회가 되어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에게는 나의 조건이 여러분에게는 괴로운 짐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나를 외면하거나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천사와도 같이, 그리스도 예수처럼도 맞아 주었습니다.” 50년 경 제 2차전도 여행 때 바오로는 오늘날의 터키 중부에 위치한 갈라티아 지방을 그냥 통과할 작정이었으나 뜻밖에 발병하여 한동안 머무르게 되었고 그 기회에 그 지방에 여러 교회를 창설했다는 말씀이다.
2코린토12.7-9;갈라6,17;1코린토2,3 에서 자신의 몸이 건강하지 못함을 나타낸다.
“그 계시들이 엄청난 것이었기에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
성격과 언변
바오로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데도 남달리 철저했고, 한번 개심한 다음 예수님을 선전하는데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정열이 넘치는 사람이요 다혈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오로 달변가는 아니었다(사도 18.24-28). 신약시대에 설교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계 그리스도인 아폴로였다. 아폴로와는 달리 바오로는 코린토 교우들로부터 말주변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바오로 자신도 달변이 아님을 시인했다.(2코린 11.6)
성장배경
바오로가 자라면서 받은 영향을 대별하면 세 가지이다.
유대 종교 배경
바오로는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철저한 종교 교육을 받았다. (필립 3,5:갈라 1.14)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평신도 단체인 바리사이파 에 가입했다. (필립 3,5:사도 23,6:26,5)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율법을 실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을 깊이 연구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유학 가서 당대의 석학 가브리엘의 문하생이 되었다.(사도23,3)
문화배경
바오로는 그리스 견유학파(Cynics)와 스토아학파(Stoa)에서 애용한 “흑평논법(디아트리베)” 즐겨 썼다(갈라5-6;1코린토9). 이 논법은 상대방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숨 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독설을 퍼 붓는 논법이다. 그리고 바오로가 사용한 낱말들을 살펴보면 히브리, 아랍어에는 없는 그리스어 낱말들이 자주 나온다.
로마 정치 배경
태생 로마시민인 바오로는 시민권에 따르는 특전을 누렸다. 바오로는 필립피에서 매질을 당하고 나서(사도 16.37) 또 예루살렘에서 매질을 당할 위험에 처하자(사도22.25) 자신의 시민권을 내세워 항의했다. 60년 가을 페스도 총독이 바오로를 유대 최고의회에 넘겨주려 하자 바오로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다(사도25,6-12). 로마 시민이 지방 관청의 재판을 불신하는 경우에는 로마 황제의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교회 박해
바리사이요, 율사 후보생인 바오로는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는 율법 실천과 연학에 몰두하였다(갈라1.13-14:필립 3.5-6). 그러므로 그는 율법을 심히 비판한 예수(마태 5.17-48)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율법과 성전 체제에 도전하다가 처형된 예수는 “저주받은 자”이지 절대로 메시아일수 없다고 바오로는 확신했다.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갈라 3.13) 부활했다는 기독교들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활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미래 사건이지, 역사 한가운데서 일어난 과거 사건일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다혈질적인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다(갈라1.13.23: 1코린15.9: 필립3.6). 그가 박해한 그리스도인들은 토박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고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사도6,11-14)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바오로는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적인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가담했고 (사도7.58-8.1), 시리아지방의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기도 했다.(사도9.1-19:22.3-21:26.9-18)
개심
34년 또는 36년경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리스도인이자 사제가 되었다. 예수님을 대하는 시각이 한순간에 달라졌던 것이다. 개심이야 말로 바오로의 앞날을 좌우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신상 이야기를 싫어하고 예수님으로 선포하는데 전심전력한 사도인데도(2코린 4.5), 그 중대한 개심 사건조차 그저 몇 차례에 걸쳐 간결하게 언급 또는 암시 할 뿐이다.
바오로 자신의 증언들은 다음과 같다.
갈라1,15-16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고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1코린 9,1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했단 말입니까?”
1코린 15,8
“맨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 사산아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필립 3,12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로잡혔으므로 나도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달음질하고 있습니다.”
2코린토 4,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친히 우리 마음속을 비추시어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개심에서부터 1차 전도여행 직전까지(38~45년경)
바오로는 개심한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노선 곧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비판적인 신앙 노선을 따르면서, 유대 민족 테두리를 넘어 유대인들에게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활발히 전도하였다. 그는 스스로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처하곤 하였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개심한 다음 우선 다마스커스 교회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고 설교했다고 한다(사도9.20~22). 그 후 바오로는 아라비아로 전도하려고 갔다가 나바테아인들의 미움을 사서 다마스커스로 피신하였으나, 다마스커스에 거주하던 나바테아인들이 바오로를 체포하려고 하자 그는 비상수단을 동원해서 극적으로 탈출사건을 기록하고 있다(2고린11,32-33).
36년경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 게파(베드로) 와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를 만나보고 나서 바오로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가서 한동안 전도했다(갈라1,19-24). 그 시기에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유대인들에게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전도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혼성 교회를 창립하게 된다.(사도11,19-20).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볼 책임자로 키프로스 섬 출신 보조 사제 바르나바를 파견하였다. 바르나바는 타르수스에 있던 바오로를 초빙하여 만 일 년 동안(44-45년경) 시리아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았다(사도11,19-26).
시리아 안티오키아
안티오키아는 사회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대도시였다. 로마제국에서 백만이 넘는 도시는 제국의 수도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고, 안티오키아는 시리아 지방 수도로서(인구 약 50만),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바오로 시대의 유적은 불행히도 전해 오지 않는다. 십자군시대의 성 베드로 석굴 성당이 있다.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교회사적 중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다.
①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가 안티오키아에서 교회사상 처음으로 공공연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사도11,20). 그 결과 안티오키아 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혼성 교회가 생겨났다.
② 바오로는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에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 안티오키아에서 30km 떨어진 오론테스 강 하구의 지중해변 셀레우키아 피에리아 항구에서 (사도13,4) 출발하게 된다.
③ 안티오키아 시민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사도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