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김호진 |2008.09.15 09:48
조회 341 |추천 1
<embed src='http://cyimg18.cyworld.com/common/file_down.asp?redirect=%2Fj56601%2F2007%2F6%2F30%2F41%2F5205506421581101680387_0400x0507.swf' wmode='transparent' quality='high' menu='false' width=400 height=507 pluginspage='http://www.macromedia.com/go/getflashplayer'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vanitas란 라틴어로 '덧없음'이라는 뜻이다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바니타스화란 17세기초에 네덜란드에서 꽃을 피운 중요한 정물화 양식이다.죽음의 불가피성, 속세의 업적이나 쾌락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을 상징하는 소재들을 주로 다루었다. 바니타스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도록 타이른다. 결국 헛된 인간의 운명을 가치로 구원할 수 잇는 것이 종교라는

것을 말하믐 것인데, 후기 르네상스 시기에는 초상화 뒷면에 죽음과 덧없음을 상징하는 해골 같은 것을 자주 그렸는데, 바니타스는 이런 단순한 그림에서 발전했다. 바니타스는 1550년경에 독자적인 분야로 발전하여, 1620년경에는 매우 인기있는 장르가 되었다. 바니타스는 1650년경 쇠퇴할 때까지 주로 네덜란드의 연합주인 레이덴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레이덴은 인간의 죄많음을 강조하고 윤리적 기준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칼뱅주의 신학의 중심지였다.

잠시 진중권의 말을 인용한다.

바니타스 속에는 언제나 중세 메멘토 모리의 여운이 울리고 있다.이게 바로 바니타스의 종교적 요소다.이 공통의 종교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마카브르와 바니타스 사이에는 커다란차이가 있다. <죽음의 춤>이나 그밖의 중세의 마카브르에서 죽음은 언제나 '밖'에서 찾아왔다.그것은 삶에 가해지는 외적인 강제였다. 반면 바니타스에서 죽음은 더 이상 외부에서 찾아오는낯선 손님이 아니다. 여기서 죽음은 삶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 삶 그 자체 속에 들어 있는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죽음은 삶의 내면으로 스며 들어온다. 이제 죽음은 삶에 내재한 필연성이다. 생각해보라.죽음은 어디에 있는가?

살껍질 바로 아래 들어앉아 있지 않은가(진중권)

 

바로크 미술의 특징적 도상의 하나가 바로 이 바니타스, ‘지상의 모든 것은 덧없고 헛되다’란 주제를 반영하고 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유일하게 영원한 것은 하느님’이란 사유를 이 바니타스 상징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물화의 한쪽에 등장하는 해골이나, 뼈, 조개껍데기, 시든 이파리, 벌레 먹은 채소 등은 바로 ‘덧없는 삶’을 상징하는 바니타스를 말한다.

사람은 유한하며, 인생의 즐거움도 유한하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지 못한다. 이 그림의 보이지 않는 반쪽에 나타나 있을 거울을 바라보는 사람 또한 멋진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헛됨이 이 해골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거울의 프레임에는 '죽음은 만물의 강탈자' 라는 말이 적혀 있고, 두루마리에는 '권력과 아름다움, 부의 종말'이 선포되어 있다.

이 그림에 나타난 희망적인 부분은 천사의 날개이다. 천사의 날개가 일반적인 새의 깃털을 가진 날개가 아니라 나비의 날개이다. 나비는 유충으로부터 시작되어 성충으로 변한다. 애벌레가 변화하여 생기는 나비. 결국 애벌레는 지상의 삶을, 변화된 나비의 날개는 천국에서의 영생을 뜻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이렇듯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 삶을 얻게 된다는 것, 그 진리를 깨달아 세상의 헛된 것을 구하지 말고 영원한 것에 인생을 투자할 것을 이 그림은 우리에게 도전한다.

책이나 지도나 악기는 예술과 학문을, 지갑이나 보석은 부와 권력을, 술잔이나 담배 파이프나 트럼프 카드는 세속적 쾌락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될 뿐이다. 여기에 노골적으로, 덧없음을 상징하는 시계나 꽃이나 양초나 비누거품이 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들어가기도 한다.

클라스존의 그림은 붓으로 말하는 설교다. 여기서는 턱 빠진 해골이 설교자다. 이마가 반들반들한 해골은 책을 깔고 앉아 이 세상 지식과 학식의 쓸모없음을 침묵으로 말한다. 그리고 공허한 눈을 들어 그림 밖의 빛을 응시한다. 종교적 정물화에서 빛은 항상 멀리 있는 존재다. 시각이나 인식의 그물로 포착할 수 없을 만큼 멀찍이 떨어져 그림 속의 희미한 반영을 통해 임재할 뿐이다.

 

< 노성두/ 미술사가·서울대 미학과 강사 >

 

 

 

 

바니타스 파 작가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아니면 의문만 가지고 통회하며

삶을 마감했을까.

추천수1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