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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①

신문섭 |2008.09.29 00:06
조회 528 |추천 5

 

☆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 ①  ☆

 

 

◇ 독일을 대표하는 언어장애 작가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는 1877년 남부 독일의 뷔르템베르크의 소도시 칼브에서 태어났다. 신교의 목사인 아버지는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한 일이 있으며, 외할아버지는 30여개국의 언어를 구사하는 뛰어난 분이었다. 그의 서재에는 기독교 서적에서부터 그리스 및 라틴의 고전, 인도의 서적 등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어린 헤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많은 독서의 영향으로 헤세는 어려서부터 동양 종교에 흥미를 느꼈으며 코스모폴리탄적인 평화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또한 18세기의 독일 문학에 심취하기도 하였는데 소년 헤세는 이렇듯 간접체험을 통해 공상의 나래를 펼쳤다.


14세가 되자 헤세는 목사가 되기 위해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학교 규율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반년 만에 퇴학당하고 만다. 한편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등 자폐증으로 시달렸는데 그러한 그도 괴테의 작품을 읽고 나면 마음의 안정을 되찾곤 하였다고 한다.


한 때는 숙련공이 되려고 기계 공장에서 3년 동안이나 시계 톱니바퀴를 다루는 일을 하기도 하였으나 주위의 비웃음에 그만 두었다. 기계공장을 그만 둔 헤세는 서점의 점원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체험이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를 낳았다.


1899년에는 시집 '낭만의 노래'와 '한밤중의 한시간'을 발표했다. 1904년에 쓴 '페터 카멘친트'는 자연 속에서 인간의 애정을 탐구하고 있는데 헤세는 이 작품으로 일약 유명 작가가 되었다. 그 해 아홉 살 연상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한 그는 조용한 시골에 파묻혀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했다. 그리하여 1915년에 유명한 '크놀프'를 발표하였다. 1911년 헤세는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싱가포르, 수마트라, 실론 등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때 받은 감명들을 글로 옮긴 책이 1922년에 발표된 '싯다르타'이다.


한편 아내의 정신병 악화와 자신의 신경장애 때문에 헤세는 정신과 의사에게 심리요법으로 치료를 받았다. 그 후 정신과 의사의 권유를 받고 프로이드 심리학을 연구한 헤세는 1919년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데미안'을 완성하였다. 인간의 본성과 이성의 갈등을 그린 '지와 사랑'은 1930년에 발표되었으며 대작 '유리알 유희'는 1943년에 발표되었다.


마침내 1946년 헤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시나 소설은 음악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고 그 내용이 명상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헤세의 작품 속에는 인도의 불교철학이 숨 쉬고 있음이 발견된다.


◇ 20세기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서머셋 몸


'달과 6펜스'로 유명한 작가 서머셋 몸은 1874년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 고문 변호사의 아들로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8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0살 때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몸은 목사인 숙부의 집으로 가서 자라게 된다. 이곳에서 보낸 그의 소년시절은 자전적 소설인 '인간의 굴레'에서 묘사된 것처럼 매우 불행하고 고독했다.


독일로 유학을 갔던 몸은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예술에 대한 호기심과 문학에 대한 눈은 뜨게 되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오나 숙부에게는 차마 그의 뜻을 말하지 못한다. 그는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성 토머스 병원의 부속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의사자격증을 딴다.


그는 의대 재학 중에 이미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그가 런던 빈민굴의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경험했던 느낌을 바탕으로 하여 쓴 것이다. 그 뒤 10년 동안 그는 장편, 단편, 희곡 등 많은 작품을 썼지만 이렇다 할 이름을 얻지는 못하다가 1908년 우연히 희곡 '프레더릭 부인'이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이름을 얻었다. 그 후 4년 동안 그는 유명 극작가로서 런던의 사교계를 드나들며 여유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12년경부터는 극작까지 중단하고 자신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어린 시절의 고독과 그의 삶을 소설로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2년만에 완성한 것이 장편소설 '인간의 굴레'이다.


1915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발표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별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 뒤 '과자와 맥주', '비' 등을 발표하였다가 1919년 폴 고갱을 모델로 하여 쓴 '달과 6펜스'를 발표하여 일약 스타가 되었다. 미국에 이어 프랑스에서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그동안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인간의 굴레'도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그의 작가활동의 전성기로 들어간다.


몸의 최후의 소설은 1948년에 발표한 '캐털리나'로 이후로는 평론집과 편저만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 가장 주목해야 할 작품으로는 무엇보다도 반생에 걸친 인생 노트와 창작 메모 등을 공개한 '작가의 노트'일 것이다.


◇ 초인적인 의지의 헬렌켈러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헬렌켈러는 생후 19개월에 성홍열을 앓아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삼중고의 장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가정교사 설리반 부인의 열렬한 교육에 의해 말을 익히고, 발성법을 배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4년에는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그 후 자기처럼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나의 생애', '신념을 가져라' 등의 저서를 내어 청각장애인, 시각장애인이라도 정상인과 똑같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세계 각지를 다니며 강연을 하면서 맹농아의 교육과 사회 시설개선에 힘썼다.


"단 3일만 볼 수 있다면…" 하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장애로 인한 고통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미국의 여류사상가로 사회사업가로 성장하였으며, 그녀는 이러한 삶은 현재에도 모든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에게 삶의 귀감이 되고 있다. 


◇ 휠체어를 탄 제2의 아인슈타인 스티븐 호킹


스티븐 호킹하면 생각나는 것은 휠체어와 금속성 목소리다. '빅뱅이론'이니 '아기우주'니 하는 학문적 업적보다 고개조차 스스로 가눌 수 없는 그의 루게릭병을 먼저 떠올린다. "루게릭병이 아니었더라도 지금 같은 물리학자가 되었을까?" 라는 질문에 호킹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읽고 쓰는 일에 지금같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강연하고 시험점수 매기느라 연구를 제대로 못했을 것이므로 결국 루게릭병이 나를 이론 물리학자로 만든 셈이다"라고 답한다.


휠체어에 앉은 호킹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왼손의 손가락 두 개와 얼굴 근육 일부분, 폐렴으로 기관지 제거수술을 받은 후 목소리마저 완전히 잃었다. 처음 목소리를 잃고 나서의 의사소통 방법은 비서가 옆에서 알파벳을 적은 카드를 들어 보이면 그 중 원하는 카드에 눈썹을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현재는 휠체어 앞에 달린 컴퓨터를 이용한다. 커서가 2,600단어 위를 빠르게 움직이다 원하는 단어 위에 갔을 때 스위치를 누른다. 이렇게 겨우 한 문장을 만들면 음성합성기가 미국식 악센트로 소리를 만들어낸다. 1분에 10개 단어가 고작이다.


옥스퍼드를 3년만에 마치고 20살에 케임브리지대학 박사과정에 갈 때만 해도 그는 건강한 청년이었다. 조정선수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에 갔을 때 그는 별다른 이유 없이 자꾸 넘어졌다. 퐁토병을 연구하는 학자였던 아버지는 그를 전문의에게 데려갔고, 마침내 근육이 점점 수축되어 심장근육에까지 이르면 사망하는 루게릭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육체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잃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에게 어떤 희망이 있을까. 그는 놀랍게도 전보다 행복해졌다며, "내가 사형선고를 받았고 지금은 집행유예 기간이라면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라고 말한다.


그의 몸이 악화되어 갈수록 밖에서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예견했던 우주 '특이점'의 존재를 23살 때 박사학위 논문에서 증명해냈다. 32살 때는 영국 학술원의 최연소 회원이 되면서 '제2의 아인슈타인'이라는 수식어까지 얻었다. 77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의 중력물리학 정교수로 임명됐다. 기관지 제거수술을 한지 3년후인 88년 '시간의 역사'를 펴내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20개국에서 1천만권 이상 팔렸으며 미국 베스트셀러 차트에 55주 머물렀다고 한다.


또한 과학분야에서 수십 개의 상을 받았다. 루게릭병을 앓고 있으면 어떤 기분인가 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스티븐 호킹을 별다른 기분을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가능한 한 정상적으로 살려하고 내 상태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실제로는 못하는 일도 별로 없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유머감각과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 세계적인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니콜라스 콘스탄티니디스


파란 나일강의 색깔만 기억하는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콘스탄티니디스는 인간세계의 승리자로 전세계에 알려진 피아니스트이다. 1995년 폴란드에서 열린 국제청소년음악회에서 입상함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의 연주회는 매번 세계의 주목을 받아 미국교육방송, 영국 BBC, 스위스의 라디오 방송, 독일의 RIAS,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라디오 등에서 중계되었으며, 전세계의 청중들과 비평가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그의 양친은 그리스인이며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런던 왕립음악학교에서 리센티에트(유럽에서의 학사와 박사의 중간학위)를 받고 졸업한 뒤에 미국 보스턴 왈라스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았으며 여기서 음악학사를 받고, 클리블랜드 음대에서 음악석사 학위를 받았다.


바르샤바 콘서바토리의 최우수 디플로마를 받고 또한 쇼팽의 고향인 젤라로와 왈라에서 쇼팽곡으로 된 연주회를 개최하는 영광을 얻기도 한 그는 1969년 미국 최고의 젊은이로 뽑히기도 했다. 어떤 나이와 배경을 가진 청중들과도 쉽게 어우러지는 그에 대한 매력은 세대와 문화의 장벽을 허물었으며 모든 청중에게 환희를 주었다.


4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그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단지 불편할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일반의 상식을 깨고 시각장애인으로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된 그에게 장애는 단지 조건일 뿐인 것이다.


◇ 의자 위의 지휘자 제프리 테이트


의자에 읹아서 지휘봉을 흔드는 지휘자 제프리 테이트. 그는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휼륭한 지휘자의 한사람이다. 그는 왼쪽 다리가 마비되어 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의자에 않아서 지휘를 하지만 제네바 오페라단 수석 지휘자이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공연을 지휘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음악의 천부적 재능을 보여준 그는 배고픈 예술가의 말년을 걱정하는 부모의 권유로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인턴수련까지 마쳤다. 하지만 음악을 포기하지 못하고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다 메트로 오페라단 지휘자 레빈의 권유로 지휘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오페라에 인생을 걸고 정상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 '말은 잘 못하지만 거짓말은 안한다'는 크레티앙 총리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캐나다의 제20대 총리 장 크레티앙 자유당 당수는 선천적인 장애인이다. 왼쪽 안면 근육마비로 한쪽 귀가 멀고 발음이 불분명한 그는 정치 만화가들로부터 회화적 대상이 되기도 한 자신의 신체적 멍에를 딛고 캐나다 선거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를 쟁취한 주인공이다.


그는 30년 정치생활을 '말은 잘 못하는 대신 거짓말은 않는다'는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자신의 불리한 조건을 이겨냈다. 그는 선거유세에서도 언어장애와 그로 인한 고통을 솔직히 시인함으로써 오히려 유권자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퀘백주 몬트리올 인근 셔위니건의 변호사 출신인 그는 시골호박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수수한 농담과 청바지를 즐기는 소탈한 성품이라고 한다. 연방통합을 강력히 주장하는 그의 소신으로 고향인 퀘백주에서의 인기는 없다.


1963년 29살로 하원의원에 당선 정계에 발을 디딘 뒤 1968년부터 1984년까지 16년간 부총리와 재무, 공업, 법무 등 주요직책을 거쳐 풍부한 행정경험을 가지고 있는 유능한 정치인이라고 한다.


◇ 휠체어를 탄 독일의 2인자 볼프강 쇼이블레


유럽의 한복판에 위치한 인구 8천만의 경제대국, 통일이 되면서 경제력에 걸맞게 정치적 영향력 또한 급속히 신장해 가는 독일, 머지않아 장래에 어쩌면 휠체어를 탄 척수장애인이 그런 독일을 이끌어 갈지 모른다.


독일의 내무장관과 집권당의 원내총무를 지낸 볼프강 쇼이블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독일의 원내총무는 수상 다음의 중책으로 수상직에 오르는 마지막 정류장이다. 원내총무로 선출되던 날 콜 수상은 휠체어를 타고 회의장을 나오는 쇼이블레의 손에 미국의 옛대통령 루즈벨트의 자서전 한 권을 쥐어 주었다.  이 사실로 독일 내에서는 독일에서의 루즈벨트의 탄생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원내총무 선출을 계기로 그에 관한 갖가지 눈물겨운 신화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인기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고 한다.


소이블레가 척추장애인이 된 것은 1990년 한 정신병자의 저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고부터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그는 저격 5일 후 의식을 되찾았으나 의사는 그에게 척추장애인임을 선고한다. 그로부터 그는 최소한 2년은 입원해 있어야 한다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무장관직에 복귀했다. 휠체어가 들어갈 자리를 위해 그는 집무실 책상의 서랍을 톱으로 잘라내었고, 하루 17시간의 격무에 들어갔다.


그의 정계복귀는 그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독일인들 사이에 커다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독일인들 사이에 커다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처럼 심각한 척추장애인이 어떻게 정부 요직의 임무를 해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 없는 인생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정치와 권력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의 장애가 과연 그의 정치여정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는 한 신체장애가 그 사람의 일생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루즈벨트의 예를 통해 익히 알고 있기에 그의 장래도 낙관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외팔의 드러머 릭 앨런


공간을 터뜨릴 듯 울려대는 록밴드의 음악. 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숨가쁘게 드럼을 두들겨야만 하는 록밴드의 드러머가 외팔이라면? `80년대를 풍미했던 영국 헤비메탈 밴드 데프 레파드의 '릭 앨런'은 놀랍게도 왼쪽 팔이 없는 외팔 드러머이다. 앨런은 열다섯살 때인 `78년부터 당시 무명밴드였던 데프 레파드에서 스틱(드럼 채)을 잡았다.


데프 레파드가 세 장의 음반을 연속 히트시키는 동안 드러머 앨런은 힘이 넘치면서도 정교한 리듬의 연주로 명성을 떨쳤다. 앨런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은 84년 12월. 스포츠카 마니아였던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왼쪽 팔을 어깨부분에서부터 절단해 냈다. 드러머로서 생명이 끝나는가 싶었던 시련이었다.


하지만 데프 레파드가 4년만에 재기 음반을 발표했을 때 그는 여전히 드러머였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오른팔을 이용하는 특수주법을 익혔던 것이다. 물론 한쪽 팔을 잃고 난 후의 드럼연주는 이전에 비해 아무래도 속도감이 덜어지는게 사실이다. 오른팔만 쓰다보니 자연스레 발도 오른쪽을 많이 쓰게 됐다. 드럼 세트도 북의 숫자를 줄여 보통 드러머가 쓰는 것과 차이가 있지만 연주에는 전혀 어색함이 없다.


앨런의 재기는 단순한 연주의 완성도 차원을 떠나 인간의지의 힘을 보여준다. 새음반 홍보차 한국에 들른 앨런의 다음 한마디는 정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알기 힘듭니다."


◇ 소울 음악의 천재 레이 찰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각장애인으로 일컬어지는 흑인 소울 가수 레이 찰스. 그는 공황기에 프로리다 주 흑인 빈민촌에서 성장했는데 다섯 살 때 큰형이 목욕탕에서 익사하는 것을 본 뒤 그 충격으로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그 후 미국 전역을 피아노를 벗 삼아 방랑하며 소울 가수로서의 명성을 쌓아왔고, '소울의 천재'라는 음악적 명성만큼이나 숱한 화제를 뿌려왔다. 17년에 걸친 헤로인 중독으로 3번에 걸쳐 구속된 것을 비롯하여, 총 일곱명의 여성과 아홉 명의 자녀를 둔 열정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90년대 초 마약을 끓고 정상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하자 PBS 방송국에서 그의 인생을 다큐영화로 제작할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걸어 왔다.


◇ 흑인 팝 음악의 살아있는 신화 스티비 원더


스티비 원더는 리듬 앤 블루스, 소울 등 미국 흑인들이 창출해 낸 음악 장르를 꽃피운 음악인으로 대중적 인기뿐만 아니라 음악 전문가들도 그의 천재성에 경탄하고 있다.


`60년 열살의 나이에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한 그는 흑인 음악의 메카 '모타운' 레코드에 발탁되면서 독창적이면서도 만인이 공감하는 음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노래뿐만 아니라 유명 가수들에게 작곡, 제작을 해주면서 리듬 앤 블루스가 미국 팝송의 중심으로 떠오른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의 독창적인 작품들은 발표할 때마다 그래미상을 석권했으며 펑크, 소울, 프로그레시브 음악과 재즈로도 편곡되는 등 불후의 명곡으로 남아있다. 선청성 시각장애인인 그는 최근에 공연을 통해 인권, 장애인과 관련한 운동의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다.


◇ 손과 발로 소리를 느끼는 청각장애인 애블린 글래니


50여개의 타악기를 한꺼번에 다루는 청각장애 연주자 애블린 글래니. 그녀는 1년에 120여회의 연주회를 갖는 타악기 연주자이며, 빼어난 미모의 여성이다. 그는 갖가지 타악기로 작은 빗방울 소리부터 천둥소리까지 소화해내며, 자신의 연주를 들을 수는 없지만 발과 손끝에 있는 온갖 신경을 동원하여 소리들을 감지한다.


8살 때 귀에 이상이 생겨 12살 때에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농촌 출신이다. 지방 중등학교에서 음악공부를 하던 12살 때 친구의 북치는 모습에 반해 타악기를 시작했다는 그녀는 청력문제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솔로 연주가로 데뷔한다.


수많은 콘서트를 영국에서 가졌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필하모니와 협연 연주회도 가졌다. `94년 정상 청력을 가진 레코드 엔지니어와 결혼한 그녀는 인간승리의 한 표상일 뿐만 아니라 청각장애 어린이들의 음악치료법을 지원해주는 '런던 베토벤 기금단체'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청각장애인이 어떻게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느냐는 주위의 질문에 그녀는 "저는 청각장애인 음악인이 아니에요. 다만 청각에 조금 문제가 생긴 음악가일 뿐이죠"라고 대답한다. 그녀에게도 장애는 단지 조금 불편한 조건일 뿐인 것이다.


◇ 열정적 휠체어 인생으로 새로 태어나는 수퍼맨 크리스토퍼 리브


영화 '수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의 초인적인 삶에 대한 열정에 미국민들이 경의를 표하고 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리브를 표지인물로 다루고 그가 `95년 승마 도중 낙마로 장애인이 된 이후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크게 소개한 바 있다.  리브는 수퍼맨의 영화배우로서 절정기에 있을 때도 받지 못했던 대접이다.


리브는 사고 후 전미척수마비협회 이사장을 맡아 척수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으며 최근에는 장애인올림픽에 모범장애인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반신불수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리브의 가정이 안정돼 있다는 점도 미국인들이 그를 칭송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92년 결혼한 아내 다나는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은 떠나지 않고 극진히 간호하고 있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리브에 대해 멋쟁이 배우시절보다 더 위대한 인간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주변사람들의 평가이다.


최근에는 미국의 정치인들이 슈퍼맨 살리기 운동을 앞장서 척추부상자의 치료비를 연간 4억 5천만 달러씩 증액해야 한다고 발의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의회에 추가지원비 1천만 달러를 당당히 요구했다고 한다. 6년 후인 50회 생일 때는 기필코 일어서서 걷고야 말겠다는 리브의 각오를 접하면서 그가 이제야말로 진정한 슈퍼맨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다운증후군을 극복하고 연극배우가 된 파스칼 뒤켄


잘 나가는 세일즈맨 해리의 차에 어느 날 생면부지의 청년이 무단승차한다. "나…나…나, 다운증후군이다."라고 소개하며 오르는 조르주. 영화 의 한 장면이다. 그 다운증후군 역에 감독 자코 반 도마엘이 파스칼 뒤켄을 캐스팅한 이유는 "다운증후군 역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건 다운증후군"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던 뒤켄을 불러들였고, 이 시도는 성공하여 영화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두 남자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행복을 발견하는 과정을 지극히 선량하게 그려내 세일즈맨 헤리역의 다니엘 오퇴유와

추천수5
반대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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