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전화를 걸곤 했다.
수없이 신호를 울리고 짧은 진동에 흔들리면서 우리는 무심하게 서로를 집어들고 인사를 건네는 데 익숙해져 갔다.
그 때 쯤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미안할 만큼의 일이 저질러질 수 없을 만큼 그대는 멀리 있다고 그러니까 괜찮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내가 필요없거나 혹은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는 그래서 괜찮다고 얼마든지 속삭일 수 있는 수화기 저 편만큼의 안전거리를 그대는 확보해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 색깔로만 겨우 온도를 구분할 수 있는 까마득한 별들의 이야기였다. 차갑거나 뜨거워서 무심코 손가락을 대고 나서 놀라 멀어지거나 오래 후회하며 두텁고 하얀 천을 감고 다닌 적도 없었다.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실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기다리지 않아서 홀로 남겨진 적도 없었다. 우리는 그 만큼의 거리에 서로를 내버려두었었다.
하지만 그대는 언젠가 고맙다고 말했었다. 그건 너무나 오래되어 사람들이 손끝과 입술에 잔 생채기를 입어가며 사용법을 배워야 하는 그런 말이었고 그대가 네모난 액정화면 너머에서 몹시 울며 고맙다는 말을 한 글자씩 꾹꾹 새겨넣었음을 나는 안다.
그대의 가장 단단한 엄지손가락으로 흔들리는 빛과 소리와 화면을 붙들어 커서처럼 깜박이는 새벽에 쫓기듯 고맙다는 말을 보내려 애썼다는 것을, 내게..
그리하여 내가 오래 돌아가지 못하고 입술에 하얗게 말린 말들을 물고 헤매던 그 새벽에 그대는 온통 젖은 입술에 불을 붙여 주었다. 나는 그대에게 타고 남은 연기들을 내보내는 법을 가르치려 서둘렀지만 내가 불붙지 않는 입술들을 두려워했음을 그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대는 어둡고 긴 계단들 사이에서 온도가 전해지는 방식을 자꾸 끊기는 전화 사이로 잊혀진 말들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아무리 단단한 방에도 창문을 열기 위한 손잡이가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내 어깨를 잡고 돌려세우지 않고도 그대가 내 오래된 창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음을 나는 수화기 저편의 그대 숨소리가 불어와 닿을 때야 알아차렸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누군가에게 배울 필요가 없었던 어떤 것들을 갖고 있었다. 가끔 그대가 내게 내려놓은 것들만큼 나는 허물어지듯 벽돌 사이로 드러나는 그대를 지켜볼 수 있었다. 다음 시험과 다음 수업과 다음 시간이 다음 하루가 서로에게 내려놓은 무게만큼 기우뚱거릴 때 그대와 나는 고맙다고 말함으로써 머나먼 시소 저편에서 느껴지는 서로의 무게를 끌어안고 견디곤 했다.
자신이 잊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떠넘기듯 말해 버리고 마는 어떤 것들, 누군가 대신 오래동안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길게 줄지은 삶의 무늬들.
그대가 몇 번이나 소매 끝으로 문질러 닦던 유리창 저편의 이야기들.
그런 것은 모두 둥글고 막막한 온갖 탈것들의 바퀴가 온종일 굴러야 닿는 아득한 거리에 있었고 그대는 항상 내게 있었다.
그대가 내게, 그리고 내가 그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