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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_ 앙드레 지드 (4)

김선미 |2008.11.19 06:26
조회 65 |추천 0
7

"알리싸가 정원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4월 말 퐁궤즈마르에 도착하자 삼촌은 친아버지처럼 내게 키스를 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선뜻 뛰어나와 나를 맞아 주지 않아서 처음에는 서운했으나 곧 그녀가 다시 만나게 된 첫 순간의 너절한 인사치레를 우리가 생략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고마왔다.
그녀는 정원 안쪽에 있었다. 때마침 철을 만나 활짝 핀 라일락, 마가목, 금잔화, 웨즐리아 등의 꽃 덩굴로 빽빽이 둘러싸인 그 둥그런 갈림길로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너무 머리서부터 그녀를 보지 않도록, 아니 내가 오는 것을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나는 정원 한쪽의 나뭇가지 밑으로 공기 서늘한 그늘진 오솔길을 따라갔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하늘도 나의 기쁨처럼 산뜻하게 빛나고 아련하게 맑았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다른 쪽 길로 오리라 생각하고 기다렸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 가까이 등뒤에까지 갔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시간마저 나와 함께 멈춘 것 같았다 이 순간이야말로 행복 그 자체보다 앞서 오고, 또 행복 그 자체도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녀 앞에서 무릎을 끓고 싶었다. 나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자 그녀도 이 발걸음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별안간 일어서더니 놓고 있던 그 수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잊어버린 채 내게로 두 팔을 내밀어 내 어깨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얼마동안을 우리는 그렇게 서 있었다. 그녀는 두 팔을 내민 채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갸웃하고 말없이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휜 옷차림이었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경건한 그녀의 얼굴에서 앳된 그 미소를 다시 보았다....
"이것봐, 알리싸."
나는 갑자기 소리쳤다.
"나는 앞으로 열 이틀 동안 방학이야. 하지만 네가 싫다면 단 하루도 더 머무르지 않을 테야. 그러니 내일은 퐁궤즈마르를 떠나야 되리라는 걸 표시해 줄 무슨 신호를 결정하기로 해. 그러면 다음날 아무런 비난이나 불평도 없이 떠날 테야. 알았지?"
미리 준비한 말이 아니어서 한결 수월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저녁 식사하러 내려갈 때 네가 좋아하는 그 자색 수정 십자가를 내가 달고 있지 않은 저녁, 알겠어?"
하고 말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저녁이란 말이지?"
"하지만 눈물도 한숨도 없이 떠나야 해."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겠어. 그 마지막 저녁에도 그 전날 저녁과 다름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질 테야. 아직 알아차리질 못했나 하고 네가 생각할 정도로 말야. 다음날 네가 찾을 때는 나는 이미 없을 거야."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입술로 가져오면서 나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지금부터 그 마지막 밤까지는 어떤 눈치도 보이지 않기로 해."
이제는 이 재회의 엄숙한 분위기로 하여 자칫하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색한 느낌을 씻어 버릴 차례였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정말이지 네 곁에서 지낼 요 며칠이 우리들의 지난날과 꼭 같았으면 좋겠어... 말하자면 우리도 이 며칠이 예외적인 것이라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지. 그리고 처음에는 너무 이야기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면...."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나는 덧붙였다.
"우리가 함께 해볼 만한 일은 없을까?"
전부터 우리는 정원을 가꾸는 데 재미를 붙여 왔다. 아직 익숙지 못한 정원사가 전에 있던 정원사의 뒤를 이어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두 달 동안이나 방치해 두었던 정원에는 할 일이 많았고 장미나무에도 손길이 가지 않아 그 중 싱싱하게 자라나는 것들에는 시든 가지가 잔뜩 뒤얽혀 있었다. 새끼친 가지들이 다른 가지를 시들게 했다. 이 장미나무는 대부분 우리 가 접붙여 놓은 것들이었다. 우리가 손질한 그 장미들을 우리는 잘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것을 돌보느라고 처음 사흘동안은 힘든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서로 이야기할 수 있었고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을 때에도 그 침묵이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우리는 차츰 다시 서로 익숙해졌다. 나는 어떤 설명보다도 이렇게 서로 익숙해져 간다는 데 더욱 기대를 걸었다. 헤어져 있다는 기억마저 이미 우리 사이에서 사라졌고 내가 그녀에게 느끼던 두려움도, 또 그녀가 내게서 두려워하던 마음의 긴장도 차츰 흐려져 가고 있었다. 쓸쓸했던 나의 지난 가을 방문 때보다 한층 앳된 알리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아직도 그녀와 키스해 본 적이 없었다. 저녁마다 나는 그녀 웃옷 위에서 조그마한 자색 수정 십자가가 자그만 금줄에 달려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내 가슴 속에는 또다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희망이라고? 아니, 그것은 차리리 확신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알리싸도 또한 느끼고 있으리라고 나는 짐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을 거의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의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츰 우리의 대화는 대담해져 갔다.
"알리싸."
아름다운 대기가 웃음을 머금고 우리의 가슴이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말했다.
"이제는 줄리에뜨도 행복하게 되었으니 우리도..."
나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너무나 창백해져서 나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시작했다.
"네 곁에서 나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어... 하지만 내 말을 들어 봐, 우리는 행복하려고 태어난 건 아냐."
"그렇다고 영혼이 행복 외에 무엇을 택한단 말이야?"
하고 나는 성급히 소리쳤다.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성스러운 것을...."
그 목소리가 너무도 낮았기 때문에 나는 이 말을 들었다기보다는 그러한 말일 거라고 짐작했다.
내 모든 행복은 날개를 펴고 나를 버린 채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너 없이 나는 그렇게 될 수가 없어."
나는 그녀의 두 무릎에 이마를 파묻고 어린애처럼 울면서 말을 이었다.
"너 없이는 안 돼, 너 없이는 안 돼!"

그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흘러갔다. 그러나 그 저녁, 알리싸는 구 조그마한 자색 수정 십자가를 달지 않고 나타났다. 이튿날 나는 약속한 대로 충분한 새벽녘에 떠났다.
그 다음 날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세익스피어의 시 몇 줄이 인용구로 적혀 있었다.

그 곡을 다시 한번, 꺼질 둣 스러지는 곡이더라.
오오, 오랑캐꽃 핀 언덕 위를 스쳐
내 귀엔 들려 왔다--됐어 그만,
이젠 아까처럼 감미롭지 못해

그래! 아침 내내 나도 모르게 너를 찾았어. 제로옴, 네가 떠났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어.
네가 약속을 지켜 준 것이 원망스러웠어. 나는 이것이 장난이려니 생각했어. 덩굴마다 네가 나타날까 하고 보러 갔어. 하지만 너는 정말 떠나 버렸어. 고마워.
그러고 나서는 온종일 네게 알려 주고 싶은 몇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고 그리고 또 만일 그 생각들을 네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네게 해주어야 할 일을 소홀히 했다는 느낌과, 마땅히 네게 꾸중을 들을 만한 것이라고 장차 생각하게 되리라는 이상하고도 또렷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어.
네가 퐁궤즈마르에 체류한 처음 몇 시간 에 곁에서 느낀 내 온몸과 마음의 그 야릇한 충족감에 놀랐고 그것이 곧 불안해졌어.
'이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을 정도의 충족감!'이라고 너는 내게 말했어. 그런데 내가 불안해 하는 것은 바로 그거야.
내 의도를 잘못 이해할까 두려워. 제로옴, 가장 강렬한 내 심정의 표현을 하나의 까다로운 이론의 전개(오오! 얼마나 어설픈 이론일까)로 생각지나 않을 까 두려워.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닐 거야.'라고 내게 한 말이 생각나? 그때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어. 하지만 아니야. 제로옴, 그것은 우리를 충족시켜 주지 않아. 지난 가을 우리는 이러한 충족감 뒤에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는 가를 깨닫지 못했던가?
오오! 하느님, 그러한 충족감이 진실된 것이 아니도록 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의 다른 행복을 위해서 태어났어.
전에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가 가을의 재회를 슬프게 했듯이 이제 네가 여기 있었다는 추억이 오늘 내가 쓰는 이 편지의 기쁨을 앗아가 버렸어. 언제나 네 곁에서 지낼 때면 느꼈던 그 황홀감이 이제는 어디로 갔나?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 만나고 했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가질 수 있는 그 순수한 기쁨을 우리는 남김없이 고갈시켜 버렸어. 그래서 나는 이제 나도 모르게 '십이야'에 나오는 오시노처럼 부르짖고 있어. '됐어 그만, 이젠 아까처럼 감미롭지 못해.'
잘 있어, 제로옴. '이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노라'. 아아!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너도 알까?
--영원한 너의 알리싸

덕이라 하는 함정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온갖 영웅적인 기본이 나를 현혹하면서 나를 자꾸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기분을 사랑과 분리해서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리싸의 편지는 나를 가장 무모한 열정으로도 도취 시켰다. 내가 좀 더 덕을 쌓으려고 한 것도 단지 알리싸만을 위해서였다. 어쩐 길도 위로 올라가는 길이라면 그것은 나를 알리싸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것 같았다.
아아! 대지가 제 아무리 갑작스럽게 좁나진다 하더라도 단지 우리 둘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넓다고 생각될 것이었다. 아아! 나는 아직도 그녀의 미묘한 가장을 간파하지 못했으며 또 이변에도 이제 겨우 올라간 상상봉에서 그녀가 나를 두고 다시 도망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긴 답장을 썼다. 나는 그 중에서도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케 할 수 있는 단지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사랑은 내가 지니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 돼. 내 모든 덕행이 거기에 딸려 있고, 사랑이야말로 나를 나 이상의 위치로 끌어올려 주는 것같이 생각 돼. 또 만일 사랑이 없다면 난 대부분 평범한 인간들이 차지하는 보통의 높이로 다시 떨어져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애. 너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가장 험준한 길도 내겐 언제나 좋은 길이라 생각돼.

이 편지에 나는 또 무슨 망을 덧붙였는지 그녀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하지만 제로옴, 성스럽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야(편지에는 이 의무란 단어 밑에 줄이 셋이나 그어져 있었다). 만일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와 다름이 없는 사람이마면 너도 역시 이것을 피하지는 못할 거야.

그것 뿐이었다. 우리의 편지 왕래는 이것으로 끝났고 아무리 교묘한 충고나 굳건한 의지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리라 하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기보다도 오히려 예감했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애정에 넘치는 긴 편지를 썼다. 세 번째 편지를 부친 뒤에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제로옴
내가 네게 편지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생각지는 말아. 다만 마음이 내키지 않을 뿐이야. 네 편지는 여전히 나를 즐겁게 해주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네가 나를 생각하도록 만든 데 대해서 나는 점점 더 나 자신을 꾸짖고 있어.
이젠 여름도 멀지 않았어. 당분간은 편지를 쓰지 않기로 하고, 9월 하순의 두 주일을 퐁궤즈마르에 와서 함께 보내 줄, 수 없겠어? 승낙한다면 답장은 필요 없어, 그것을 승낙의 표시로 알 테니까? 회답이 없기를 바래.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이 침묵이야말로 그녀가 나에게 부과한 마지막 시련이었음에 틀림없다. 몇 달 동안의 공부와 몇 주일의 여행을 마치고 퐁궤즈마르에 왔을 때 나의 마음은 지극히 안정되어 있었다.

이 짧은 이야기로써 처음에는 나 자신도 이해 못했던 일을 어떻게
독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 후 나를 여지없이 절망 속으로 밀어넣은 그 슬픈 사건 이 외에 무엇을 내가 여기에 적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에 와서는 그 가장 부자연스러워 보이던 가면 밑에서 아직도 사랑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 것을 통탄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 가면밖에 보이지를 않아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을 만큼 그녀가 변한 것을 보고 비난하지는 않았어, 알리싸. 단지 지난 그녀가 변한 것을 보고 비난하지는 않았어 알리싸, 단지 지난날의 너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어 절망에 울었을 따름이야. 너의 애정이 지니고 있었던 침묵의 술책이나 잔인한 기교 등에 의하여 네가 품었던 사랑의 힘을 잴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 나는 너로부터 잔인하게 설움을 받으면서도 그로 인해 더욱 너를 사랑해야 할 것인가? 경멸? 냉정? 아니, 이겨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마주 서 싸울
아무런 대상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가끔 주저했고 내 불행도 내가 꾸며낸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보기도 했다. 그처럼 내 불행의 원인은 미묘했고 그토록 알리싸는 모르는 척 했던 것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한탄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 어느 때보다도 그녀는 애교 있게 나를 대해 주었다. 그녀가 그토록 친절하고 상냥해 보이기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속아넘어갔다. 전과 달리 납작하게 졸라맨 머리 매무새로 인해 표정까지 달라질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딱딱해 보였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었으랴!
거친 촉감을 주는 검은 색의 어울리지 않는 웃옷으로 말미암아 그 아름다운 몸의 곡선이 손상되었기로 그것이 무슨 상관이었으랴. 그것 스스로 혹은 내가 부탁한다면 그녀는 고치리라고 나는 어리석게도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친절하고 상냥한 마음씨가 슬펐다. 그러한 일은 우리 사이에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서 충동보다는 오히려 결심을, 또 말하기는 거북하지만 사람보다는 오히려 예의를 발견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저녁 때 응접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피아노가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실망한 소리로 묻자,
"수선하러 보냈어."
하고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알리싸가 대답했다.
"글쎄 몇 번이나 내가 말하지 않았니?"
삼촌은 거의 엄하다고 할 만한 꾸지람조로 말했다.
"기왕 고치러 보냈더라면 좋지 않았겠니. 네가 서둘렀기 때문에 커다란 즐거움을 하나 잃었어...."
"하지만 아버지."
알리싸는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요새는 빈소리만 나서 제로옴 역시 아무 곡도 치지 못했을 거예요."
"네가 치는 것을 들었을 땐 그렇게 고장난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하고 삼촌이 말했다.
그녀는 얼마 동안 그늘진 쪽으로 몸을 굽힌 채 안락의자의 덮개 치수를 재는 데 몰두하는 듯 말이 없다가 이윽고 방에서 나가더니 한참만에야 삼촌이 저녁마다 드는 탕약을 쟁반에 받쳐들고 돌아왔다.
다음날도 그녀는 그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을 바꾸지 않았다. 집 앞에 내놓은 벤치에서 앉아 그녀는 전날 저녁부터 손에서 떼지 않던,
바느질이라기보다는 꿰매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자기 옆의 벤치였는지 혹은 탁자 위엔지 낡은 양말이 가득든 바구니를 놓고 그 속에서 줄곧 일거리를 꺼내는 것이었다. 며칠 뒤에는 냅킨과 홑이불을 만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에 그녀는 완전히 몰두해 있는 것 같았고 이로 인해 입술은 표정을 잃었고 눈에는 광채가 없었다.
"알리싸!"
어느 날 저녁 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멋없게 변한 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쳤다. 그녀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변해 버렸고 내가 조금 전부터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았으나 내 눈길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그래?"
그녀는 머리를 들며 말했다.
"내 말이 들리는지 알아 보고 싶었어. 네가 하고 있는 생각이 내게서 멀리 가 있는 것 같아서."
"아니야, 난 여기 있어. 하지만 여간 조심을 하지 않고는 꿰매질 못해."
"바느질하는 동안에 책을 읽어 줄까?"
"잘 들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왜 그렇게 신경 쓰이는 일을 하지?"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해야 돼."
"이런 일로 하루하루 벌어 사는 여자들이 많지 않아. 절약을 하려고 이런 보람 없는 일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대뜸 그 일이 어떤 일보다 더 재미가 있으며 벌써 오래 전부터 다른 일은 하지 않아 다른 일에는 서툴러져 버렸다고 단언하는 것이었다. 말을 하면서 그녀는 줄곧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음성이 그 순간보다 더 부드러웠던 적은 없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없이 서글펐다 그녀의 표정은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슬퍼하지?'라고 말하는 듯 싶었다.
그리하여 내 마음 속의 모든 항의는 입술에까지 올라오기도 전에 목에서 막혀 버렸다.

그로부터 이틀 뒤 둘이서 장미꽃을 꺾고 나자 그녀는 나에게 그 해에는 아직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던 자기 방으로 꺾은 꽃을 옮겨 달라고 했다. 나는 얼마나 희망에 부풀었던가! 나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해서는 안된다고 다시 한번 마음 먹었다. 그녀의 말 한 마디로 내 마음은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방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감격에 사로잡히곤 했다. 거기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아늑한 고요함이 감돌아 알리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창과 침대 둘레에 친 커튼의 푸른 그늘, 반들반들한 마호가니 가구들, 정돈되고 정결하고 조용한 방안 분위기가 그녀의 티없는 순결함과 사색적인 우아로움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그녀의 침대 곁 벽에 내가 전에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두 개의 커다란 마사치오 의 사진이 걸려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어떻게 됐느냐고 물으려던 찰나에 내 시선은 바로 그 옆, 그녀가 애독하는 책들을 얹어 주는 선반 위로 갔다.
이 조그마한 장서는 절반은 내가 준 책과 또 절반 은 우리가 같이 읽은 책으로 오랜 간을 두고 꾸며졌던 것이다.
나는 그 책들이 모두 없어지고 재신 그녀가 경멸해 주었으면 싶던 저속한 신앙에 관한 너절한 작은 책자들만이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눈을 드니 알리싸는 웃고 있었다. 그렇다, 알리싸는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미안해."
하고 그녀는 곧 말했다.
"네 표정을 보고 웃었어. 내 장서를 보며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길래...."
나는 농담할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아니, 알리싸, 정말로 요즘은 저런 책을 읽고 있어?"
"응, 이상해?"
"자양이 많은 양식에 익숙해 온 지성은 이런 무미 건조한 것을 맛보면 구역질이 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슨 소리지?"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건 모두 경건한 사람들로서 열심히 자기들이 생각하는 바를 설명하고, 나와 솔직히 이야기해 주는 사람들이야.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퍽 좋아. 처음부터 이 사림들은 미사 여구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았으며, 나 또한 이 사람들의 쓴 것을 읽으면서 세속적인 찬양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래 이제는 이런 것밖에는 읽지 않아?"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래, 몇 달 전부터는. 게다가 이제는 독서할 시간도 별로 없어. 사실은 아주 최근에도 네가 전에 감탄할 만하다고 가르쳐 주려고 해보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제 키를 한 자 늘여 보려고 애를 쓴 사나이와 같은 결과가 되어 버렸어."
"네게 그런 이상한 생각을 일으키게 한 그 '위대한 작자'란 누구야?"
"그 작자가 내게 그런 생각을 일으키게 한 건 아니야. 단지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렇게 생각했을 따름이야, 빠스깔이야. 아마도 벌로 좋지 않은 구절을 읽었던 모양이야..."
나는 초조한 몸짓을 했다. 그녀는 아직 손질하지 않은 꽃다발에서 눈을 들지도 않은 채 마치 교과서나 암송하듯이 맑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몸짓에 잠시 말을 끊더니 같은 어조로 계속했다. "그와 같은 호언 장담이나 열성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어. 하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거의 없어. 빠스깔의 그 비상한 어조가 신앙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회의의 결과가 아닌가 하고 나는 가끔 생각했어. 완전한 신앙이란 그처럼 눈물을 흘린다거나 목소리를 떠는 법이 없으니까."
"빠스깔의 음성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떨림, 그 눈물에 있는 거야."
라고 나는 반박을 하려 했으나 용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 속에는 내가 알리싸에게서 귀히 여기던 것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의 대화를 고치거나 논리적인 것으로 다듬지 않고 그대로 여기에 옮긴다.
"만일 그가 현세의 생활에서 먼저 즐거움을 제거해 버리지 않았더라면."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현세의 생활을 저울에 달아본다면 아마도...."
"어떻단 말이야?"
나는 그녀의 이상한 이야기에 놀라 물었다.
"그가 풀이하는 막연한 행복보다 더 무거울지 몰라."
"그렇다면 그 행복을 믿지 않아?"
하고 나는 소리쳤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거래같이 이해타산이 있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행복은 차라리 막연한 편이 좋겠어. 하느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덕행에 몸을 바치는 것은 무슨 보수를 바라서가 아니라 타고난 고귀한 마음씨 때문이 아니겠어?"
"바로 거기에서 저 빠스깔과 같은 고귀한 마음의 피난처인 그 비밀의 회의주의가 나온 거야."
"회의주의가 아니지, 장세니즘이야."
하고 그녀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여기 이 불쌍한 사람들은--하고 그녀는 자기 책을 돌아보았다.--자기들이 장세니스트인지 또는 다른 그 무엇인지 대답하라고 하면 퍽 당황해 할 거야. 이들은 마치 바람에 불리는 풀잎처럼 당황해 할 거야. 이들은 마치 바람에 불리는 풀잎처럼 아무런 악의도 괴로움도 또 아름다움을 보이려는 마음도 없이 그저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있는 거야. 자기들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 생각하면서, 단지 자기들에게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들 스스로의 모습을 지워 버림으로써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알리싸."
하고 나는 소리쳤다.
"왜 너는 너의 날개를 떼어 버리려는 거야?"
그녀의 음성이 너무나 잔잔하고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그만큼 내 고함 소리는 우스울 정도로 과장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빠스깔을 읽고 얻은 것은...."
"뭐야?"
그녀가 말을 중단했기 때문에 내가 물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야. '생명을 구하려고 애쓰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다.' 그 나머지 것은...."
그녀는 한층 더 환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사실은 잘 모르겠어. 이 조그마한 사람들과 얼마 동안 살고 있다가 위대한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에 접하게 되면 당장 숨이 가빠져서."
당황해 버린 나는 대답할 말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만일 오늘이라도 너도 함께 이 설교집과 명상록을 읽어야 한다면 나는...."
"하지만."
하고 그녀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네가 이런 걸 읽은 것을 보면 나는 서글퍼질 거야! 나는 네가 이런
것보다는 훨씬 훌륭한 것을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해."
그녀는 지극히 간결한 어조로 또 이처럼 자기와 나의 생을 분리시키는 이러한 말이 나를 얼마나 슬프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염두에도 없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의 머리는 확확 달아 올랐다. 나는 좀 더 이야기하고 그리고 울고 싶었다. 만일 그녀가 내 눈물을 보았더라면 굴북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벽난로 위에 팔꿈치를 짚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괴로움을 보지 못했는지 혹은 보고도 못본 체하는지 계속해서 꽃만 매만지고 있었다. 이때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이러다간 점심 먹을 채비를 못하겠네."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서 가 줘."
그러고 나서 무슨 장난 이야기나 하듯 말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해."
그 이야기는 다시 계속되지 않았다.
늘 나와는 엇갈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나를 피해서가 아니라 단지 뜻하지 않았던 일이 훨씬 더 급박하고도 중요하게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나의 이 차례라 하는 것은 그 끊임없이 생겨나는 집안 일이라든가 꼭 해야 될 곳간 일의 감독이라든가, 소작인들이나 또는 그때 그녀가 점점 더 열중하게 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방문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일이 다 끝난 뒤에야 돌아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 나머지 시간, 극히 짧은 시간밖에는 차례가 오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분주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또 나 자신 그녀 뒤를 따라다니기를 단념했기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나를 소홀히 하고 있는가 하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해보아도 그러한 느낌은 더욱 절실해졌다. 알리싸와
잠시나마 이야기를 하게 될 경우에도 그것은 어설픈 대화에 지나지 않았고 어린애 장난을 시중들어 주는 것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막연히 미소를 지으며 내 곁을 재빨리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 어느 때보다도 내게서 멀리 떠나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미소에는 가끔 멸시에 가까운 표정, 어딘가 비꼬는 듯한 표정이 섞여 있는 것 같았고 또 그렇게 내 욕망을 피하는 데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 나무람을 받을 짓을 하고 싶지 않고 또 내가 무엇을 그녀에게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될 뿐 아니라 무엇을 그녀에게 비난해야 할지도 몰라 나는 마침내 모든 불만을 내 자신에게로 돌려 버렸다.

그처럼 크나큰 행복을 기대했던 며칠이 이렇게 흘러가 버렸다. 나는 날이 흘러가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날짜를 늘여 보고 싶지도 않았고 시간의 흐름을 늦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토록 나의 고통은 하루하루 커가기만 했다.
그러나 내가 떠나기 이틀 전 알리싸가 나를 따라 폐광이 된 이회암 채굴터 근처에 있는 그 벤치에 함께 갔을 때, 안개가 끼지 않아 지평선 끝까지 모든 것이 하나하나 파랗게 물들어 있었고, 지나간 날의 가장 어렴풋한 추억마저 뚜렷이 생각나는 그러한 어느 맑은 가을 저녁이었다. 나는 참다 못해 어떤 행복을 잃었기에 지금 난 이다지도 불행하게 되었나 하는 것을 말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하고 그녀는 곧 대답했다.
"지금 너는 어떤 환영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는 거야."
"아니야, 환영이 아니야, 알리싸."
"마음 속에 그리는 어떤 영상과...."
"아아! 난 그런 걸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아니야. 알리싸는 정말 나의
여인이었어. 나는 지금 옛날의 그 알리싸를 부르고 있어. 알리싸! 너는 내가 사랑하던 여자였어. 그때의 너를 너는 지금 어떻게 해버렸지? 어떻게 해버렸어?"
그녀는 잠시 동안 말없이 천천히 꽃 산 송이를 꺾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로옴, 왜 그전보다도 나를 덜 사랑한다고 솔직히 말하지 못해?"
"왜냐구? 그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건 정말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야."
나는 분노에 차 소리쳤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널 사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야."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옛날의 나를 그리워하고!"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하면서 또 어깨를 약간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나는 내 사랑을 과거에 붙여 둘 수는 없어."
땅이 내 발밑에서 꺼지는 듯싶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에고 잡히는 대로 매달렸다.
"사랑도 모든 다른 것도 함께 흘러가 버리는 거야."
"내 사랑은 내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거야."
"그것도 차츰 기울어 갈 거야. 네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알리싸는 이젠 단지 너의 추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야. 그녀를 사랑한 적도 있었지, 하고 네가 단순히 추억에 잠길 날이 올 거야."
"너는 마치 다른 무엇이 내 마음 속에서 알리싸에 대치될 수 있거나 또는 애 마음이 이제 더 사랑을 해서는 안된다는 투로 말하고 있어. 너 자신 나를 사랑해 왔다는 것은 다 잊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괴롭히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듯이 보일 수가 있어?"
나는 파랗게 질린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냐, 아냐. 알리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아?"
나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더욱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데, 왜 못하지?"
"무슨 말을?"
"나는 나이가 많아."
"쓸데없는 소리."
나는 그 당장 나도 또한 그녀만큼 나이를 더 먹었으며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언제나 다름이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유일한 기회는 이렇게 해서 지나가 버렸다. 나는 말다툼에 끌려들어감으로써 모든 유리한 점을 포기한 폭이 됐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녀와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을 품고 또 그때까지 내가 '덕'이라고 부르던 것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과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그 집념에 대한 울화에 가득 찬 채 퐁궤즈마르를 떠났다. 이 마지막 해후에서 내 사랑을 너무 과장했던 나마지 나는 모든 열정을 소비해 버린 것 같았다. 처음 내가 항변해 보려던 알리싸의 말 한 마디가 내 항변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의기 양양하게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녀의 말이 맞을 거야, 난 이제까지 환영만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사랑했었고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알리싸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거야... 그래! 우리는 나이가 든 거야! 내 마음을 얼어붙게 한 그녀의 멋없는 변모도 결국은 자연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는 거야.
내가 그녀를 조금씩 조금씩 높여 갔고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것으로 그녀를 장식하면서 그녀를 마음속에서 우상화했다고 한들 그러한 내 노력에서 지금 피로 외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저 혼자 있게 되자마자 알리싸는 자기의 수준, 그 평범한 수준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내려가 버리자 나는 사랑할 기분이 내키지 않게 되었다. 아아!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그녀를 올려 놓았던 그 높은 곳에서 다시 그녀와 함께 있으려던 그 덕행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도 이제는 얼마나 어리석고 터무니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인가! 조금만 긍지가 덜했던들 우리의 사랑은 순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상이 없이는 사랑에의 집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고집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충실한 것도 아니다. 충실하다면 그것은 과오에 대해서 충실할 뿐이다.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자인하는 것이 가정 현명한 일이 아닐까?
그러던 때에 아테네 학원에 추천을 받아 나는 별다른 야망도 흥미도 없이 다만 떠난다는 생각에서, 달아나 버리기나 하는 것처럼 즐거워서 입학을 하기로 했다.
@ff
8

그런대로 나는 다시 한번 알리싸를 만났다. 그것은 3년 후 여름도 끝날 무렵이었다. 열 달 전에 나는 그녀의 편지로 삼촌이 별세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던 팔레스티나에서 꽤 긴 답장을 부쳤지만 종내 회답이 없었다.
르아브르에 있던 내가 어떤 구실로 자연스럽게 퐁궤즈마르에까지 가게 되었던 것인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알리싸가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홀로 있지 않으면 어쩔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그곳에 갈 것이라고 예고도 하지 않았다. 여느 때 방문하는 것처럼 찾아가는 것이 싫어서 나는 이렇다 할 생각 없이 걸어갔다. 들어가 볼 것인가?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단지 홀로 그 가로수 길을 거닐다가 혹시 지금도 가끔 그녀가 와서 앉을지도 모를 벤치 위에서 앉아 보자...그리고 나는 내가 가버린 후에 내가 다녀갔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리려면 어떤 표시를 남겨야 할 것인가 하는 것까지 궁리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걸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기로 결심을 하자 내 마음을 졸라매고 있던 쓰라린 슬픔은 거의 감미로운 애수로 바뀌었다. 나는 벌써 가로수가 있는 길까지 이르렀다. 나는 들키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농가의 안마당을 구분하고 있는 둑을 따라 길가를 걸었다. 나는 이 둑의 한 지점에서 올라갔다. 낯선 정원사가 오솔길에서 제초 작업을 하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새로 세워진 울타리가 안쪽을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발자국소리를 듣고 개가 짖었다. 좀 더 나아가 가로수길이 끝나는 곳엣 나는 흙담이 있는 바른편으로 돌았다. 그러고는 이제 막 걸어온 길과는 병행되는 너도밤나무 숲이 있는 곳을 향해 채소밭의 그 비밀 문 앞을 지나갔다. 그때 문득 이 문을 통해 정원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안의 빗장이 퍽 약해서 나는 어깨로 밀어 부술까 하고 생각했다. 바로 이때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담이 움푹 들어간 곳에 몸을 숨겼다.
정원에서 나오는 것이 누구인지 나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발자국소리를 듣고 그것이 알리싸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몇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가냘픈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제로옴이야?...."
심하게 고동을 치던 내 심상이 딱 멈추었다. 그러고는 막혀 버린 나의 목에서 단 한 마디 말도 나오지 못하는 동안 그녀는 좀 더 힘을 주어 되풀이해 불렀다.
"제로옴, 너지?"
그녀가 나를 이렇게 부르는 소리를 듣자 나는 너무도 벅찬 감동에 못이겨 무릎을 끊고 앉았다. 여전히 내가 대답을 못하자 알리싸는 몇 걸음 걸어나와 담을 돌았다. 그러자 나는 내 몸에 알리싸를 느꼈다. 그녀는 당장에 보기가 두려운 듯이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내게로 몸을 굽히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녀의 그 가냘픈 두 손에 마구 입술을 갖다댔다.
"왜 숨었지?"
그녀는 헤어져 있던 3년간이 불과 며칠 동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나인 줄 알았어?"
"기다리고 있었어."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는 너무나도 놀라서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풀이할
뿐이었다. 내가 여전히 무릎을 끓고 있자니까,
"벤치로 가자."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 나는 다시 한번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사흘 전부터 나는 저녁마다 이곳에 와서 오늘처럼 너를 불렀어. 왜 대답을 하지 않았지?"
"네가 그렇게 갑자기 오지 않았던들 난 너를 보지 못하고 떠났을 거야."
나는 기절할 뻔했던 감동을 억누르면서 처음 말했다.
"마침 르아브르를 지나던 길이라 저 가로수 길을 좀 거닐어 보고 정원 주변도 돌아보고, 요즘도 네가 와서 앉을 듯 싶은 이회암 채굴터에 있는 그 벤치에서 잠시 쉬어볼까 했을 따름이야. 그러고는...."
"사흘 전부터 저녁마다 이곳에 와서 내가 무엇을 읽었나 좀 봐."
그녀는 내 말을 막으면서 한 다발의 편지를 내밀었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보낸 편지들이었다. 이때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야위고 파리해진 그녀의 모습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내 팔에 기대 의지해 있으면서도 그녀는 춥거나 혹은 겁에 질린 듯 내게 바짝 붙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복상 중이었다. 모자 대신 머리에 쓰고 있던 검은 베일이 그녀의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금시 기절할 것 같았다.
나는 요즈음 퐁궤즈마르에 그녀 혼자 있는지의 여부가 궁금해 물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로베르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8월에는 줄리에뜨와 에뜨와르, 그리고 그들의 세 아이가 와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내고 갔다고도 했다. 우리는 벤치까지 왔다. 우리는 앉았다. 그러나 얼마 동안 우리의 대화는 여전히 진부한 소식을 묻는 정도였다.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 이제는 내가 일에 대한 흥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그녀가 깨달아 주었으면 싶었다.
그녀가 전에 나를 실망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보였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원한과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 차서 될 수 있는 대로 쌀쌀하게 아야기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때때로 용솟음쳐 올라오는 감동에 목소리가 떨려나와 스스로도 원망스러웠다.
얼마 전부터 한 조각 구름에 가리어 있던 석양이 우리 맞은편 지평선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는 턴 빈 들판을 떨리는 낙조로 가득 채우고 우리 발 밑에 펼쳐 있는 좁은 골짜기를 느닷없이 붉은 빛으로 뒤덮더니 이윽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황홀해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 빛나는 도취경이 다시 한번 나를 휘감고 나의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끼자 원망의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마음 속에서는 사랑의 속삭임만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몸을 굽혀 내게 기대고 있던 알리싸가 일어섰다. 그녀가 웃옷 속에서 보드라운 종이에 싼 조그마한 물건을 꺼내 내게 내밀려다가 망설이듯 멈추어 버리는 것을 의아해서 바라보자.
"자, 제로옴, 이건 나의 자색 수정 십자가야. 오래 전부터 네게 주고 싶었어. 사흘 전서부터 저녁마다 이렇게 가지고 왔어."
"그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나는 아주 투명스럽게 물었다.
"나에 대한 추억으로 이걸 간직했다가 너의 딸에게 주어."
"딸이라니?"
무슨 말인지 깨닫지를 못해 나는 알리싸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조용히 내 말을 잘 들어줘, 부탁이야. 아니,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 그렇지 않아도 말하기가 힘들어. 하지만 이것은 꼭 이야기하고 싶어. 이것 봐, 제로옴, 언젠가는 결혼할 것 아냐? 아니, 대답하지 말아. 말을 막지 말아 줘. 부탁이야. 나는 단지 내가 너를 퍽 사랑했다는 것을 네가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그리고...벌써 오래 전부터, 3년 전부터...네가 좋아하던 이 조그마한 십자가를 너의 딸이 어느 날 누가 준 것인지도 모르면서 나의 기념으로 달아줄 날이 올 것을 생각해 보았어... 그리고 어쩌면 그 애에게... 내 이름을 붙여 줄 수도 있으리라고...."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끊었다. 나는 적의에 찬 어조로 소리쳤다.
"왜 네가 직접 주지 않고?"
그녀는 말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의 입술은 마치 흐느껴 우는 어린애의 입술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눈길은 얼굴을 초인간적이며 천사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알리싸! 내가 누구와 결혼을 하겠어? 내가 너밖에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아...."
그리고는 갑자기 미친 듯이 난폭하게 그녀를 껴안으면서 나는 마고 키스를 했다. 얼마동안 나는 거의 뒤로 몸을 젖힌 채, 온몸을 내맡긴 듯한 그녀를 꼭 껴안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길이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눈시울이 닫혀지며 비길 데 없을이만큼 뚜렷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 서로를 불쌍히 여겨 줘, 제로옴. 우리의 사랑에 상처를 주지 마."
아마 그때도 그녀는 말했을 것이다.
"비겁한 짓은 하지 말아."
혹은 이것은 내 자신 스스로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갑자기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녀를 두 팔로 감싸면서 말했다.
"그렇게도 나를 사랑했다면 어째서 항상 나를 밀어냈어? 이것 봐! 처음에 나는 줄리에뜨의 결혼을 기다렸어. 너도 또한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녀는 이제 행복해. 이건 너 자신이 네게 한 이야기야. 오랫동안 나는 네가 아버지를 모시고 계속 그 곁에서 지내길 바란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우리 단 둘 뿐 아냐?"
"오오! 지난 일엔 마음을 쓰지 않기로 해."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제는 이미 페이지를 넘기고 난 뒤야."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어, 알리싸!"
"아니야 제로옴, 이제는 늦었어. 사랑을 통해 우리가 서로를 위해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을 엿보게 되었을 때부터 때는 이미 늦었던 거야. 네 덕택으로 내 꿈은 그처럼 높이높이 올라갔고 따라서 이지는 인간 세상의 어떤 충족감도 그것을 손상시키진 못할 것일까 하고 나는 종종 생각해 봤어. 우리의 사랑이 완전치 못한 순간부터 나는 우리의 사랑을 지탱해 낼 수가 없을 것 같았어."
"서로가 떨어져 살 때 우리의 삶이 어떠한 것일까 생각해 봤어?"
"아니! 전혀."
"이젠 알겠지! 나는 3년 전부터 테가 없어 쓰라린 마음으로 헤매다녔어...."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추워."
그녀는 일어서더니 내가 팔을 다시 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쇼올을 바싹 죄어서 몸을 감싸면서 말했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또 우리가 잘못 이해하지나 않았나 걱정하던 이 성경 구절이 생각날 거야,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말을 항상 믿고 있어?"
우리는 잠시 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더욱 좋은 것, 그것을 상상학 수 있어, 제로옴?"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솟아오르는 채 그녀는 여전히 '그 더욱 좋은 것!'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금 전에 그녀가 나왔던 채소밭의 비밀문 앞에 이르렀다. 그녀는 나를 돌아다보며,
"안녕."
하고 말했다.
"아니야, 더 오지 마. 안녕, 사랑하는 나의 벗, 이제부터 시작되는 거야, 더 좋은 것이."
그녀는 팔을 뻗쳐 내 어깨 위에 두 손을 얹고 형언할 수 없는 사랑에 가득 찬 눈으로 붙드는 듯 혹은 가라는 듯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고 그 위로 빗장 지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참을 수 없이
복받치는 절망에 사로잡혀 그 문에 기잰 채 쓰러졌다. 그리고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울고 흐느꼈다.
그러나 그녀를 붙잡았더라면, 그 문을 밀치고 들어갔더라면. 어떻게든지 해서--하긴 내가 못 들어가도록 잠겨 있지도 않았겠지만--집안으로 들어갔더라면. 하지만 아니가. 지금에 와서 이 모든 과거를
훑어보아도...아니다.
그것은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나의 심정을 모르는 사람은 그때의 내 심정도 몰랐을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나는 며칠 뒤 줄리에뜨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퐁궤즈마르에 갔었다는 것, 알리싸의 창백하고 여윈 모습에 놀랐다는 것을 썼다. 알리싸의 건강에 주의해 달라는 부탁과 알리싸 자신에게서는 이제 편지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녀 대신 가끔 소식이나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후 한 달도 채 못되어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제로옴
너무나도 슬픈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우리의 가엾은 알리싸는 이미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아아! 오빠가 편지 속에서 걱정을 한 것도 다 근거가 있는 일이었군요. 몇 달 전부터 언니는 확실한 병 증세도 없이 점점 쇠약해 졌어요. 그래 언니는 애 애걸에 못이겨 르아브르의 A 의사의 진찰을 받기도 했어요. 그 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걱정할 게 없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러나 오빠가 다녀가신 뒤 사흘 만에 언니는 갑자기 퐁궤즈마르를 떠났습니다. 그것도 로베르의 편지를 받고서야 알았습니다. 언니가 편지를 하는 일은 극히 드물어서 로베르가 아니었던들 그런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언니한테서 소식이 없다고 걱정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언니를 그대로 떠나도록 내버려 둔 것과 도 빠리까지 따라가지 않은데 대해 나는 로베르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그 뒤에는 언니의 주소조차 모르게 되었답니다. 언니를 볼 수도 없고 편지도 낼 수가 없으니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며칠 뒤에 로베르가 빠리에 갔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를 못했습니다. 어찌나 게으른지 그의 성의를 의심할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경찰에 알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뜨와르가 가서 언니가 숨어 있던 작은 요양원을 찾아냈어요. 아아! 그러나 이미 늦었어요. 언니의 죽음을 알리는 원장의 편지와 언니를 다시 보지도 못한 에뜨와르의 전보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마지막 날 언니는 우리가 통지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장의 봉투 위에 우리의 주소를 적어 놓았습니다. 다른 한 장의 봉투에는 르아브르의 우리 공증인에게 보낸 유언장 사본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편지의 한 부분은 오빠에 관한 것인 듯 생각됩니다. 근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저께 치른 장례식에는 에뜨와르와 로베르가 참석했습니다. 상여를 따라간 것은 그 둘만이 아니었습니다. 요양원 환자 몇 사람이 자진하여 식에 참석했고 묘까지 상여를 따라갔습니다. 나는 다섯째 아이의 출산이 오늘 내일 해서 섭섭하게도 집을 나서지 못했습니다.
오빠, 언니의 죽음이 얼마나 오빠를 슬프게 할 것인가를 알고 있어요. 편지를 쓰는데도 퍽 힘이 드는군요. 하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에뜨와르나 로베르조차도 우리 둘만이 이해할 수 있었던 알리싸에 관한 이야기를 맡기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제는 나이 먹은 가정 주부 가 됐고 쌓이고 쌓인 잿더미가 뜨겁게 불타오르던 과거를 뒤덮어 버린 지금, 오빠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해도 되겠지요. 어느 날이고 볼일이 있거나 혹은 마음이 내키셔서 님므에 오시게 되거든 에그비이브에 들러 주세요. 에뜨와르도 오빠를 만나게 되면 퍽 기뻐할 거고 우리 둘이 알리싸 이야기도 할 수 있겠죠.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오빠. 서글픈 마음으로 키스를 보내 드립니다.

며칠 뒤 나는 알리싸가 퐁궤즈마르를 로베르에게 남겨 주었으나 자기 방에 있던 모든 물건과 몇 개의 가구만은 줄리에뜨에게 보내도록 부탁했다는 것을 알았다. 알리싸가 내 이름을 적어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방문했을 때 내가 받기를 거절했던 그 조그만 자색 수정 십자가를 알리싸가 자기 목에 달아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렇게 했다는 것도 나는 에뜨와르를 통해 알았다.
공증인이 내게 발송해 온 봉함 봉투에는 알리싸의 일기가 들어 있었다. 그 중 여러 부분을 나는 이곳에 옮겨 보겠다. 아무런 설명도 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옮길 생각이다. 이 일기를 읽으면서 내가 여러 가지로 반성해 본 점, 그리고 붓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심적인 혼란을 여러분은 충분히 짐작해 주시리라 믿는다.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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