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나는 오토바이의 질주를 즐긴다.
내가 즐기는 질주는 다른 이에게 위협을 가하는 폭주가 아니라 혼자만의 레저스포츠인 셈이다.
질주의 코스는 한갓진 도로를 중심으로 몇 군데 정해져 있는데 되도록 차량이 밀리는 주말은 피한다.
가장 자주 가게 되는 첫 번째 코스는 시흥에서 소래와 시화방조제를 지나 제부도까지, 두 번째 코스는 국제선이 영종도로 이사한 후 도로가 조금 한산해진 김포에서 강화도까지, 이번에 새로 발견한 마지막 코스는 영종도에서 무의도의 선착장까지다.
모두 내가 사는 부천 소사동에서 왕복 네다섯 시간 남짓 걸리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또한 경춘 국도를 무리 지어 달리는 배기량 높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허리 잘록한 은빛의 1000cc에 속도감을 즐기는 데는 충분하다.
번쩍번쩍 윤이 나도록 오토바이를 닦은 오늘은 첫 번째 코스로 나선다.
길을 떠날 준비는 간단하다.
자그마한 생수 한 병을 챙기면 먹을거리는 그만이다. 바닷바람을 맛보기 위해 헬멧 대신 잠시 쓸 선글라스는 건빵바지의 호주머니에 넣는다.
빨간 스포츠 장갑을 여미어 끼고 빛가림한 헬멧을 깊이 눌러쓴 다음 턱 끈을 단단히 조이고 나서 질주의 시동을 건다.
공단오거리에서 시흥 입구까지는 시도 때도 없는 막힘 구간이다.
본격적으로 바람을 가르기 전에는 신호등이 바뀌어도 좀처럼 움직일 줄 모르는 개미행렬의 차량을 만나게 된다.
시내를 벗어나기 전이야 당연한 일이겠으나 간혹 제부도의 주말 길을 나섰다가 돌아올 때면, 미동도 없이 수 킬로 늘어선 차량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거나 한숨을 내쉬며 서성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것은 차량 운전자의 사정일 뿐 오토바이를 탄 내게 머뭇거리는 시간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룰을 지키면서도 수백 대의 차량을 물리치며 갓길 아닌 갓길을 통해 야릇한 쾌감을 맛보며 부드럽게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아스라이 오른 삶의 능선까지 나는 누군가를 앞질러본 일은 물론 이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본 일조차 없다. 출발은 언제나 남들보다 두어 템포가 느려 결국 내 삶의 여정도 상습 막힘 구간이 된 지 오래다.
그런 나에게 여분의 갓길이 어찌 존재하랴.
비좁은 길일망정 쉼 없이 빠져나가는 나를 부러운 듯 쳐다보는 ‘정지된 차량’이 사실은 내 실상이요, 나비처럼 사뿐히 틈새를 날고 있는 것은 허상임에도 현실인 양 꿈인 양 자위하는 쾌감일 뿐이다.
모든 차량의 일상적인 질주가 시작되면 나는 허상에서 깨어나 요란한 경적과 번쩍이는 헤드라이트 불빛의 위협을 받으며 무참히 세상 한쪽으로 밀쳐지게 될
것이다.
질주의 시발점에 이르면 긴장이 되면서도 마음이
설렌다.
편도 4차선의 시흥에서 소래로 이어지는 차량 뜸한 국도, 가장 안전하게 느껴지는 3차선을 택한다.
서서히 속력을 높이자 탄력 받은 엔진이 민감하게 속도계의 바늘을 끌어올린다.
속도가 300킬로를 향해의 첫 절정에 이를 즈음 숨고르기를 위한 커브길이 나온다.
속력을 줄인 채 살짝 몸을 비틀어 미끄러지듯 회전
한다.
이 커브길은 말하자면 절정의 속력을 내기 위한 구름판인 셈이다.
워밍업이 끝났으니 이제 거칠 것은 없다.
승용차 안에서의 시속 200여 킬로는 평범하지만 오토바이는 다르다.
몸이 완전히 외부로 노출되어 느끼는 체감 속도는 두려움 자체이다.
무차별적인 바람의 저항이 따른다.
헬멧을 파고드는 바람의 비명이 오토바이의 굉음을 묻어버린다.
옷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듯하다가 급기야 몸이 튕겨나갈 것 같아 손아귀 힘을 바싹 주면 몸은 저절로 낮게 숙여진다.
허공에 떠 있는 듯 차체가 흔들린다.
더 이상 당길 수 없는 스로틀을 잡은 손이 병아리 감별사의 손끝만큼 예민해진다.
순간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돌진해오는 차량은 없는지 연방 확인하며 전방의 노면상태와 차량 그리고 오른쪽에서 파고드는 차량의 속도 등을 판단해 찰나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엉거주춤하거나 자그마한 돌부리에라도 걸리면 끝
이다.
쾌감과 두려움이 엉킨 묘한 기분은 차츰 두려움으로 정리된다.
바람이 내는 귀성곡을 듣는 순간 죽음의 질주를 떠올린다. 고감도의 촉수를 동원해 최고조의 긴장으로 정신을 끌어올리면 오토바이 위에서 나는 무아경에 빠진다.
속도를 줄이라며 바람이 헬멧을 흔들어 댄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
허무하게 보내버린 젊은 세월과 사랑하는 이가 갑자기 떠나버린 데서 한때 삶의 투지를 상실해버린 그래서 부딪쳐오는 바람처럼 악다구니를 쓰며 세상을 향해 달려들지 못하고 쉽게 비켜버린 나는, 어쩌면 병약한 녀석만 골라 사냥하는 맹수의 사냥감이었는지 모른다. 내어 줄 곁불 하나 없던 내가 차가운 이성보다는 어쭙잖은 동정으로 주위를 바라본 탓이었을까.
잘나빠진 동정을 바쳐 그들 대신 짊어진 등짐의 무게가 얼마던가.
그 여진이 여진을 낳아 또한 얼마나 찰거머리처럼 질기던가. 가난은 그저 불편할 뿐이라고?
브레이크 풀리듯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자동차로 뛰어들고 싶을 만큼 자존심이 상하는데 가난은 죄가 아니라 그저 불편할 뿐이라고?….
‘그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이렇게라도 달려보자. 세상에서 베돌기만한 날 아무도 낚아채지 못하게 가슴 터지도록 두려움 없이 달려보자.
적어도 이 순간은 감성이 아닌 칼날 같은 이성이요, 조금이라도 무뎌지면 죽음이다.
질주의 쾌감보다 더 귀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담력과 생의 집착을 태풍 같은 바람에서 다시 찾으리라.’
질주는 시화 방조제에 도착하면서 숨고르기를 한다.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30리 길의 방조제, 이 방조제가 가져오는 자연의 일탈은 접어 둔다. 방조제가 만들어 낸, 이토록 커다란 호수가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엔진을 식힐 겸 또 다른 질주를 위해 잠시 방조제 입구에서 멈추었다.
가져온 생수를 꺼내 긴장으로 타들어간 갈증을 풀며 담배 한 개비를 물었으나 바닷바람이 세차 라이터를 켤 수가 없다.
바닷물이 가득한 남쪽 호수와는 달리 북쪽에는 몇 뙈기의 밭만큼 개펄이 드러나 있다.
옹기종기 모여 조개를 캐는 사람들과 밀물이 들어올세라 긴 주둥이를 부지런히 놀리며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도요새 무리가 여가와 생존의 선을 긋는다.
돌고래 같은 비행기 한 대가 고도를 낮추며 뭉게구름 산맥을 넘어올 때 나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달리고 싶어 이번에는 헬멧 대신 선글라스를 낀다.
시화방조제를 건너다보면 여느 도로보다 편안하다.
신호등이 전혀 없이 십리씩 이어지는 직선거리, 느슨한 마음으로 잠깐잠깐 속도감을 맛보기에는 그만이다. 너른 바다가 주는 여유를 받아들인 차량도 그다지 속도를 내지 않는다.
다만 차창을 꼭꼭 닫은 채 달리는 차량이 그저 아쉬워 보일 뿐이다.
속도의 날개를 펴며 바닷바람의 거친 초대에 응하다가 다시 속도를 줄여 파도를 타는 작은 배를 따라 여유롭게 달리는 질주…. 머리칼이 비바람에 쓰러진 보리 같고 팔에서는 솜털이 부스스 일어난다.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이 이보다 상큼할 수 있으랴. 부유물처럼 떠도는 상념이 말갛게 씻기면서 어디선가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미완의 잿빛 자유가 거침없이 질주하는 이때만큼은 진정한 쪽빛 자유가 된다.
바다가 두 동강이 나는 제부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왕복 60리 길의 시화 방조제의 질주는 해방구처럼 다가온다.
늦장을 부린다며 앙칼진 외침이 없는 곳, 달리고 싶으면 마음껏 달리고 쉬고 싶으면 언제든 갓길로 들어서서 간이역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곳, 바다와 바람의 편린마저 단조로운 일상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다.
태양이 사위어 가는 해거름에는 바닷가 돌무지로 내려가 홀로 차를 마시며 내 질주의 끝은 바다 위 어우러지는 석양 같기를 바라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