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해피 고 럭키

이영주 |2008.11.25 09:19
조회 31 |추천 0

 

해피 고 럭키 (Happy-Go-Lucky, 2008)

감독 : 마이크 리

 

 

친절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제목을 보아 하니 영화만 봐도 행복해질 것 같았다. 목, 금, 토, 일… 아침부터 밤까지 너무 빠듯한 일정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지난 주 후반부. 잠도 모자라는 판국에 토요일 아침 9시 10분 조조영화를 보는 건 일종의 미친 짓임에 분명했지만, 그때 말고는 도저히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서 바득바득 눈을 떴다. 전날 12명의 친구들에게 "영화 볼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문자를 보냈지만, 역시나 토요일 아침 9시에 영화 보는 건 무리였던 거다. 오로지 한 명, 헌만 왔다. 그럴 줄 알았다. ㅋ

 

영화제목 해피 고 럭키(Happy-Go-Lucky)의 사전적 의미는 "태평스럽다, 낙천적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포피는 제목 그대로 천하태평에 무슨 상황에서도 낙천적인 서른살 노처녀다.(포피 스스로 그렇게 말한 거니까 노처녀란 표현에 딴지걸지 말길.) 영국 런던에서 비슷한 또래친구이자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조이와 동거하고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기도 하다.

포피의 특기는 낯선 이에게 웃는 낯으로 인사하며 말걸기,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주말이면 술에 쩔어 클럽에서 밤새워 놀기, 뭐 그렇다. 글로 써놓으니 그다지 이상할 게 없지만, 실제로 그런 포피를 보면 한마디로 짜증난다. 영화 초반엔 뭐 저런 또라이같은 여자가 다 있나 싶었다. 그러나 참 신기한 것이 그녀의 또라이같은 행동에 중독성이 있다는 거다. 어느새 나도 포피처럼 천하태평, 낙천주의자가 된 양 실실 웃음이 나는 것이, 낯선 누구를 만나더라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할 것만 같은, 노숙자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도 "그래요, 그래요" 하고 친절하게 대꾸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거다. 심지어 자신의 친절을 오해해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다가 결국은 폭력적으로 폭발해버리는 포피의 운전연수 교사 스콧을 보면서도 그다지 불쾌하지도 그다지 상처받지도 않는 거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이런 하해와 같은 이해심은 또 뭐냐고.

 

그렇다. 친절이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두를 행복하게 하지도 않는다. 절대.

포피의 친절은 서점주인에게 낯선 불편함을 주었고, 스콧에게는 심지어 엄청난 오해까지 불러일으켰다. 사실, 나도 그렇고 보통사람들은 포피보다는 스콧에 더 가깝다. 자신을 둘러싼 벽은 허약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막이다. 근근이 살아가는 노동자 스콧에게 비위에 안 맞는 고객이라도 만나면 인종차별주의든 뭐든 그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불안함을 감추려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인종이든 세대든 지역이든 오버해서 혐오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취약한 지점을 그들에게 투사함으로써 자기를 방어하고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포피의 친절은 그저그런 보통사람들에게 100% 친절로 받아들여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피의 친절, 그것을 가능케 하는 그녀의 천하태평 낙천주의는 힘이 느껴진다. 누군가 세워놓은 자전거를 훔쳐갔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고작 "작별인사도 못했는데…" 하는 아쉬움 정도나 내비치는 그녀에게는 외부상황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 느껴진다. 동거인 조이에게 스콧에게 당한 일을 이야기하며 한숨을 내쉬기는 하지만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조이에게 "그럴 것 없다"고 답하는 포피에게선 자신의 친절을 거절, 혹은 오해하는 이들을 이해하려는 성숙한 성찰의 모습마저 보인다.

이야기의 기승전결도 없이 대책없는 낙천주의자 포피의 일상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그렇게 살아가는 포피의 일상 어느 즈음에서 멈췄고 영화는 끝났다. 포피는 아마 앞으로도 쭈욱 천하태평으로 낙천적으로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해피 고 럭키를 외치며 살아갈 것이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가며 그 친절이 타인에 대한 성찰과 배려와 만나 성숙해지리라 믿는다.

나도, 포피따라 해피 고 럭키다. ^^

 

p.s. 1

포피라는 캐릭터, 정말 짱이다. 처음엔 짱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짱 매력적인 노처녀.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냥 실실 웃음이 난다. 그녀의 캐릭터를 살리는 데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샐리 호킨스의 열연이 한몫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무엇보다 포피만큼 빛나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향연 때문이라고 본다. 샐리의 동거인이자 오랜친구인 조이는 "정말 저런 친구 있으면 평생 해피 고 럭키하겠다" 싶을 정도로 믿음직스러운 동반자의 모습을, 버럭남 스콧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겹겹이 벽을 치고 자기방어하기에 급급한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 같은 모습을, 플라맹고를 가르치는 열정적인 선생에게선 아픔마저도 예술로 승화시키는 스페인 특유의 열정을 만나게 한다.

물론, 못생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예쁘지도 않은 얼굴로 다양하게 살아있는 표정을 보여준 샐리 호킨스에게 캐릭터들의 영광을 돌리는 게 마땅하겠지만 말이다. 지금도 플라맹고를 배울 때 진지하게 짓던 포피의 표정을 떠올리면 큭큭, 웃음이 난다.

 

p.s. 2

포피를 만나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 나는 두 명의 여자가 떠올랐다. 에서 천진한 얼굴로 "헤픈 게 나쁜 거냐?"고 묻던 채현과 의 사치에. 채현과 사치에, 포피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 친절함의 원인이 외부에 있지 않고 자기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껏 친절이란 당연히 타인이 고마워하는 것을 보답으로 받고자 베푸는 "계산적 행동"이라 생각해 왔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 "친절한 사람"이었던 건, 그렇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위선이 싫어서였다. 그래서 종교인들이 참 싫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남용하는 그들이 징그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최근 영화에서 만나는 친절한 여성캐릭터들은 나에게 "다른" 친절을 보여준다. 그래서 헷갈린다. 고민이 많다. 나도 그녀들처럼 친절하고 싶어진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