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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함에 대해

박진관 |2008.12.02 10:42
조회 78 |추천 0

나는 아직도 쿨하게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해온 것인지 모른다.

주변에 넘쳐나는 수많은 쿨함  속에서

나만 이제까지 그걸 몰랐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21세기에 접어들며,

사회는 과학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많은 전환을 맞게 되었다.

 

물론 21세기가 되었으니까!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손에 손잡고 한 순간에 바꾸어버린 것은 아니다.

변화는 연속적인 것이지만,

그 무렵부터 있어왔던 변화라고 생각해두자.

 

밀레니엄이라고 불렸던 그 의 이듬해부터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서

내가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으니,

 

개략적인 나의 감상만을 이야기하자면-

세상은 확실히도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는 것이다.

 

여러모로 경량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수많은 도구들의 경량화부터 시작하여,

비대했던 사회조직 역시 경량화에 총력을 경주하였고,

그 때문인지 거리를 활보하는

수많은 여자들의 몸무게며 옷차림도 상당히 경량화 되었으며

(이 경우에는 수많은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감상하는 측면에 서있는 나로서는 순기능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 덕택인지 사람들의 마음 또한 경량화되었다.

가벼움의 미학,이라는 책을

한 권 써도 꽤 잘 팔렸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책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는

내가 출판계에 몸을 담고 있지 않아서

지금 현재 상태로는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전무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각설하고, 그 경량화의 가운데 도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제껏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서양의식이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슬슬 제자리를 찾아 안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쿨하다는 표현이 안착하기 쉬웠던 환경은

사회가 경량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중매체가 일단 가벼워졌으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던 방식이

예전의 에서 으로

일부 전이된 탓도 있을거라고 본다.

 

  대중매체는 쇼 프로그램을 방송하며,

그 중에서도 짝짓기 프로그램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가족단위적 쇼를 벗어나 초점을 가 아닌

으로 좁혀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들은 시류에 맞아떨어진 탓인지

상당한 성공을 보였으며,

결국 현재까지도 공중파의 주요 방송시간대를 점하고 있다.

고민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일단 마음에 드는 사람을 향해 손을 뻗고,

너무도 쉽게 그 손을 잡고,

더 좋은 사람(인듯한)이 보이면 망설임 없이 손을 놓고,

빼앗긴 사람도 그다지 아쉬운 기색 없이 웃고 만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쿨함의 표본이다.

쿨함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정과 시간 등에 가려진 이면을 아주 쉽게 내버린다.

사랑의 본질이 쌍방의 감정적이며

이성적인 타협점이라는 것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쪼록 대중매체에서 보여주는

그 충실한 쿨함의 표본을 자습서 삼아 쿨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 모든 사람들이 유행을 따르기 위해서

쿨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쌍방의 관계에서 남녀상열지사든

혹은 다른 관계이든 간에

 

쿨한 쪽과 쿨하지 않은 쪽이 있다고 생각하면

결국 비참해지는 쪽은 쿨하지 않은 쪽이기 때문이다.

쿨함은 그런 면에서 대범이나 점잖은 척과 맥이 통하기도 한다.

 

 

 


“우리 그냥 이쯤에서 헤어지자.”

“난 널 놓을 수가 없어!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왜 이래, 귀찮게. 서로 쿨해지자구. 이래봤자 너만 힘들어.”

 


혹은

 


“이젠 학점에 대해서도 좀 쿨해질 필요성을 느껴.”

“잘났어, 정말.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학점이 전부는 아니고, 그만큼 다른데서 점수 따면 되지 뭐.

그까짓 학점이래야.”

 

 


  이상의 대화들이 쿨함의 전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쿨한 쪽과 쿨하지 않은 쪽이 대화를 하다보면

쿨하지 않은 쪽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찌질이’가 된 기분을 지우기 어려운 것이다.

 

자신만이 속 좁고 못나 보이기 마련.

그래서 간간이 찾아오는 그런 경험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쿨해지기 마련이다.

마치 그것은 신종 페스트와 같이 순식간에 퍼져나가,

어느새 지금은 사회의 트렌드로 자리잡아 버리게 된 것이다.

 

 

어느 안방 드라마 오프닝 송에 나와도

의아스럽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또, 사람과 사람이 만나던 방식 중

의외성에 기반한 것이 많아졌다는 사실도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사람들은 일회성 만남에 익숙해졌으며,

그런 만남을 주선할 수 있는 장소도 예전에 비해서 많아졌다.

 

 

일단 일회성 만남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에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중 마음에 드는 누구에라도

접근하기가 용이해진 것이다

(그 사람이 만일 화를 불같이 내고 가버린다면

어깨를 가볍게 한 번 으쓱해주는 것도 쿨한 사람의 센스이다).

 

 

 

 

또 예전의 나이트클럽과는 다르게,

클럽 등의 놀이문화가 폭 넓게 대중에게 어필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좁은 공간 속의 많은 사람들의 부딪힘은

필연적으로 만남을 유발하게 되고,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어울림 이후에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원점으로 돌아오기도 쉽다.

왜냐하면 그 때는 서로가 평상심을 잃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쿨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대사회는 가볍고 쉽다.

충분히 쿨할만큼 쿨해졌다고 생각한다.

만남도, 사랑도, 섹스도, 이별조차 쉽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별이 쿨해야 한다는 것

구차하게 서로 눈물 쏟으며 질질 끌지 않는 것,

 

깔끔하고 뒤끝없는 완벽한 감정 정리를 통해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 위에서도

다른 누군가를 유혹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가짐이라고.

 

이틀 후  마주친, 서로 다른 커플 - 나와 전 애인 - 의

어색할 법한 상황에서도 안녕,

하고 생긋 웃으며 손 흔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마다

나는 매번 가슴팍을 세게 한 번 차인 기분을 버릴 수 없다.

그럴거면 연애를 하는 목적,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사람을 만나는 목적이

대체 뭐란 말이야.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쿨함들은

내게 있어서는 도무지 감정의 질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질식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두렵기 때문이다,

 

 

애써 강한 척 하는게 무너져버린다면

더 이상 잡을 곳이 없잖는가. 그래서 적당히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적당히 만나고 사랑도 적당히 한다.

 

사랑을 시작할 때는 이미 이별의 대사가 마음 속에 준비되어 있다.

이별을 전제하고 고려해둔 사랑이다.

 

쿨하기 위해서는 예비동작이 있어야 한다.

헤어져도 깔끔할만큼,

상처받지 않을 만큼 적당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방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아야 한다.

 

함께 있는 시간을 만나는 시간이고,

굳이 힘들게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바보가 된다.

 

이 사회에 끓어 넘치는 멜로영화들은

모두 멸종된 공룡들에 대한 추모 내지는 그리움과 같은 맥락인가.

 

몇 백만이 넘게 봤다고 하는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친구 같은데 나왔던 인물들은 과연 몇 퍼센트나 쿨했던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서는 찬양하면서

아직도 쿨하기에만 여념이 없으니 참 갑갑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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