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변함없이 무더운 열대야입니다.
내일만 넘기면 한 결 수그러든다니
그나마 희소식이라 할 수 있겠네요.
이런 날씨에 감기 걸려 겔겔대고 있는 전... 대체 뭘까요.
========================== 개도 안 걸리는 데 나라도 걸려줘야 =======================
금요일.
합동 공연 준비에 있어 가장 급선무라 여겼던
안무 연습이 어느 정도 마무리됨에 따라
연출은 안무에서 연기 쪽으로 연습내용을 변경했다.
다만 문제점이라면
오늘 주연인 민아와 안군 두 사람이 모두 불참이라는 것.
연출 - 아니 이 두 사람은 대체 어딜 간 거야? 연락도 안 받고...
한나로부터 확인한 바에 따르면
민아는 현재 집에서 쉬고 있다니 걱정할만한 요소는 없었다.
안군과 함께 있지만 않으면 된다.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결국 유야무야 하루 연습이 마무리 되고 주말은 찾아왔다.
토요일 오후 무렵 난 한나와 불꽃놀이를 보러 나왔다.
비록 현재 상황은 파탄이나 마찬가지지만
어느 정도 납득할만한 성과도 있었던 데에다
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오기 전에
잘 진압한 거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오후 5시 경 한나와 만난 난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와
불꽃놀이가 시작할 때까지 강가를 산책하기로 했다.
하나 둘 명당을 찾아 자리를 잡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도 슬슬 채비를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 때 즈음
공중화장실을 발견한 난 그녀에게 잠깐 양해를 구했다.
기억 - 한나야,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한나 - 네~ 빨리 오세요.
아직 볼일이 그렇게 급하진 않았지만
몇 시간씩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기다릴 생각을 하면
미리 비워 놓는 게 속 편할 일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화장실에서
난 의외의 인물을 마주하게 되었다.
안군 - .... 어?
기억 - ...... 허.
얼굴 두 곳에 살색 반창고를 붙인 채
당혹스러운 얼굴로 날 쳐다보는 안군.
아무래도 크게 상한 곳은 없는 듯한 그의 모습에
조금 더 때려줬어야 했나... 라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기억 - 불꽃놀이 보러 오셨습니까?
안군 - 뭐, 그렇지. 어제 연습시간엔 별 일 없었나?
기억 - 궁금하면 나와 보지 그러셨습니까.
안군
-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붓기가 안 빠지더라고.
멍든 건 커버스틱으로 웬만큼 가리겠는데....
기억 - 그것 참 유감이네요.
안군 - 누가 들으면 다른 사람이 이런 줄 알겠어?
기억 - 솔직한 감상이라도 듣고 싶으십니까?
안군
- ..... 하긴, 그쪽도 문제가 있네.
민아랑 같이 온 거야?
기억 - 아뇨, 민아 동생이랑 같이 왔습니다.
안군 - 민아 동생? 아~ 한나 말이구나.
괜히 이 사실을 숨겼다간
더 큰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난 대놓고 대답했다.
자고로 공개된 정보에 대해선 의심이 줄어드는 법이다.
안군 - 뭐.. 아무튼 다음에 두고 보자고. 나 아직 포기 안했거든.
기억 - 덜 맞으신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덤비시죠.
안군
- 쿡... 그거야 네 방법이고.
나는 내 방식이 있는 거 아니겠냐.
불꽃놀이 잘 보고, 월요일에 보자고.
그렇게 마지막까지 내 속을 긁어놓고
유유히 자리를 피하는 안군.
정말 눈앞의 변기라도 뜯어서 한 방 날려주고 싶다.
대체 저 인간의 속내는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뒤늦게 볼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뚱한 표정의 그녀가 내게 핀잔을 주었다.
한나
- 무슨 남자가 화장실 갔다 오는 데 이렇게 늦어요?
큰 거면 큰 거라고 말을 해주고 가든가!
기억 - 아냐, 아는 사람을 좀 만나서.
한나 - 네? 누구요?
기억 - 있어. 화장실이랑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저녁 7시 경, 불꽃놀이는 시작되었다.
=품~ 파파파파파팟..... 품~ 파파파파파팟.... =
나트륨, 칼륨, 칼슘, 구리, 스트론튬....
과염소산칼륨의 산화작용 아래
각양각색으로 연소하는 금속원소들.
도플러 효과로 인해 불꽃의 모양이 찌그러지지 않게
최고점에서 정확하게 폭발하는 절묘한 타이밍 컨트롤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기억 - 이야... 저런 건 어떻게 조절하는 걸까?
한나
- 어머, 그거 화학시간에 배우잖아요.
나트륨은 노란색, 칼륨은 보라색...
기억
- 아니, 그것보다 로켓이 최고점에 이르는 순간에
탄두가 터지게 하는 것 말이야.
추진제가 떨어진 뒤에 관성으로 인한 상승분까지 계산하지 않으면
저렇게 깔끔한 모양이 나오기 힘들 텐데...
역시 실험적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나?
한나 - 이렇게 예쁜 불꽃놀이 보면서 그런 생각밖에 안 들어요?
기억 - 당연히 아니지. 잔재들로 인한 환경오염까지 착실하게 걱정하고 있다고.
한나 - 아...... 정말 싫어질라 그런다.
그렇게 이야기 하며,
한나는 내 팔에 슬쩍 팔짱을 걸어왔다.
예전 같으면 바로 정색을 하고 뺄 일이었지만
강가는 생각보다 쌀쌀했기에 난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불꽃놀이는 곧 끝이 났다.
주변을 정리하고 일어난 우린
천천히 강가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나 -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기억 - .... 뭘?
한나 - 언니랑 안군 오빠요.
기억 -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일단 두고 봐야지.
한나 - 흐음.... 언니 지금 충격이 큰 것 같던데....
기억 - ...... 무슨 말 없었어?
한나
- 특별한 건 없었어요. 그냥 왜 그러는 지 모르겠다고만...
으츠츠.... 그런데 날씨 은근히 쌀쌀하네요.
기억 - ..... 캔커피라도 마실래? 따듯한 걸로.
한나 - 아, 그게 좋겠네요.
기억 -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사올게.
그렇게 한나를 산책로에 세워두고
가게가 있는 곳까지 뛰어올라간 난
곧 캔커피 두 개를 손에 들고 그녀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사이 한나 옆엔 세 명의 남자가 몰려들어
그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한나 - 이거 놔요~!
남1 - 야, 우리가 지금....
뭐야 저놈들은?
기억 - 이봐! 당신들 뭐야!
난 그렇게 소리치며 한나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그간 내 인생에 도움이라곤 되지 않았던
험악한 인상에 겁먹고 적당히 물러나길,
부디 녀석들이 =아가씨, 시간 있어?= 에서
=어이, 그림 좋은데?= 로 변질되지 않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남1 - 어? 뭐야.
남2 - ...... 허어 이게 누구야?
나름대로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한 나였지만
녀석들이 날 본 순간의 반응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마치 이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
하지만 결코 반가움은 보이지 않는...
설마 나랑 같은 과 동기들인가?
최악의 경우라도 선수는 놓치지 않는다는 각오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난
잠시 그들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서 평소 인간관계에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남3 -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눈친데?
남2 - 야, 우리 생각 안 나?
기억 - .... 유감스럽게도. 누구냐? 너희들은.
남1 - 하아... 이것 참 우린 너를 잊은 적이 없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그다지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던 듯
나와 한나 주위를 에워싸고
슬슬 긴장의 수위를 높여가는 그들.
난 손안의 커피캔을 꾸욱 움켜쥐며
녀석들의 동태를 주시했다.
남2
- 그때도 뭔가 좀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허어 이것 참 일이 이렇게 되니까
우리 꼴이 영~ 지랄 맞네.
남3 - 그러게, 완전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 같아.
자기들끼리 영문 모를 말들을 주고 받으며
피식피식 실소를 흘리는 그들.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확신한 난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나와 원한관계에 있을만한 사람들을 추려보았다.
...... 너무 많다. 대체 누구지?
세 명이 한 세트... 하나같이 얼굴엔 자잘한 흉터가....
다음 순간, 섬뜩한 한기와 함께 떠오른 지난 일이 있었다.
기억 - 너희들.... 지난 번 버스....!!
남1 - 어유, 이제 생각났어?
기억 - ..... 한나야 도망쳐!!
=파악!=
남1 - 아악!
일단 한나의 퇴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 앞에 선 녀석의 얼굴을 향해
들고 있던 커피캔 중 하나를 힘껏 집어던졌다.
아까 안군이랑 마주쳤을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곱게 물러날 인간이 아니라는 걸....!
불시의 기습에 당한 남1이 고개를 숙인 순간
난 녀석의 안면을 무릎으로 받아 올렸다.
=콰직!=
남1 - 칵?
기억 - 한나야 어서... 억!
일단 퇴로를 뚫고 한나를 찾아 고개를 돌린 순간
묵직한 주먹이 옆머리를 강타했다.
그리고 이내 반대쪽에서 옆구리를 향해 들어오는 발길질.
역시.... 쪽수엔 못 당하는 건가?
한나 - 꺄악!! 오빠!!
남3 - 넌 가만있어!
다행히 한나는 남3에게 한쪽 팔만을 붙잡힌 채
활발히 저항하고 있는 상태.
저 정도면 아직 도망갈 기회가 있다.
재빨리 뒤로 몸을 굴려 자리에서 일어난 난
나머지 커피캔 하나를 남2를 향해 집어 던졌다.
남2 - 으츠! 이런 치사한 새ㄲ....
유감스럽게도 같은 수는 두 번 안 먹히는 듯
커피캔을 피한 남2는 그렇게 소리치며 날 향해 뛰어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바닥에선
내가 좀 더 구른 것 같다.
남2가 사정권 안에 들어온 순간
난 옆에 누군가가 버려둔 컵라면 그릇을 들어
그의 얼굴을 향해 국물을 부었다.
남2 - 끄악?!
기억 - 한나야 숙여!
일단 남2의 시야를 마비시킨 난
그렇게 소리치며 한나를 붙잡고 있는 남3에게 달려들었다.
한나가 내 목소리를 듣고 주저앉듯 허리를 숙인 순간
덩달아 자리에 주저앉는 남3.
짧은 시간 사이에 그녀와 같이 반응할 생각을 한
상황대처능력은 칭찬 할만 하지만
난 아무 망설임 없이 그의 머리를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빠악!=
남3 - 크헉?
기억 - 한나야 이리와!
오만 꼼수로 위기상황을 타개한 난
서둘러 한나의 손목을 잡고 자리를 피했다.
일단 사람이 많은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
그럼 적어도 한나까지 휘말리는 일은 피할 수.....
=쿵=
이제 막 뒤돌아 달리기 시작하는 그 때,
뒤통수로부터 강도를 추정하기 힘든 통증이 전해지면서
정신이 아늑히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돌멩이? 아니면.... 뭔가 다른 묵직한.....
한나 - .....오, 오빠!!
기억 - ........ 도망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저앉아 버리는 다리.
절망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순간
난 마지막 힘을 다해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난 밟히고, 또 밟히고, 처절하게 밟혔다.
민아야..... 왜 갑자기 네 생각이 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