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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촛불항쟁의 기록 - "뉴파워" 촛불의 탄생

박기동 |2009.01.04 16:26
조회 65 |추천 0
2008년은 한국의 역사에서 새로운 전환 국면이 시작된 해다. 상반기에 대규모 정치적 진출을 이뤄낸 촛불 시위는 100만 대중이 지속성을 가지고 끈질기게 궐기했다는 측면에서 시위라기보다는 ‘항쟁’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 이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의 정치적 진출이었다.

6월 항쟁이 우리 사회 전부를 변화시켰듯이 촛불항쟁의 경험 역시 이제 사회적 경험이 되어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강력한 정치적 유전자로 입력되었다. 촛불항쟁 이후 국민은 더 이상 통치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 오히려 정치권력 위에 군림할 진정한 주권 소유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87년 6월 항쟁이 만든 민주화 체제를 넘어선 사건이 촛불항쟁이었다면 1997년 IMF 체제를 넘어서는 전환적 사건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제 위기다. 경제 위기가 심화되면서 진보진영의 전유물이던 반신자유주의 담론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2008년은 객관 조건과 주체적 측면 모두에서 87년 체제와 97년 체제와의 단절을 이뤄내고 새로운 체제로의 진입을 시작한 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경제 정황과 새로운 정치주체의 출현, 이것이 한국 사회의 미래를 읽는 핵심 키워드다.

특히나 촛불의 출현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향후 한국 사회의 변화 방향을 결정하는 가늠자다. 그래서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촛불항쟁의 의미를 곱씹어 봐야 한다.

  ⓒ 커널뉴스 박정원 기자 그동안 촛불항쟁을 둘러싼 여러 수준의 논의가 있었다. 여러 담론에 돌 하나 더 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철저한 주체적 평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모두가 촛불항쟁의 주체가 되어 향후 어떤 방향에서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것인가라는 실천적 평가를 함께 하길 바란다. 그런 뜻에서 이 글은 주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사에서 촛불이 가지는 의의와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2008년 촛불항쟁은 과거형이 아닌 진행형이며 새로운 운동의 출현에 대한 예고편이다.

지금 촛불을 곱씹는 중요한 이유는 2차 촛불항쟁이 승리하는 항쟁이 되길 염원하기 때문이며 모두가 묵묵히 촛불항쟁을 준비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촛불항쟁을 운동사적 시각에서 되돌아보도록 하겠다.
2000년대 들어서며 누구나 ‘운동의 위기’를 말했다.

전통적인 민중운동 진영의 영향력은 현격하게 축소돼 갔으며 90년대를 풍미하던 시민운동 역시 한계에 도달했다. 형식화된 집회와 시위로 국민들의 관심과 행동을 유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추동해온 진보 개혁운동은 수구세력을 상대로 절대 열세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사회 전반이 보수화 되고 있다는 주장이 알게 모르게 유포되어 갔다. 적어도 촛불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놀랍게도 촛불항쟁은 전혀 새로운 영역에서 분출되었다.
온라인 공간에서 형성된 힘을 통해 분출된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활동하고 접촉하는 공간과 단절된 전혀 다른 영역이다. 더구나 과거 온라인 주도의 시위와도 그 양상이 사뭇 달랐다. 대중운동의 구성이 의식화, 조직화, 투쟁이라는 3단계 과정을 통해 완결성을 이루는 데 반해 촛불항쟁에서 등장한 온라인 영역은 전통적인 민중운동 시민운동과의 연계 없이 자체로 완결성을 획득하며 출현했다.

이는 우리사회에서 전혀 새로운 운동세력, 제3의 정치세력이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촛불항쟁은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진보 개혁운동에 ‘뉴파워’가 출현했다는 점에서 사회운동의 ‘헤게모니 이동’이라는 극적인 의의를 가진다.

촛불은 국민이 보수화 된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진영이 보수화 되었음을 입증

촛불항쟁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보수화 경향에 대한 우려와 논쟁은 자취를 감췄다. 국민들이 보수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천적으로 입증된 것이며, 오히려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진영이 국민의 정치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채 보수화되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달라진 시위문화의 등장이다. 사회운동의 헤게모니는 사상과 이념이 반영된 문화의 공유를 통해 관철된다. 따라서 새로운 시위문화의 등장은 단순한 트렌드의 변화가 아니다. 이는 전통적인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시위문화가 촛불항쟁으로 등장한 뉴파워를 문화적으로 포섭해내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오히려 거꾸로 전통 운동진영이 새로운 시위문화에 포섭되었다. 촛불항쟁은 기성의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을 상대로 문화적 컨텐츠에서도 명백히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아직 뉴파워는 불안정, 그러나 일시적 현상

다만 뉴파워의 헤게모니 행사는 아직 불안정하여 지속성과 완강성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떠한 운동이건 새로운 출현을 완성하려면 실천을 통한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겪기 때문이다. 지금은 새롭게 등장한 뉴파워가 다시금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소강국면으로 보인다.

이제 사회운동의 과제는 대단히 명확해졌다. 새롭게 등장한 뉴파워를 완성함으로써 사회운동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지속해 나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 온라인 조직 주도의 시위 등장

촛불항쟁이 온라인 조직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지난 운동사와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현상이다. 이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면에서 극적이기도 하다. 2002년 ‘앙마’라는 네티즌의 제안에 의해 이루어진 여중생 추모 촛불 시위가 최초의 네티즌 주도 촛불시위였다.

그러나 촛불항쟁은 어느 네티즌 개인의 제안이나 행동이 아닌 온라인 커뮤니티들의 조직적 주도와 참여로 만들어졌다. 그런 점에서 2002년에 비해 질적 비약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온라인 커뮤니티로는 18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을 가진 ‘MB탄핵연대’와 ‘정책반대시민연대’를 들 수 있다.

  ▲ 2008년 5월 6일 여의도 침묵촛불집회 
온라인 조직의 주도 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은 촛불항쟁 초기인 5월 6일 여의도 침묵시위엿다. 당시 광우병대책회의는 청계광장에 촛불집회를 공고했지만 온라인 조직은 국회 청문회에 초점을 맞춰 여의도 시위를 결정했다.

그리고 광우병대책회의와 온라인 조직의 이러한 엇갈린 행보는 당시 조직 동원력의 차이를 그대로 드러냈다. 청계광장에 모인 인원은 40대를 중심으로 약 5000명에 그친 반면, 여의도에는 중고생들을 포함해 2만명에 가까운 인원이 집결했다. 1000여 개 단체로 구성된 광우병대책회의의 동원력이 온라인 조직의 동원력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온라인 조직은 초기 촛불시위를 주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광우병대책회의에 조직적으로 결합했다. 온라인 조직이 연대조직의 공식 구성원으로 참여한 것 역시 한국의 사회운동사에서 최초다. 아마도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현상으로 추정된다.

온라인 조직들의 이런 움직임은 최근 결성된 민생민주국민회의 참여로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 온라인 조직은 공식적으로 한국 진보운동의 주변부로부터 중심부로 자리를 옮겨왔다. 이들이 진보적인 연대연합 운동의 주체로 선 것은 이제 시작단계에 접어들었을 뿐이며, 앞으로 이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꾸준히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 조직의 주도 현상은 결코 급작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몇 차례 반복된 정치 경험이 누적되면서 진화한 결과다.

  ▲ 2002년 당시 미선, 효순 추모 촛불집회에 모인 촛불시민들  2002년 미군장갑차에 숨진 두 여중생의 추모를 계기로 시작된 촛불시위가 그 출발이었다. 당시까지만해도 개인의 발의에 의한 단발성이 강했으며 조직성을 논할 수준은 아니었다. 온라인 운동이 조직성을 획득했던 계기는 노사모가 주도한 탄핵반대 집회였다. 그러나 이는 성격상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라는 큰 한계를 가진다. 사회운동의 본질상 무당파적 성격을 유지할 때만이 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조직성을 띠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무당파적 색채를 유지하는 온라인 운동이 등장할 수 있었다.

한국의 특수한 상황은 앞으로도 온라인 조직운동이 발전하리란 점을 예상케 한다. 사회운동으로서의 온라인 운동의 등장이 가능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정당운동의 일천함에서 찾을 수 있다. 온라인 운동의 동력은 정치운동의 성격을 가진다.

계급계층 운동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실제적 요구에 기초하고 있다면, 정치운동은 정치 변화에 대한 민감한 요구로 형성되는 운동이다. 정당운동의 역사가 깊은 서구에서는 온라인을 통한 정치운동적 지향이 대개는 정당활동으로 흡수되지만, 한국은 정당 활동의 역사는 물론 정당의 수명도 매우 짧은 탓에 국민들의 정서가 정당 친화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정치적 지향성이 강한 대중적 흐름이 정당 밖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

촛불항쟁에서 온라인 조직이 대중동원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정치활동 체계가 정연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정치적 선도력을 발휘하는 조직과 대중 참여를 보장하는 연계 체계가 온라인상에서 정연하게 구축되었다는 뜻이다.

예컨대 ‘MB탄핵연대’와 ‘정책반대시민연대’의 두 카페가 선도력을 발휘한 조직이라면 82COOK, 소울드레서 등의 카페들은 대규모 회원을 통해 지지활동을 전개한 대중적 동맹 카페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예비군 카페나 유모차부대 카페 등 기능을 중심으로 한 카페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온라인 조직 사이의 유대를 횡적으로 강화했다.

이는 마치 학생운동의 전성기에 활약했던 정연한 정치활동 체계를 떠오르게 할 정도다. 사안과 관련된 투쟁위가 결성돼 선도성을 발휘하고 각 학교 학생회가 대중적 동참을 이끌어내며 의대, 간호대의 연합을 통해 기능적 부대가 형성되던 특징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이처럼 온라인 조직이 선도력을 발휘하는 조직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연합하는 거대 규모의 온라인 동맹카페를 체계적으로 양산할 수 있기에 앞으로도 정치적 폭발력은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80년대 사회운동이 활력을 가질 수 있던 원동력은 조직적 동원력과 함께 사회운동의 대의 앞에 헌신할 수 있던 학생운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를 경과하며 약화된 학생운동은 더 이상 사회운동에서의 주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제 학생운동이 담당했던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대신할 그 누군가가 절실한 시기다.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현재로서는 온라인 운동이 그 역할을 일정한 수준에서 대체할 것으로 보인다.

■ 인터넷 광장의 공론장으로 전환

촛불항쟁이 만든 사회운동의 주요 변화 가운데 하나는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게시판 ‘아고라’를 정치적 광장으로 전환해냈다는 점이다.

  광장의 존재는 대중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운동의 필수 조건이다. 광장은 정치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소통이 반복되면 역시 광장의 대중집회라는 형식을 통해 개별적인 존재들이 집단적 존재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광장은 소통을 통해 사회변화의 힘을 키워내는 진보의 인큐베이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80년대 폭압정치 시기에 사회운동은 광장 자체를 창출하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해야 했다. 대중집회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자체로 광장을 창출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창출된 광장은 작은 해방구와도 같아 정치적 비약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6월 항쟁 이후 형식적이나마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광장은 점차 순기능을 상실했다. 우선, 쉽게 보장되는 광장은 그 자체의 소중함을 잃었다. 그와 함께 광장을 형성하는 소통의 기능이 퇴보하면서 사회운동세력이 주도하는 일방적 전달이 반복되었다.

비록 사회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지는 않지만 퇴보해가던 광장문화의 새로운 장을 만들어낸 것은 월드컵의 응원 문화였다. 월드컵 응원 문화는 그 전까지의 광장 문화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먼저 가장 큰 차이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적극적 자기표현에 기초한 문화가 만들어졌다. 어떤 형식이나 규제도 없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행동이 집단화되는 새로운 광장문화를 등장시킨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변화는 광장의 형식이 깨졌다는 점이다.

즉 과거의 광장문화가 특정 공간을 지칭하는 제한성이 있었다면 월드컵 당시에는 대중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건 광장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런 특징은 촛불항쟁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월드컵 응원이 광장이라는 공간을 무한정 확장했다면 촛불항쟁 당시 공론장으로 등장한 토론게시판 ‘아고라’는 물리적 제약 자체를 넘어 사이버 공간으로 무대를 옮겼다. 거리에 나가야 만날 수 있던 광장이 이제 인터넷 접속이라는 간단한 행위를 통해 뛰어들 수 있는 책상 위 컴퓨터 속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로써 아고라 광장은 대규모의 대중이 언제든 참여할 수 있는 공론장이 되었다.

촛불항쟁 내내 아고라의 토론을 통해 결정된 대로 네티즌들은 행동전을 전개했다. 농심을 시작으로 이른바 조중동 신문의 광고를 받는 기업들에 대한 불매운동이 확산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과거 선언적 수준에 머무르던 불매운동이 이번에는 실제로 상당수의 기업들이 조중동 광고를 기피하거나 심지어 철회하도록 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제 아고라는 단순한 토론장이 아닌 정치적 행동전으로의 전환을 만들어내는 진정한 사회운동의 광장이 된 것이다. 이런 힘은 서울시 교육감 선거로도 이어져 당시 보수성향의 후보였던 공정택 현 서울시교육감에 대한 낙선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온라인 광장인 아고라의 가장 큰 특징은 전국성에 있다.

어떠한 지리적 제약 없이 아고라라는 하나의 공간으로 집결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런 전국성은 특정 의제를 전국에 파급하는 데 있어 가히 폭발적인 힘을 발휘한다. 시간차 없이 공유된 내용이 곧바로 지역으로 확산되고 실현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징은 철저한 쌍방향성이다.

80년대 등장한 광장 문화가 정보 전달의 일방성으로 인해 점차 활력을 상실했다면, 온라인 광장은 구조적으로 그러한 일방성이 불가능하다. 큰 규모의 단체이건 평범한 개인이건 모두가 평등하게 하나의 아이디를 사용할 뿐이며 집회 사회자와 같은 특정인의 허락 없이도 글을 올림으로써 광장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댓글이나 추천과 같은 간단한 참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본질적 특성 때문에 온라인 광장은 쌍방향성 광장으로 존재하면서 본연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

온라인 광장의 등장은 정규 방송사나 언론사가 독점하고 있던 전국적 의제 주도력이라는 권력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는 과거 사회운동이 인터넷 신문을 통해 대항력을 형성하던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최근 아고라 경제토론방에서 시작된 이른바 ‘미네르바 신드롬’은 온라인 광장이 지닌 의제 전파력과 파괴력을 입증하고 있다. 아고라에서 형성된 경제 담론이 거꾸로 중앙지로 전파되는 의제 주도력의 역전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소통과 교감은 사회운동의 기본이다.

80년대 사회운동은 자체의 힘으로 광장을 창출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고 냉정히 말해 광장의 주인도 바로 사회운동 세력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제 광장은 대중의 힘으로 온라인에서 창출되고 있다. 더 이상 사회운동이 광장의 주인이 아니며, 오히려 광장에서 시험과 검증을 받아야 할 하나의 주체일 뿐이다.

이제 우리 사호의 어떤 사회운동이건 자기주장을 실현해야 한다면 온라인 광장의 소통을 거쳐야 한다.

광장에서 소통되고 합의가 이루어진 의제라면 그것은 이미 전국적이며 국민적인 합의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정치적 주장은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는 그런 시대가 열린 것이다.

■ 디지털 매체 주도형 시위문화의 등장

서울에서만 70만 명, 전국적으로는 100만 명이 결집한 2008년 6월 10일의 촛불문화제에서 전국적인 온라인 시위를 제안한 적이 있다. 저녁 8시 30분께 촛불문화제 사회를 맡은 박원석 광우병대책회의 상황실장이 “지금 많은 인터넷 언론들이 오늘 현장을 생중계하고 있다”며 “네티즌들이 현장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성원을 한다는 의미에서 지금 이 시간 청와대 홈페이지에 동시에 접속해 다운시켜 버리자”고 깜짝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러자 불과 1분도 안 돼 청와대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9시가 넘도록 홈페이지는 복구되지 못했다고 한다. 청와대 홈페이지가 다운되기 위해서는 수십만 명의 동시접속이 필요하다고 하니 아마도 당시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인원은 거리에 나온 인원만큼이나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모습은 무수한 대자보와 유인물이 뿌려지던 80년대의 시위현장과 확연히 대비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유인물을 찾지 않았다. 오마이뉴스와 커널뉴스 그리고 아프리카 등을 통해 1인 미디어들이 만들어낸 생중계와 거의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사진들이 현장 곳곳의 소식을 생동감있게 전하며 소통을 만들어냈다.

  ▲ 촛불집회 현장에서 생생한 장면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커널뉴스의 인터넷생중계 모습 
사회운동의 필수 요소인 선전과 홍보가 과거에는 대자보와 유인물 같은 홍보매체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이번 촛불항쟁에서는 냉정히 말해 오프라인 매체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홍보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촛불을 주도한 선전 홍보 매체는 철저히 온라인 매체였다. 주되게는 아고라에서 진행된 논쟁이 선전과 홍보의 출발점이었으며 이것이 각 온라인 카페로 확산되면서 불매운동과 항의전화 등의 (온라인) 행동전으로 이어졌다. 가두는 축제의 장으로 족했다.

더 이상 홍보의 장이 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오프라인 매체의 역할은 전무했다. 수십만 대중이 참여하면서도 유인물이 필요 없는 새로운 시위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사회운동이 전국적 규모의 대중운동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정치적 내용을 전달할 선전과 홍보 매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선전과 홍보 매체는 사회운동과 일반 대중을 연결함으로써 하나의 의지로 결속시킨다. 홍보매체 없는 사회운동이 대중운동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이유다.

촛불항쟁이 진행되는 동안 사회운동은 어떠한 홍보 매체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는 전통적인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온라인과 유리된 활동을 지속해 온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온라인은 단순한 활동공간의 의미를 넘어섰다. 온라인은 새로운 세력이 태동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선전과 홍보매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기성 매체의 헤게모니를 위협할 정도로 컸다. 그렇다면 이제 온라인 활동은 민중운동이건 시민운동이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필수 영역인 것이다.

사회운동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홍보매체와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벙어리 상태로 촛불항쟁에 참여 했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이제 사회운동은 온라인 매체를 통한 대중적 교류 없이는 아무런 집행력도 행사 할 수 없는 시대에 이르렀다. 온라인을 통한 선전 체계를 만들어내고 어떤 방식으로든 아고라에 모인 이들과 소통하는 것은 이제 모든 사회운동이 넘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 축제형식의 새로운 시위 문화 등장

촛불항쟁은 온라인 조직 주도라는 새로운 힘의 등장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위문화의 등장이기도 하다. 이는 전통적인 사회운동의 문화를 일거에 넘어서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20여 년 전 6월 항쟁과 비슷한 규모의 시위대가 만들어졌으나 정서는 전혀 달랐다. 과거에도 집시법을 피해 촛불문화제라는 형식을 빌린 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름만 문화제을 뿐 실제로는 기성 시위문화의 재판이었다.

그러나 촛불항쟁에는 문화제라는 이름에 걸맞는 시위문화가 등장했다.

  ▲ 촛불문화제 현장에서 시민들 스스로 가지고 나온 악기를 이용해 즉석에서 길거리 연주를 하고 있다.  시위 참가자들은 자신만의 특성이 담긴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연단 위에서만 펼쳐진 문화제도 아니었다. 거리 전체에서 참가자들 스스로가 자신만의 프로그램으로 참여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더 이상 연단 위에서 들려오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정보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의 콘테츠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보의 창조자로 나섰다. 이는 온라인의 쌍방향 소통 방식과 궤를 같이 하는 현상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위문화의 밑바닥을 흐르는 감성과 정서의 변화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과거 시위문화의 밑바닥에는 비장미 넘치는 투쟁기풍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촛불항쟁은 말 그대로 축제였다. 낭만과 즐거움이 촛불항쟁을 지배한 기본 정서이자 문화였다. 경찰력의 무리한 탄압에도 이러한 정서는 변하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시위문화의 등장은 시대적인 변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나 청년문화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는 매우 중대한 정서적 변화를 겪었다. 이것이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월드컵 거리 응원전이었다. 붉은악마로 대표되는 청년세대의 집단적인 거리 응원문화는 비록 비정치적 행위이긴 했지만 단숨에 국민들을 단결시키며 온 사회를 장악했다. 청년들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흐름에서 우리는 집단주의적 행동양식과 애국심이라는 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 붉은악마의 거리응원은 여전히 애국적 지향을 가진 청년들의 행동이 전 국민을 단결시키고 동원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현재 청년세대는 지난날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특징이 기성세대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은 기성세대의 입맛이 보수화된 탓일 뿐 청년세대의 기질이 낙후했기 때문이 아니다.

새로운 청년 문화가 등장할 수 있었던 1차 동력은 우리 사회의 물질적 조건의 변화다.

  현 청년세대는 기성세대와 달리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성장했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느라 문화적 지향이 발달할 여유가 없던 기성세대와는 분명하게 달랐다. 청년세대는 그런 조건 속에서 풍부한 문화적 감성과 자유로운 사고를 발달시켰던 것이다.

또한 청년세대는 국가적으로도 경제력이 향상된 여건에서 성장한 세대이기도 하다. 과거 세계 자본주의의 주변부에 불과한 열악한 개발도상국의 국민으로서 열등의식과 사대의식에 사로잡힌 기성세대와 달리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진 세대이다. 이런 국가적 위상 변화 역시 청년들에게 매우 진취적인 정서를 불어 넣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변화는 정치적 조건의 변화다.

청년세대들이 성장한 정치적 환경은 1987년 6월 항쟁에 기초하고 있다. 기성세대가 국가권력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자기 보존적이며 방어적인 의식을 형성했다면 청년세대는 6월 항쟁의 승리와 민주화 쟁취라는 조건 위에서 성장한 덕분에 국가의 개인이 대등하다는 권리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은 물론 일체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줏대와 소신을 가지고 자기를 표현하는 데도 익숙하다.

2000년의 6.15남북공동선언도 중요한 정치적 계기로 작용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는 비민주적 권위에 대한 권리의식을 성장시켰지만 전 사회에 깊게 깔린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의 억압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을 거치며 우리 사회 청년세대의 의식을 억압하던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청년세대는 어떤 권위에도 굴하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거칠 것 없는 참여의식을 키워올 수 있었다.

촛불항쟁에서 나타난 축제형식의 시위문화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변화와 발전의 반영이다. 이러한 변화를 사회운동이 반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운동 자체가 보수화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제 사회운동의 형식도 대중문화의 변화에 발 맞춰 변화를 꾀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

촛불항쟁에서 나타난 형식의 변화만큼이나 세대와 성비의 변화도 두드러졌다. 청소년 세대의 참여가 매우 활발하게 나타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초기 촛불항쟁에 불을 당긴 것도 중고생들이었다.

또한 유모차부대를 비롯한 여성회원들 중심의 카페들이 대규모로 참여를 하는 등 여성의 참여도 매우 두드러졌다. 6월 항쟁 당시 넥타이부대로 상징되는 남성 주도의 시위가 이루어졌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나 중고생의 경우도 여학생의 참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를 두고 먹거리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먹거리를 매개로 했을 뿐 분명한 정치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6월 항쟁과 비교할 때 나타난 참여자들의 세대와 성비의 변화 역시 우리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 지방과 수도권의 차이

전국적으로 보자면 촛불항쟁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실제로 서울과 지방은 참여율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 올해 6월 10일 최대 인원을 기록한 서울 광화문 광장의 집회가 주최측 추산 70만 명 정도였다면, 같은 날 부산에는 3만 명, 광주 6만 명, 대전은 1만 명정도가 모인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인구 20~30만 명 규모의 소도시는 2,000~3,000명 정도가 모였다.

서울의 경우 실질적으로는 수도권을 다 포괄한 것은 물론, 일부 충청권까지 포괄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2,500만 명에 70만 명이 참가한 셈이니 대략 1,000명당 28명 꼴로 참여한 셈이다. 이 정도의 참여율을 보인 곳은 광주 정도이며, 부산과 대전을 포함해 그 외의 도시들은 대략 1,000명당 5~10명이 참여했을 뿐이다.

80년의 민주화 항쟁이나 6월 항쟁의 경우 오히려 지방 대도시에서 시작된 정치적 분출이 역으로 서울 시위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번 촛불항쟁은 서울 집중현상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현상을 보였다는 점에서 과거와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이른바 ‘중간층 주도론’이다. 쇠고기 문제가 소비자나 먹거리의 문제였기에 생산자층 보다는 소비자 계층인 중간층이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주장이다. 서울과 수도권은 오랫동안 경제력 집중이 지속되면서 지방에 비해 두터운 중간층을 형성하고 있어 이번 촛불항쟁에서 폭발성을 보였다는 주장이다.

어느 정도 타당성 있는 주장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 2008년 6월 10일, 울산의 촛불문화제 모습  중간층 주도론과 상반되는 사례를 들어보자. 경상남도에 위치한 인구 3만 명의 어느 면에서 개최한 6.10 촛불문화제에 무려 1,000여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1,000명당 30명이 넘게 참가한 셈이니 수도권과 비슷한 참여율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촛불문화제를 주최한 사람이 단 1명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촛불문화제를 알리기 위해 면에 있는 전봇대는 물론이고 학교 화장실까지 발로 뛰어다니며 홍보전단을 붙였다고 한다. 즉 오프라인으로도 충분한 홍보가 이루어진 경우 수도권과 비슷한 수준의 참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번 촛불항쟁에서 나타난 수도권 집중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온라인의 중앙집권화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야기했듯 촛불항쟁은 철저히 온라인 주도의 시위였다. 온라인을 통한 조직적 참여와 온라인을 통한 홍보가 중심이었다. 대부분의 정보 공유 역시 아고라를 비롯한 온라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온라인을 통한 참여는 그 자체로 전국성을 가진다.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이 접속해도 지역적 특성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개인도 전국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자연스레 온라인은 중앙집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넘어 지역적인 오프라인 시위와 연계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온라인 지도부의 존재다.

온라인 지도부에서 결정한 행동지침이 오프라인 시위의 힘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지도부 역할을 수행한 단위는 서울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주도력을 발휘한 MB탄핵연대나 정책반대시민연대 등도 서울을 중심으로 지도부가 형성되었으며 이에 동조한 82COOK이나 소울드레서의 경우도 행동지침은 서울로 제한돼었다.

촛불항쟁이 진행되면서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서는 행동지침을 공유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소도시로 갈수록 이런 현상은 심해졌다. 서울의 경우 광우병대책회의라는 오프라인 지도부와 온라인 지도부가 공존했으나 그밖의 지역에는 사실상 오프라인 조직만이 촛불항쟁을 주도 했을 뿐이다. 온라인 지도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수도권 집중현상의 이면에는 비정상적인 온라인의 중앙집권적 성격이 깔려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지방에서 온라인상의 분권화를 실현해야 한다. 이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서 가능하다.

먼저 광역단위라도 온라인상의 진보적 상징공간을 창출해냄으로써 지방의 진보적 정보가 유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지방 고유의 정보전달 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예컨대 지방 고유의 카페들을 상징공간의 동맹 카페로 만들고 전국적 규모의 대규모 카페에서는 지역별 모임을 활성화해 각 지역의 상징공간과 연계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적 온라인 정보전달 체계를 구축해내야 한다.

촛불항쟁을 점화시켰던 중고생들의 정서가 지역별로 큰 차이가 날 리 없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비율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온라인 운동이 태동하고 발전하면서 새로운 사회운동의 영역으로 등장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각 지역별로 분권화된 온라인 공간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수도권 중심의 촛불항쟁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 온라인 운동의 계승을 위하여

  ▲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거리행진을 하는 촛불시민들  촛불항쟁을 통해 등장한 온라인 운동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동력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나타난 온라인 운동이 결코 완성형태는 아니다. 2002년 등장한 온라인 시위에 비해 조직성을 띠며 일보전진을 이루었을 뿐, 아직 지속성과 완강성이 부족하며 조직력 역시 일회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다. 앞으로 등장할 온라인 운동은 이번 촛불항쟁에서 드러난 미숙함을 넘어 더욱 진화된 형태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


온라인 운동의 계승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온라인 운동이 전통적인 민중운동, 시민운동과의 일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촛불항쟁 내내 문제가 되었던 네티즌과 대책회의 사이의 갈등은 이런 전통적 운동과 온라인 운동사이의 거리감을 보여준다.

그 원인은 두 가지 문제의 충돌에서 발생한다. 하나는 전통적인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온라인 운동에 비해 관성화, 관료화된 특성을 보이며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포용해내지 못하는 탓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새롭게 등장하는 온라인 운동의 배타의식 탓이다. 전통 운동진영을 마치 기성 정치권과 다름없이 보며 배척하는 정서가 중요한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운동과 새로운 운동이 어떻게 대자적인 연대연합의 길을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향후 한국 사회운동의 운명이 갈릴 것이다. 서로의 경계를 넘지 못한다면 희망은 없다. 경계를 넘어서 하나가 되는 변화와 발전이 진보적 사회운동의 진정한 동력임을 명심해야 한다.

 

출처: 커널뉴스 http://www.humanpos.kr/news/article.html?no=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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