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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es... <제 2 회>

박준욱 |2009.01.14 13:42
조회 69 |추천 0

 

교양학관 강의실 203호.

천정에 달려있는 전등은 어느 하나도 켜져 있지 않고, 창문은 행여나 빛이 새어나올라 이미 커튼으로 가려진지 오래였다.

칠판을 가릴만한 크기의 새하얀 롤러 스크린에는 빔 프로젝트로 각종 서양명화를 비추고 있었다.

명화가 바뀔 때마다 마치 열변을 토하듯 각 시대상의 예술성을 강조하는 교수의 열성과는 달리 찔끔 눈물까지 내며 하품하는 학생들부터 어둠침침한 이 상황을 이용하여 책상에 완전 엎드려 자는 학생들도 군데군데 있었다.

맨 뒷자리에 앉은 현욱도 졸음이 쏟아지는지 자꾸만 하품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애써 졸지 않으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으면서 교수가 말하는 내용들을 슬금슬금 써 내려갔다.

반면 옆에 나란히 앉은 영섭은 턱을 괴며 금방이라도 머리가 책상에 닿을 듯 졸다가 강의가 끝나자 그제야 슬그머니 눈을 떴다.

좀 전까지 가려진 커튼은 다시 젖혀있었고 천장의 전등 불빛도 하나씩 켜졌다.

강의실 이곳저곳에서 길고 짧은 하품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고 금세 전체적으로 웅성거렸다.

영섭은 기지개를 펴며 절로 나오는 하품소리와 섞어 말했다.

 

“정말 지겹다, 지겨워. 근데 넌 용케도 잘 버틴다.”

 

현욱은 교재와 필기구를 주섬주섬 챙기며 말했다.

 

“그럼 시험 때 네가 요약하고 정리 해줄래?”

 

“하긴 시험 전에 네가 주는 요약, 정리한 프린트물만 봐도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니깐. 이번에도 잘 부탁할게, 친구!”

 

현욱은 피식거리며 자리에 일어났다.

 

“글쎄. 이번에는 너의 그 괘씸한 심보를 고쳐주기 위해서라도 그러고 싶은 생각인 없는데 이를 어쩌나?”

 

“이 자식, 그렇게 치사하게 나갈 거냐? 근사하게 한 턱 쏘면 될 거 아냐? 그러니깐 그런 걸로 치사하게 그러지 마라! 내가 너 하나 믿고 수업시간에 농땡이 까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망언을 하다니… 잔인한 녀석!”

 

“알았어, 알았다고. 나 먼저 나가서 화장실에 갔다 올 테니까 다음 수업 강의실에 자리나 맡아 둬.”

 

현욱은 영섭에게 가방을 던져주고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강의실을 막 빠져나올 순간이었다.

마침 그 강의실 앞을 지나가던 한 여학생과 부딪힐 뻔하자 흠칫했다.

그 여학생도 당황했는지 슬쩍 한 발자국 물러나 고개를 숙였고 순간 그의 시선은 그 여학생에게 고정되었다.

당황해서 그런지 연한 쌍꺼풀 아래로 유독 커다란 눈망울과 자연스럽게 오뚝한 콧날과 적당히 두툼한 선홍빛 입술은 새하얀 얼굴빛과 더불어 청초한 매력을 뿜어내기에 충분했다.

현욱은 그런 그녀 앞에 마치 망부석이라도 된 듯 굳어버렸다.

그녀는 태연히 현욱을 비켜지나갔고 그녀의 향기로 짐작되는 그윽한 향기를 따라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가녀린 몸을 싸고 있는 노란색 니트와 붉은 체크무늬 치마는 단아함까지 자아냈다.

현욱의 가슴은 쉴 새 없이 고동쳤고 쉽사리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모습이 다른 학생들로 사라져도 그의 시선은 그대로였다.

그때 영섭이 막 강의실에서 나오며 현욱의 가방을 던지듯 건넸다.

 

“화장실 간다면서 여기서 뭐해? 얼른 가자!”

 

현욱은 아슬아슬하게 가방을 받아들곤 다음 강의가 있는 강의실로 가는데 현욱의 시선은 그녀가 사라진 곳으로 종종 돌아갔다.

그런 현욱의 모습에 영섭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뭘 그렇게 돌아봐? 뭐, 예쁜 여자라도 봤어?”

 

순간 현욱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그런 현욱의 태도에 더욱 놀란 건 오히려 영섭이었다.

영섭은 그의 시선을 따라 이리저리 훑어보며 소란스럽게 주절댔다.

 

“정말이야? 얼마나 예쁘길래 네가 이렇게 당황하니? 그보다 누군데? 어딨어?”

 

“나도 잘 몰라… 그냥 우연히 강의실에 나오다 부딪힐 뻔한 여자야. 근데…”

 

현욱은 더 이상의 말 대신 짧은 한숨을 토했다. 영섭은 그런 현욱을 보며 신기하듯 쳐다봤다.

 

“한숨까지 쉬고 그냥 보낸 것이 무진장 안타까웠나 보네? 네가 이럴 정도로 그렇게 예뻤어? 도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예쁘다는 말보단 아름답다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여자였어. 그녀를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이 탁 막히더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겠더라.”

 

현욱은 본인이 말해놓고도 쑥스럽고 막상 좀 전 자신의 상황이 우스운지 씁쓸하게 웃었다.

영섭은 여전히 신기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말이라도 한 번 붙여보지 그래?”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릴!”

 

영섭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현욱은 손사래까지 치며 단번에 거절했다.

그저 잠시 마주치고 지나가기만 해도 가슴은 쿵쾅대고 몸뚱이는 경직되고 마는데 그녀 앞에 당당하게 서서

 

‘첫눈에 보고 반했습니다. 당신과 좋은 관계로 발전하고 싶습니다.’

 

이런 상투적인 고백 장면은 애초에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차라리 당신을 보고 첫눈에 반했는데 연락처 좀 가르쳐달라는 장면은 아주 조금 상상은 되지만 물론 그다지 달갑지 않은 방법이었다.

괜히 섣불리 다가섰다가 첫인상부터 그녀에게 부정적인 모습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그녀를 쫓아가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무모한 시도 자체가 그의 지극히 소심한 성격에 결부되는 것이었다.

현욱은 얼른 다음 강의가 있는 강의실로 재빨리 직행했다.

물론 이번 강의에도 졸지 않고 열심히 필기는 하지만 강의내용은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잠시 스쳐간 그녀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의 지배했고 그의 두근대는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전 강의시간과는 달리 정신이 말짱한 영섭은 현욱을 흘낏 쳐다보더니 이내 수군거렸다.

 

“임마, 그렇게 생각나면 따라 가보지 그랬어? 따라가서 전화번호라도 따오면 얼마나 좋아? 전화번호라도 알아야 통화도 하고, 그렇게 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그렇게 친해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멋들어진 고백으로 그 여자의 마음을 뺏어버려야지!”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어? 근데 만약 전화번호 안 가르쳐주면? 완전 망신 중에 개망신이잖아.”

 

영섭은 조금 흥분한 듯 고개를 현욱에게 들이 내밀었다

 

“망신은 무슨 망신이야? 안 가르쳐주면 그만이지! 막말로 그 여자가 전화번호 가르쳐주지 않는다한들 네가 손해보는 게 뭐 있어? 그냥 순간의 쪽팔림만 감수하면 되잖아. 넌 그 소심한 성격이 문제야! 다음에 우연히 또 보게 된다면 우린 인연이다, 운명이다 생각하고 전화번호라도 꼭 따라!”

 

현욱은 그의 말에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상 영섭의 조언대로 자신이 그녀에게 다가가 전화번호를 묻는다는 상상을 하자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그런데 문득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뇌리를 스쳤다.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인연이나 운명을 운운하며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명분이라도 세울 수 있어 좋으련만…

하지만 우연은 말 그대로 우연일 뿐이다. 우연으로 인해 그녀를 다시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고, 그 불가능은 결국 그녀와는 인연도, 운명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매일 하루 종일 교양학관에서 죽치고 있지도 못할 노릇이고 결국은 필연적인 요소를 넣어 그녀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을 높이는 것- 오늘 그녀를 본 시간, 장소를 기억하고 매주 그 시간, 그 장소에 나타나는 것만이 유일한 능사였다. 현욱은 필기를 잠시 멈추고 노트 가장자리에 적었다.

 

「목요일, 오후 2시 50분, 교양학관 203호 뒷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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