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많은 칼로리 소모 탓인지 다들 늦잠을 잡니다.
한사람 두사람 잠에서 깨어납니다.
여름이라 그런지 모기가 많습니다.
모기장을 치고 잔 덕에 다들 모기에 많이 물리지는 않습니다.
날씨는 여전히 참 좋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방을 깨끗하게 치웁니다.
혜경누나가 남은 차돌박이로 된장찌개를 끓입니다.
라면도 끓입니다.
다들 배가고파서인지 맛있게 먹습니다.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쓰레기가 많이 나옵니다.
구석구석 사진을 찍어둡니다.
서린씨와 미스정과 경숙씨가 모델이 됩니다.
정원도 잘 정돈을 하고 나섭니다.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가기로 합니다.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습니다.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게 됩니다.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습니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습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습니다.
햇살이 강합니다.
다들 양산을 쓰고 병산서원에 들어섭니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하였습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입니다.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
병산서원은 본래 풍악서당< 豊岳書堂 >이라 하여 조선< 朝鮮 > 명종< 明宗 > 18년(1563) 구< 舊 > 풍산현< 豊山縣 > 북쪽에 창건< 創建 >되었으나 선조< 宣祖 > 5년(1572)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그후 광해군< 光海君 > 6년(1614) 서애< 西厓 > 유성룡< 柳成龍 > 선생의 업적< 業績 >과 학덕< 學德 >을 추모< 追慕 >하는 사림< 士林 >들의 발기< 發起 >로 사묘< 祠廟 >를 짓고 향사< 享祀 >하였습니다.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본관< 本貫 >은 풍산< 豊山 >으로 명종 19년(1564) 사마시< 司馬試 >를 거쳐 도승지< 都承旨 >, 예조판서< 禮曹判書 >, 우의정< 右議政 >, 좌의정< 左議政 > 등 많은 관직< 官職 >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시< 壬辰倭亂時 >에는 영의정< 領議政 >으로 왕을 호종< 扈從 >하였으며 도체찰사< 都體察使 >가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화기< 火器 > 제작< 製作 >, 성곽< 城郭 > 수축< 修築 > 등 군비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훈련도감< 訓鍊都監 >을 설치하여 군대를 양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조 31년(1598) 북인< 北人 >들의 탄핵으로 한때 관작< 官爵 >을 삭탈당합니다.
향리< 鄕里 >에서 후학< 後學 > 양성< 養成 >에 힘씁니다.
『 징비록 < 懲毖錄 >』(국보 제132호) 등 많은 저서< 著書 >를 남겼습니다.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 扈聖功臣 >이 됩니다.
다시 풍원부원군< 豊原府院君 >에 봉해졌습니다.
도학< 道學 >, 문장< 文章 >, 덕행< 德行 >, 글씨로 이름을 떨칩니다.
특히 영남< 嶺南 > 후생< 後生 >들의 추앙< 追仰 >을 받았습니다.
경내< 境內 >에는 복례문< 復禮門 >, 만대루< 晩對樓 >, 동< 東 >·서재< 西齋 >, 입교당< 立敎堂 >, 장판각< 藏板閣 >, 존덕사< 尊德祠 > 등이 있습니다.
사적 제260호. 1613년(광해군 5)에 창건되었습니다. 유성룡(柳成龍)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원래 고려 말기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선조 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입니다. 1629년 유진(柳袗)을 추가 배향했습니다. 1863년(철종 14) 현재의 이름으로 사액받았습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았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백과사전을 참조합니다.
선비들의 힘이 느껴집니다.
파란하늘이 좋습니다.
색깔을 바꿔봅니다.
색이라는 건 참 신기합니다.
잠시 정자에 앉아서 쉽니다.
정자가 시원합니다.
경치가 참 좋습니다.
벌집도 발견합니다.
벌은 예나 지금이나 무섭습니다.
조심스레 피해다닙니다.
시간이 남습니다.
내친김에 근처에 있는 하회마을로 향합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합니다.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의 씨족마을로 유운룡·유성룡 형제 대(代)부터 번창하게 된 마을이라고 합니다.
낙동강 줄기가 S자 모양으로 동·남·서를 감싸 돌고 있습니다.
독특한 지리적 형상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습니다.
유씨가 집단 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 안씨 등이 씨족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유의 하회별신굿탈놀이로 유명한 이 마을은 크게 남촌과 북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서 깊고 제법 크기를 갖춘 많은 문화재를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별신굿에 쓰이던 탈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제작 연대를 고려 시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마을의 역사가 뿌리 깊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대표적 가옥이라 할 수 있는 양진당(보물 제306호), 충효당(보물 제414호), 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 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겸암정사 (중요민속자료 제89호) 등 많은 건축들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생활상과 발달된 집 구조 등을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하회마을은 더할 수 없이 멋스러운 경치에 민속과 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나라 정신 문화의 연구·보존·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을입니다.
하회(河回)마을은 전국 유수의 풍산유씨(豊山柳氏) 동족부락(同族部落)이며 낙동강의 줄기가 S자모양으로 회류(回流)하는 특수한 경개(景槪)로도 저명합니다.
유씨동족부락형성 이전 허씨(許氏), 안씨선주설(安氏先住說)은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門前)에 유씨 배판 ”이란 구전(口傳)에 의해서도 전해지고 있으며, 그러한 속언을 뒷받침한다고 생각되는 약간의 전승(傳承)도 있기는 합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하회가면(河回假面)”의 제작자가 "허도령(許道令) ”이었다는 구전과 강건너 광덕동(廣德洞) 건짓골에는 지금도 허정승(許政丞)의 묘가 있어 해마다 유씨들이 벌초를 행한다고 하는 점, 천계원년(天啓元年)(1621), 숭정(崇禎) 8년(1635), 숭정(崇禎) 15년(1642)의 동원록(洞員錄)에 약간의 허씨성명과 이보다 좀 더많은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는 점 등이 그러한 선주씨족(先住氏族)의 존재를 뒷받침 해주는 자료라 하겠습니다. (1964년, 청구대학(靑丘大學) 신라가야문화연구원간(新羅伽倻文化硏究院刊)
"동족부락의 생활구조연구 ”, 김택규(金宅圭)). 이 동원록(洞員錄)으로 보면 천계(天啓) ·숭정년간(崇禎年間)에는 이미 유씨동족의 수가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고 허씨 ·안씨의 선주씨족이 현저하게 감소되어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전시관에도 들러서 구경합니다.
농촌의 전경이 정이 갑니다.
스티브형과 잘 어올립니다.
유씨의 입향조(入鄕祖)는 제8세인 전서(典書) 종혜공(從惠公)으로 그는 풍산(豊山) 상리(上里)에서 고려말에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종손은 그로부터 24세손이라고 합니다.
또 구전에 의하면 오늘날과 같은 풍산 유씨의 동족기반은 그 중흥조(中興祖)로 추앙되고 있는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1539년-1601년, 이황문인(李滉門人), 원주목사(原州牧使))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년-1607년,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영의정(領議政))형제대(兄弟代)에 이룩되었다고 합니다.
동원록(洞員錄)을 남긴 천계원년(天啓元年)(1621) 무렵은 겸암(謙菴)과 서애(西厓)의 재세년대(在世年代)와 불과 10-20년의 간격 밖에 없으니 유씨 동족기반의 형성이 그들 대(代)에 이미 모두 이루어져 있었음을 십분 짐작케 합니다.
사실 근년과 같은 동족취락(同族聚落)의 규모나 겸암정사(謙菴精舍), 상봉정(翔鳳亭), 원지정사(遠志精舍), 빈연정사(賓淵精舍), 옥연정사(玉淵精舍), 화천서당(花川書堂)과 같이 단위취락으로서는 유례가 드문 허다한 별서(別墅)의 다설(多說)과 파종가(派宗家)의 창건 등 울연(鬱然)한 유씨 동족세의 발흥(勃興)은 대략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후대에 다소의 증개축이 있었을 것은 짐작되지만 어쨌든 그러한 하회마을의 성운(盛運)은 일종의 시대적 특징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문중(門中) 별서(別墅)들과 대주거(大住居)들이 하회마을의 특수한 자연경개(自然景槪)와 함께 역사적 승구(勝區)로 형성되어 있는 점도 유례가 드문 일면일 것입니다.
마을내에도 민박집과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하회마을의 지형을 태극형(太極形)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낙동강(洛東江) 줄기가 이 마을을 싸고돌면서 S자형으로 회류(回流)하는 형국(形局)을 지칭한 것인데 강건너 남쪽 대안(對岸)에는 영양(英陽) 일월산(日月山) 지맥인 남산(南山)이 있고 마을 뒤편(동편)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花山)(해발 271m)이 마을 중심부에까지 완만한 줄기를 뻗쳐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충효당(忠孝堂)의 뒤뜰에서 멈췄다고 합니다. 강의 북안(北岸)에는 부용대(芙蓉臺)의 절애(絶崖)가 병풍과 같이 둘러있어 이러한 산천 지형이 태극형(太極形), 연화부수형설(蓮花浮水形說)을 낳게 하였습니다. 마을의 주산명(主山名)이 화산(花山)인 것도 연화(蓮花)에서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화천(花川)은 낙동강의 중류이며 대략 200-300m의 강폭에 수심도 대략 2∼5m나 되어 작은 강이 아님을 알 수 있고 백사장과 노송림도 뺄 수 없는 승경(勝景)이라 하겠습니다. 대안지역(對岸地域)에의 교통수단은 나룻배였고 도선장(渡船場)은 부용대(芙蓉臺)의 동단과 강의 서안에 있어 광덕지방(廣德地方)에의 통로가 됩니다. 칠월기망(七月旣望)의 부용대하(芙蓉臺下)의 시회(詩會)와 줄불놀이는 유명한 거촌적(擧村的)인 행사였으며 이 강상류화(江上流火)와 별신(別神)굿놀이는 역사깊은 민간전승이며 별신굿에 쓰이던 가면(假面)들은 지금 국보(國寶)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안동(24㎞)이나 풍(8㎞)으로부터의 진입로는 화산(花山)의 북쪽 고개를 넘고 그 길이 마을의 중심부를 동-서로 관통합니다. 남촌의 충효당(忠孝堂)과 남촌택(南村宅),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북촌택(北村宅)은 그 역사와 규모에 있어 남·북촌 서로 쌍벽을 이루는 대규모 이며 전형적인 가옥들입니다. 지금까지 보물(寶物)이나 중요민속자료(重要民俗資料)로 지정된 가옥으로는 양진당(養眞堂)(보물 제306호), 충효당(忠孝堂)(보물 제414호), 북촌택(北村宅)(중요민속자료 제84호), 원지정사(遠志精舍)(중요민속자료 제85호), 빈연정사(賓淵精舍)(중요민속자료 제86호), 유시주(柳時柱) 가옥(중요민속자료 제87호), 옥연정사(玉淵精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겸암정사(謙菴精舍)(중요민속자료 제89호), 남촌택(南村宅)(중요민속자료 제90호), 주일재(主一齋)(중요민속자료 제91호), 하동고택(河東古宅)(중요민속자료 제177호)이 있습니다. 이들 중(中) 양진당(養眞堂), 충효당(忠孝堂), 남촌택(南村宅)(금무(今無)), 북촌택(北村宅) 등 몇몇 가옥들은 모두 구자형 몸채를 기본으로 하고 사랑채나 별당채를 일측면으로 연결하거나 후정(後庭)에 별설(別設)하는 등 발달된 주거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조선중기에 있어 사대부향제(士大夫鄕弟)의 정형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도 존재의의가 크다 하겠습니다.
이들 대주거(大住居)들은 모두 넓은 대지에 판축(板築)담장을 돌리고 후원(後園) 담장안에 사당을 두었으며, 장대한 몸채, 사랑채와 많은 곳간(庫間), 행랑채가 공통적으로 있고 특히 사랑방, 서실(書室), 대청, 별당(別堂)과 같은 문화적, 사회적 공간을 지니고 있는 점은 과거 신분제 사회에 있어 일반 서민들이 소유하던 최소한의 주거공간과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대주거의 주거생활에 있어 공간활용의 두드러진 경우는 대외, 사회적 교류공간인 사랑채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대가족의 집단생활과 원근친족의 내왕에 따른 부속공간의 활용이라는 점 등에서도 전반적으로 대가옥의 기능은 종합 ·조화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사랑방 외빈(外賓)의 끊임없는 내왕은 부분적으로는 지금에도 계속되는 현상으로서 그 상호 교류의 폭도 넓은 반면 숙식, 연집, 향연에 따른 경제적 부담은 막대한 것이었고 그러한 사대부적 생활은 대주거를 형성케 하는 필수적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같은 문화적 생활의 대규모화 현상은 사례(四禮)와 같은 통도의례시(通道儀禮時)에도 나타남은 물론이며 그 소비를 뒷받침하는 재정적 기반도 그에 비례해서 막대한 것이었던 점과 아울러 양반(兩班) ·사대부 생활의 대주거 필요도를 뒷받침하는 현상임을 이들 대주거에서 특히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중에 역사적 일면이 특히 농후한 충효당(忠孝堂) 종가는 그 원내(垣內) 후원(後園)에 서애(西厓) 이후의 많은 문물, 유품을 수장(收藏) ·전시하는 문중 박물관(博物館)인 영모각(永慕閣)이 설립되어 있습니다.
특히 서애(西厓)가 남긴 임란을 중심으로한 자료들은 하회마을의 역사적 무게를 크게 높이는 귀중한 존재라 하겠습니다.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과 보물 제160호 안동유씨 문서인 군문등록(軍門謄錄), 진사록(辰巳錄), 근폭집(芹曝集), 난후잡록(亂後雜錄) 등은 임진왜란을 몸소 겪은 영상(領相) 유성룡(柳成龍)의 수기들이며 보물 제460호 유서애(柳西厓) 유물인 서애선생 필첩(筆帖), 교지(敎旨), 공신록권(功臣錄券) 등의 많은 문서와 갑주(甲胄), 입영(笠纓), 홀(笏), 혁화(革靴) 등 서애유품 120여점이 있고 이밖에 서애 후대의 교지와 가전(家傳), 십기(什器), 서화(書畵) 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주형의 모자가 근사합니다.
손에 들고 있는 사이다가 잘 어올립니다.
스티브형이 들고 있는 미피인형도 잘 어올립니다.
이 마을에서는 지금도 전통적으로 입춘첩(立春帖)을 써붙이는 입춘행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충효당(忠孝堂)에서 써붙이는 춘첩(春帖)을 예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1979년 11월 경상북도 조사보고서).
세화연풍(歲和年豊), 국태민안(國泰民安)(솟을대문 우좌), 삼양(三陽), 태회(泰回)(중간 우좌), 취지무금(取之無禁), 충애노적(充隘露積)(고방문), 경천애인(敬天愛人)(통방문 ), 적어외(積於外)(뒤주), 정좌간서일매장(靜坐看書一昧長), 충효지외무사업(忠孝之外無事業)(사랑문좌우), 승우래운(勝友來雲), 이문회우(以文會友)(사랑방 측문 좌우), 이문회우(以文會友), 학우등사(學優登仕)(우측 사랑방문), 감고기미입춘(敢告己未立春)(사당문(祠堂門)), 입춘대길(立春大吉), 만사형통(萬事亨通)(일각문 ), 만수무강(萬壽無彊), 재수대통(財數大通)(조모방문(祖母房門) 우좌),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조모방(祖母房) 후문), 만사여의(萬事如意)(모방, 신부방(新婦房) 앞문), 정좌간서일매장(靜坐看書一昧長)(신부방(新婦房) 뒷문), 금백진진(金帛陳陳)(조모방(祖母房) 다락문), 강복양양(降福洋洋)(안방 옆문), 만당화기(萬堂和氣)(안방 옆문 중앙),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안방문 우좌), 신영자족(薪永自足)(부엌기둥), 서운상일(瑞雲祥日), 건양다경(建陽多慶)(부엌문 우좌), 감차지(甘且旨)(장광문), 충어내(充於內)(도장문),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안문 우좌), 주호진진(酒肴陳陳)(안방 다락문), 용지부갈(用之不竭)(곳간문). 춘첩(春帖)은 집집마다 문구가 다른 경우도 있으나 그 대의(大意)는 나라와 집안의 안녕, 풍농, 번영, 앙복, 소재(消災), 길상(吉祥), 장수, 화친, 등과(登科) 등을 기원하는 면에서는 모두 공통이라 하겠습니다.
하회의 유씨 친족조직으로는 유씨 대문회인 화수회(花樹會)가 있습니다.
대문회는 각분파를 총괄한 대동조직(大同組織)이며 위토(位土)의 관리와 제기사(祭基祀)의 봉행, 선조업(先祖業)의 계승, 친족간의 돈목, 후진양성에 관한 일 등을 관장합니다.
종손외에 최고령자 종신제인 대문장(大門長) 1인과 문장 2인을 두며 문장 밑에 의장소(義庄所)와 유사(有司) 2인을 두어 운영하며 매년 음력 10월 11일을 집회일자(集會日字)로 하고 있습니다.
대문회에서의 의결은 종손에게 최종결정권이 부여되고 있습니다.
의장소(義庄所)는 충효당(忠孝堂) 종손(유영하(柳寧夏))의 육대조(六代祖)가 창설한 일종의 구휼(救恤)기구였다고 하며 연간(年間) 약(約) 천석(千石)의 세수(歲收)가 있어 이것으로 주민의 구휼(救恤)에 충당했었다고 하나 근래 그 기반은 국민학교 설립기금으로 흡수되거나 토지개혁으로 전답이 수용되어 없어졌다고 합니다.
차문회(次門會)는 충효당(忠孝堂) 종파만의 문회(門會)이고 그 기능은 역시 대문회(大門會)의 경우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 마을의 관습으로서 다른 마을과 색다른 것으로 별신(別神)굿놀이와 강상류화(江上流火)인 줄불놀이가 있습니다.
별신굿은 동제(洞祭)와는 달리 연례적으로 행해지지 않았으며 3년, 5년, 10년에 한번 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짐과 아울러 신탁(神托)이 내려짐으로써 행해지던 오신행사(娛神行事)입니다.
12월 말에 준비가 시작되어 정월 초에 행사가 이루어졌으며 이 마을의 비동족 농민들이 행하던 놀이로서 1928년의 행제후 단절되었다가 최근에 그 잔존자에 의해 명맥이 다시 이어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래하는 우리나라의 가면극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줄불놀이는 칠월 십오일 부용대하(芙蓉臺下)의 시회(詩會)에 곁들인 일종의 뱃놀이로서 그 비용은 동족성원들이 부담하고 비동족들의 노력제공으로 행해지던 놀이입니다.
동족집단의 성원만이 참가할 수 있었던 놀이로서 시회와 강상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돋군다는 면에서 별신(別神)굿이나 다른 제의(祭儀), 놀이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이 마을의 특기할만한 관습이라 하겠습니다.
배가고픕니다.
하회마을을 나서면서 있는 안동민속음식점에 들릅니다.
냉면과 간고등어를 주문합니다.
식사도 시킵니다.
간고등어가 생각보다 맛이 좋지는 않습니다.
안동마냉면도 특별하게 맛있지는 않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서울로 갈 준비를 합니다.
돌아가는 차에서는 피곤해서인지 다들 잠을 잡니다.
여주에서 프리미엄 아울렛으로 향합니다.
상당히 큽니다.
미국 첼시의 프리미엄 아울렛을 한국의 신세계에서 들여왔습니다.
크게 눈에 띄는 브랜드는 없습니다.
윈도우 쇼핑만 합니다.
간단하게 간식도 먹습니다.
저녁이 되기 전에 서울에 도착합니다.
작을 것을 소중히 할수 있는 피서입니다.
한국에 문화재가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