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성과 남성이 친구가 될 수 있다?
철딱서니 없는 나는 이성도 친구가 가능하다고 믿어 왔다.
20대(代)때까지 친구라고 규정지어진 사이에서 커플이 나오면 나도 모르는 배신감을 느끼곤 했다. 그들은 이성간의 우정에 관한 나의 신념을 깨뜨린 아주 나쁜 적들이었다.
그러나 난 이미 왕성한 남친으로부터 내 순결을 사수해야 한 힘겨웠던 지난 20대의 경험을 지나 알 건 다 알고, 더 알지도 모르는 30대(代)가 되어버렸다.
이 이론은 상대방이 게이가 아닌 이상 철저한 감정의 벽이 둘 사이에 존재해야 성립될 수 있는 가정(假定)임을 충분히 알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 친구가 여전히 많은 건 오로지 이러한 나의 신념을 고집해온 35년간의 결과물인 것이었다. (으쓱)
2. 사랑과 우정의 혼돈은 파멸(이른바 개쪽)
9월, J와 나는 공원에 앉아서 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매우 친한줄 알고 지낸 8개월이었지만, 우리가 어색한 사이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8 개월 전 우리는 둘이 아니었다. 일명 crazy woman(이후 CW라 칭하겠음)과 우리 둘은 찢어질 수 없는 삼총사이었다. 이전의 우리 셋은 나름 긴 기간, 가족과 불리 된 채 혼자 자고, 혼자 먹고, 혼자 쇼핑하는 것에 지극히 익숙한 싱글즈였다. 그런 우리가 그것들을 같이 하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가 된지 8개월이었다. CW(crazy woman)는 J와 나를 어머니처럼 챙겼다. 30을 한참 넘어버린 한가한 노처녀인 나는 그녀를 -광(狂)기가 지나치게 많긴 했지만- 가족처럼 유난히 의지했고, 어렸을때 부터 외국을 전전 할 수 밖에 없었던 미국인 J는 그녀에게 유난히 애착을 보였다. 결국 CW가 어학원을 옮길 때, 나와 J도 그녀를 따라 직장을 옮길 정도로 우린 그녀를 신봉(信奉)했다.
밥 때가 되면 그녀에게서 TEXT MASSAGE가 왔고, 단 한번의 거절도 없이 우린 함께 식사를 하거나 장을 봤다. 그리고 마지막은 항상 J의 집에서 맥주로 마무리했다. 내가 술이 취해 J의 침대에서 자면 그 둘은 내가 깰 때까지 술을 펐고, CW가 취해 그의 침대에서 자면 나와 J의 이성적인 대화가 오갔다. 우리는 함께 돈을 벌었고, 함께 식사를 했으며, 함께 여행을 갔고, 함께 친구를 만들고,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CW신봉자 둘(J와 나)은 서로가 고집이 세고(성격이 더러우며), 직설적이고(싸가지 없고), 거짓말을 못하는(융통성조차 없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헤어졌던 남친과 다시 만났을 기간에는 잠시 만남이 중단됐었지만, 그와 다시 헤어진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CW와 J는 다시 약속을 마구잡기 시작했고 우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4살의 키 크고 잘 생긴 J는 다른 외국 남자들과 달리 유달리 예쁜 한국 여자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유난히 억세고 광기조차 있는 38살 CW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남달리 그녀를 챙기고 따르는 J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그의 대답은 매우 간단했다.
“글쎄! 내가 조금만 친절을 배풀어도 한국여자애들은 쉽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나와 쉽게 잠을 자. 그래서 사실 한국여자애들은 만나는 게 조심스러워. 그런데 너희는 달라.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나를 남자로 좋아하지 않잖아. 사실 그게 너무 편해.”
CW에 대한 그의 감정을 그는 항상 진한 우정이라 칭했다. 하지만 CW는 자신의 대한 그의 감정을사랑이라 칭했다. 사실 난 그 둘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 후로 8개월 뒤, 승진에 눈이 먼 CW는 같은 직급에 있는 J와 대립했고, J가 승리를 하게 이르자 그녀는 J가 그녀와의 성관계를 내심 원하고 있다는 소문을 사람들에게 내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소문은 그녀에게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사건이 되었다. 그 이후로 모든 직원들이 J와 나에게 그녀가 낸 소문에 대한 확인 작업이 들어갔고, 당연히 그의 대답은 “NO WAY”였다. 그리고 나는 J에게 손을 들어줬다. 그 이후로 직원들은 그녀를 미친년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결국 어학원을 더러운 닉네임을 달고 그만 둬야 했고, 난 나도 혹시나 그녀처럼 될 까봐 은근히 조심스러웠다.
CW와 완전히 갈라진 후 그는 한국사람들에게 마음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 후 J는 나 이외에 다른 한국인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녀가 없는 만남을 조용하게 가졌다. CW의 입은 쉬는 순간이 없었으므로, 그녀가 빠진 우리 둘의 만남은 정말 조용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많은 여자들의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여자들에게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DRINKING MONK(술마시는 땡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난 여자들이 널 왜 좋아하는 지 모르겠어. 넌 너무 심심하고 게을러, 극장도 안가고, 밖에 나다니는 것도 안 좋아하지. 맨날 먹는 건 라면이고, 마시는 건 맥주자나. 오로지 관심은 중동에 있고, 한국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레게(REGGAE) 음악만 들으니 말야. 그리고 젤 위험한 건 널 좋아하는 여자애들한테 너무 싸가지가 없다는 거지”
그러면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응대했다.
“(웃음)그렇게 얘기해 주니 참 고맙군. 나는 그렇게 거침없이 말하는 네가 좋아. 그리고 내가 한국 여자애들한테 관심이 없는 건 바로 그런 나를 이해해 주는 여자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그 여자들에게 내 감정을 솔직히 말했을 뿐이야. 그건 싸가지 없다고 표현하는게 아니라, 솔직하다고 표현하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좋아하는 그 여자들을 나도 이해 못하겠어”
“너 그렇게 살면 결국 누가 네 주변에 남아있겠어?”
그러자 그의 대답은 매우 간단했다.
“잘 들어봐. 혼자 사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난 너처럼 재미없게 살진 않을 거야. 인생은 더불어서 아름다운 거야, 이 화상아.”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 할 때가 좋은 거야. 그 감정을 즐겨!”
3. 우정만들기
어느 날 나는 굉장히 친하게 지내는 언니 아기의 돌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혼기를 훌쩍 넘겨버린 노처녀 노총각들에게 결혼식이나 돌잔치는 돈만 보내더라도 피하고 싶은 이벤트다. 약 3년 전 나는 나의 중학교 동창의 돌잔치에 혼자 가게 되었다. 그 돌잔치의 사회자는 ‘안어벙’이라는 개그맨이었다. 그 개그맨이 신랑쪽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이다. 그날 그는 유난히 내쪽을 자주 보았다. 연예인과 비교하면 절대 예쁘거나 특별할 것이 없는데 왜 그런 행동을 하는 지 의아해했다. 알고 보니, 내가 혼자 앉아서 먹던 그 테이블은 안어벙과 신랑측의 가족 테이블이었고, 그는 사회를 보다 자기 가족 사이에 껴서 꿋꿋하게 접시를 두 세번이나 날라다 먹는 낯선 인물에 대해 궁금해했던 것이었다.
꼭 그날의 경험 때문 만은 아니다. 혼자 앉아서 부패음식을 주워 먹어야 하는 상황은 나를 참 힘들게 한다. 그 와중에 추첨에 당첨까지 되면 정말 우울하다. 나는 이런 상황을 그 언니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고 안 가면 안되겠냐고 묻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그럼, 여자 친구라도 데려오든가!”
그 말에 나는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고민하다 옆에 있던 J를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J, 너 내 친구 아가 첫 번째 생일 파티에 같이 안 갈래? “
그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한가지 미끼를 더 던졌다.
“공짜 맥주도 주는데……”
그러자 맥주에 환장한 그는 더 생각 안하고 “YES”를 외쳤다.
우리는 돌잔치에 갔고, 모든 사람들은 J에게 관심을 보이느라, 나란 존재는 없는 것과 같았다. 나는 혼자 접시를 들고 다녀도 그날만은 슬프지 않았다. J는 공짜 병맥주와 처음 보는 돌잔치에 매우 흥미로워했다. 우린 추첨에도 당첨되어 1년도 넘게 쓸 수 있는 양의 치약을 선물로 받았다. 난 그와의 관계를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한국 문화를 보고 싶어 하는 외국인 이라고 일축했고 아무도 더 이상 둘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다.
J의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둘 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우리 둘은 적당히 취했고, 나는 걸려온 그의 부모님과 술김에 통화까지 했다. 그의 부모님은 이미 나와 그가 절친한 친구 사이라는 걸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J의 방에 있는 세계 지도를 보며 여행계획을 말했다. 또 다시 혼자 떠나는 여행이어서 우울하다고 얘기했다. 다음에 우리나라를 떠날 때는 분명 둘이 가기로 했었는데…….. 그러자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J가 물었다.
“나 지금 너한테 키스해도 돼?
한번도 그런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던 요청이어서 많이 당황했다. 나의 대답은 간단했다.
“NO”
그는 다시 물었다.
“WHY?”
청결을 확인할 수 없는 구강상태와 설왕설래(舌往舌來)를 한다는 건 비위생적으로 생각이 됐고, 또한 그를 남자로 생각해 본 일이 없어 매우 당황했다. 그러나 내 생각을 이번만큼은 그대로 말 할 수가 없었다. 유치하지만 나름대로 멋진 멘트를 날리고 싶었다.
“넌 내 남자친구가 아니잖아. 난 그런 건 남자친구랑만 해야 된다고 생각해.”
그는 피식 웃었다. 소위 아줌마이어야 하는 내가 이런 말 한마디에 당황해 하는 것이 재미있었나 보다. 어색해서 세계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자 그는 다시 요청했다.
“정말 너와 키스하고 싶어.”
난 내가 생각지도 못한 멋진 멘트를 날리게 되었다.
“난 네가 친구로 매우 좋고, 우정의 선을 넘어 어색한 관계가 되는 게 싫어. 그리고 네가 이런 생각을 가진 나를 존경했으면 좋겠어.”
그러자 그는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I respect you (널 존경해).”
4. 또 한번의 사랑과 우정사이.
우린 그 사건 이후 더욱 더 가까워졌다. 이미 많은 것을 공유하게 된 우리의 만남은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어느날 힘들다고 울고 있는 나에게 그는 무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Just wash your hands(그냥 깨끗이 손 털어).”
“I have tried. But I couldn’t.(나도 노력했어, 근데 안 되는 걸 어떡해?)
How can you solve the problems(너는 어떻게 해결했는데?)?”
“I had cried for 2 years since I had to leave my family. Then I got it. It’s just life. So we don’t need to hurt ourselves with tear. (내가 가족을 떠난 이래로 2년 동안 울었어. 그리고 깨달았지. 그저 인생일 뿐이라는 걸. 아파할 이유도, 울 이유도 없는 거야”
그와 반대로 아직도 눈물이 많은 나는 그렇게 반응하는 그가 얄미웠지만, 우리는 뭔지는알 수 없지만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모든 걸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굳어버린 그의 감정이 부러웠고, 그는 작은 것에도 아파하는 나의 감성을 때론 부러워했다.
금강의 철새를 보러 간 내게 그는 밤늦게 전화를 했다. 혼자 모텔에서 자는 게 무서웠던 나는 그에게 전화를 못 끊게 했다. 나는 춘장대에서, 그는 서울에서 각자 맥주를 마시며 약 두 시간 정도 통화를 한 것 같다.
눈이 펑펑 오는 날 또 언제나 그렇듯 맥주로 시작해서 소주를 걸치고, 그의 집에서 라면으로 마무리했다. 그날 우리 둘 사이에서는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내게 뜬금 없이 대답하라고 말했다.
“yes or no?”
나는 정말 그의 질문이 뭔지 몰랐다.
“what is your question?(너의 질문이 뭐야?)”
라고 물었다.
“you don’t know what the question is(질문을 모르겠다고?)?”
그는 되물었다.
분위기가 어색해 문을 나서려 했다. 그는 다시 내게 물었다.
“What is your answer(너의 대답이 뭐야?)?”
난 그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라 그냥 나왔다. 거의 매일 통화를 하던 우리였지만 몇 일 동안 통화는 없었다. 몇 일 후에 그가 저녁초대를 했다. 어색하게 그만의 김치찌개를 먹고, 어색하게 다큐멘타리를 봤다. 마지막으로 밥 말리의 일대기를 보면서 그는 뭔가를 듣고 싶어 했고, 나는 뭔가를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이 뭔지, 나의 대답이 뭔지 모르는 체 그의 집을 나섰고, 그는 나를 보내줬다.
5. 여성과 남성사이의 우정은 가능하다.
필리핀으로 곧 일하러 가는 내게 그는 마지막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리고 나를 그리워할 거라는 말을 남겼다. 내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 다른 국적의 사람이고, 한국에서 유일하게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외국인이라니 우습다. 필리핀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제일 반기는 사람도 그였다. 귀국한 다음날 우린 삽겹살을 먹고 또 맥주를 마시고 소주로 마무리 했다.
“필리핀에 있는 동안 메일 한 통은 보낼 줄 알았어.”
“글쎄. 음! 좀 우스운 얘긴데, 네 이 멜 주소를 몰랐을 뿐이야.”
그러자 그는 지폐에다 자신의 이 메일 주소를 적었다. 그리고 그 지폐로 딱지를 접어 내 지갑 안에 넣어줬다. 그리고 몇 일 뒤면 다시 호주로 떠나는 내게 말했다.
“너는 다시 돌아 올 곳이 있어 좋겠다.
사실 그 말은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내가 자유롭게 돌아 다닐 수 있는 이유는 한국에서 무엇도 내 발목을 잡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난 내가 어디에 정착을 해야 할지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무언가가 강하게 나의 발목을 잡아주기 원한 지 근 10년이 되가는 것 같다. 그가 말한 “돌아올 곳”이란 말은 내게 생소한 말이었다. 오히려 그 방면에서 그가 더 나보다는 좋아 보여 말했다.
“너도 돌아갈 곳이 있잖아. 오히려 돌아갈 곳으로 따지면 네가 더 나보다는 확실한 거 같은데?”
그러자 그가 말했다.
“어디?”
“미국, 네 부모님이 계신 곳.”
“열 세살 때부터 부모님과 따로 살았고, 그 이후에 두 세 번 더 만난 거 밖에 없는 가족인데, 내가 돌아 갈 곳이라고 할 수 있을까? 봐봐. 이방에 네가 보고 있는 물건이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야. 그 이상 아무것도 내 것이란 없어. 지금 보이는 이 물건을 가지고 어디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나. 아무것도 나를 붙잡지 않아. 오히려 너가 나보다 그런 면에서는 더 행복한 거 아냐? 너는 확실히 한국이라는 곳에 돌아오면 되잖아”
나도 되물었다.
“날 누가 기다린다고?”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럼 나는 누가 기다릴까?”
그제서야 우린 알았다. 우리가 그 동안 공통점이라고 알고 있던 우리의 역마살은 정착할 곳을 잃어 버린 것에서부터 출발 했다는 것을……
추석과 구정이 되면 더 외로워 지는 한국인과, 크리스마스가 되도 같이 밥 먹을 가족이 10년동안 없었던 미국인의 공통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