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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高麗史

김상훈 |2009.03.02 10:11
조회 351 |추천 0

고려사 - 高麗史

 

 

헌애왕후(천추태후) [獻哀王后, 964~1029]

 

고려 경종의 비. 태조의 아들 대종(戴宗:추존왕)의 딸. 목종의 어머니. 헌정왕후와 친자매로 함께 경종을 받들었다. 외척인 김치양과 음탕한 생활을 공공연히 하며, 그 사이의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왕실의 유일한 후계자 대량원군 순(詢:헌정왕후의 소생으로 뒤에 현종)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 유배되었다.

태조의 아들 대종(戴宗:추존왕)의 딸. 목종의 어머니. 헌정왕후(獻貞王后)와 친자매로 함께 경종을 받들었으며, 외가의 성을 따라 황보(皇甫)라 하였다. 경종이 죽고 오빠인 성종이 즉위했다. 천추궁(千秋宮)에 있을 때, 외척인 김치양(金致陽)의 출입이 잦아 추문이 퍼지자 성종이 김치양을 유배시켰다.

 

997년(성종 16) 성종이 죽고 아들 목종이 즉위하자, 천추궁에서 섭정하여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불렸다. 김치양을 유배지에서 불러 우복야 겸 삼사사(右僕射兼三司事)에 임명하여 음탕한 생활을 공공연히 하였으며, 그 사이에서 생긴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기 위하여 왕실의 유일한 후계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헌정왕후의 소생으로 뒤에 현종)을 죽이려고 하였다. 1009년 병든 목종이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임명하자 김치양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대역을 감행하려 했으나, 서북면도순검사 강조(康兆)가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대량원군을 즉위시키고 김치양을 죽여 난을 평정하였다.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황주(黃州)에 내려가 여생을 보냈다.

 

천추태후는 경종의 황비로 동생인 헌정황후가 함께 경종의 황후가 되었다. 그러다가 목종이 2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경종이 붕어하자 성종이 즉위하였고 성종은 불교행사를 폐하고 연호도 폐하고 유교통치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3성6부 체제를 만들었는데 이 제도는 황제국가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 이다. 즉 내부적으로는 황제국 체제를 완성한 것이다. 성종이 후사 없이 죽자 헌애왕후의 아들 목종이 즉위하는데 헌애왕후가 천추궁에 머물면서 권력을 휘둘러 사람들은 헌애왕후를 천추황태후라 불러서 천추태후라고 알려진 것이다.

 

문제는 목종이 동성애자라서 후계자가 없었다. 그런데 천추태후와 김치양사이에서 황손이 생산되자 천추태후는 목종후계자로 김치양소생을 올리려하자 대신들은 왕욱과 헌정황후의 소생인 현종을 후사로 올리자고 받아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유학자들이 천추궁에 불을 지른다. 때마침 목종이 강조에게 밀서를 보내서 황도로 입위할 것을 명한다. 그런데 천추궁의 변란소식을 들은 강조는 황도에서 변란이 일어 난지 알고 변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정예군5천을 이끌고 황도로 가던중 평주에서 황제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황명 없이 군사를 움직였으므로 그는 서경으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역모로 몰려죽을 판이었다.

 

그래서 주변설득에 힘입어 황제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하고 황도로 난입하여 김치양부자를 참살하고 태후와 황제를 폐위시켜 유배를 보낸다. 그다음 자객을 보내 목종을 시해한다. 이에 대신들과 강조의 옹립으로 대량원군 즉 현종이 고려8대 황제로 등극하는 고려역사상 불륜의 아들인 대량원군이 고려의 만인지상 일인지하인 황제가 된 것입니다. 현종은 아주 영민하여 등극하자말자 황권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팔관회와 연등회를 부활시켰다. 이때 거란황제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한다. 이에 현종은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강조를 선봉에 세워 21만대군으로 막게 하였는데..

이는 현종이 강조가 막으면 다행이고 못 막으면 간단하게 황제를 시해한 난신적자를 척결 할 수 있는 기회로 현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강조는 대패하여 전사하였고 현종은 몽진을 떠났다. 황도가 함락되자 내조를 약속하여 거란군이 물러갔으나 지키지 않자 다시 침공해온다. 이때 귀주에서 강감찬이 20만 대군으로 침공한 소배압 10만 대군을 몰살시켰다. 이후 현종의 개혁정치로 고려는 태평성대를 누리며 황금기로 들어가면서 거란은 두 번 다시 침공하지 못하였다.

 

김치양 [金致陽, ?~1009]

 

고려 목종 때의 권신(權臣).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 황보씨의 외척. 목종이 즉위하고 천추태후(헌애왕후)의 총애로 권력 남용과 횡포가 심하였으며, 목종까지 살해하려 하였다. 1009년 강조의 정변으로 순(현종)이 즉위하자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본관 동주(洞州: 황해도 瑞興).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외척(外戚). 승려를 사칭하고 천추궁(千秋宮)에 출입하여 추잡한 소문이 자자하였으므로 성종(成宗)이 멀리 장배(杖配)하였으나, 목종이 즉위하자 천추태후(千秋太后: 헌애왕후)가 불러올려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을 시켰다가 이어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事)로 임명하자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하였다.

친당(親黨)을 요직에 앉히고 뇌물을 공공연히 받아 300여 칸의 저택을 짓는 등 횡포가 심하였다. 태후와 간통하여 불의의 아들을 낳고 그를 왕세자로 책봉하고자 대량군(大良君) 순(詢)을 살해할 모의를 하다가 실패하고, 다시 유일한 혈통인 목종을 살해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하였다. 1009년 강조(康兆)의 정변(政變)으로 순(詢: 현종)이 즉위하자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그의 일당과 태후의 친척 이주정(李周禎) 등은 해도(海島)로 유배되고 왕과 태후는 충주로 내쫓겼다.

 

강조 [康兆, ?~1010]

 

고려시대의 무신.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현종 즉위 후 중대사(中臺使)가 되었다. 거란의 성종이 침입해 오자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싸웠다.

 

목종 때 중추사우상시(中樞使右常侍)로서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다. 1009년(목종 12)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외척 김치양(金致陽)과 더불어,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를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대량군(大良君) 순(詢: 현종)을 옹립하고 목종을 시해하였다. 현종 즉위 후 중대사(中臺使)가 되었고, 이듬해 거란의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데 대한 문죄라는 명목으로 4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30만의 군사로 통주(通州)에서 싸우다 사로잡혔다. 성종으로부터 자기의 신하가 되라는 회유와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거절하고 살해되었다.

 

강조의 정변 [康兆─政變]

 

1009년(고려 목종 12)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일으킨 정변.

고려 제7대 왕 목종이 18세에 즉위하였으므로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을 하게 되자, 귀양보냈던 천추태후의 정부(情夫) 김치양(金致陽)을 다시 불러들였다. 목종은 20세가 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였는데, 1003년(목종 6)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 때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목종의 뒤를 잇게 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 음모를 안 목종은 욱(郁)의 아들 당숙 대량군(大良君)에게 자기의 뒤를 잇게 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에게 왕궁을 호위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나라 안에는 온갖 뜬 소문이 유포되었는데, 임금은 병환이 몹시 위중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고, 김치양 일파는 임금이 병중에 있음을 기화(奇貨)로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목종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나돌게 되었으며, 이렇게 되자 강조는 김치양 일파를 몰아내고 목종의 뜻대로 대량군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다. 강조가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개경으로 오던 도중에 목종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강조는 어차피 목종으로서는 나라를 흥하게 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부하 제장(諸將)과 의논한 후 별장(別將)으로 하여금 대량군을 맞이하게 하고 자신은 개경으로 들어가 목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다. 목종으로서는 스스로 불러서 화를 당한 셈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킨 후 대량군을 내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와 동시에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천추태후와 그 일당을 모두 귀양보냈으며, 1009년에는 폐위시킨 목종을 시해하였다. 강조가 오랫동안 고려 조정을 어지럽혔던 천추태후 ·김치양 일파를 숙청한 일에 대해서는 백성의 지지를 받았으나, 그를 믿고 불러들인 죄 없는 목종을 시해한 일과 또 스스로 정권을 잡은 일에 대해서는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정변은 거란에게 고려침입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주었다. 당시 거란에는 성종(聖宗)이 있었는데, 그는 강조의 이신벌군(以臣伐君)을 문책한다는 표면적인 명분을 내걸고 내심으로는 앞서 서희(徐熙)의 외교수완에 말려들어 양보한 강동6주를 회복할 셈이었다. 그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하여 1010년(현종 1) 11월 통주(通州:평북 선천 서북쪽)에서 강조의 군사를 대파하고 강조를 사로잡았다.

 

강감찬 [姜邯贊, 948~1031]

 

생애

948년 : 금주에서 태어남. 태어나던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짐. 지나가던 중국사신이 이를 보고 큰 인물이 날것임을 예언함. 그 후 귀주대첩 후 다시 중국사신이 와서 강감찬을 보고 북두칠성 중의 문곡성이라 칭함.

954년 : 아버지에게 학문과 무술을 배우기 시작(7세)

963년 : 16세 이후 3년여간 세상을 두루 다님.

983년 : 36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제술과에 장원으로 급제함.

992년 : 정4품 벼슬인 예부시랑에 오름.

993년 : 거란의 소손녕이 쳐들어 옴. 서희의 외교로 거란군을 물러나게 함.

1010년 : 거란 왕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옴. 신하들이 거란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홀로 반대하고 현종을 남쪽으로 피난하게 함.

1011년 : 한림학사 승지로 승진함.

1012년 : 동북면 행영병마사로 취임

1014년 : 중추사로 승진함. 군사훈련에 힘씀. 이따금 고려로 쳐들어오는 거란군을 물리침.

1016년 : 이부상서로 승진함.

1018년 : 서북면 행영병마사가 되어 거란에 침입에 대비함.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옴. 상원수로 출전하여 흥화진에서 강물을 이용하여 거란군을 크게 무찌름.

1019년 : 뛰어난 지략으로 개경 함락을 단념하고 돌아가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찌름(귀주대첩). 영파역까지 나온 고려 현종의 뜨거운 환영을 받음.

1020년 : 벼슬에서 물러남. 특진 검교대사, 천수현 개국자의 벼슬과 작위 받음.

1030년 : 문하시중으로 임명됨.

1031년 : 세상을 떠남

 

고려시대의 명장.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달아나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본관 금주(衿州:서울 관악구 봉천동), 초명 은천(殷川).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朝臣)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서경유수·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다.

 

-강감찬 장군의 생애-

 

948년 정종3년-1031년(현종22년)

 

경주로부터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여청(餘淸)의 5대손이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궁진(弓珍)의 아들이다. 고려시대의 명장,시호는 인헌,본관은 금주(지금의 여흥), 어려서는 은천(殷川)이라고 불렸으며 지금의 서울 봉천동에서 부유한 공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겼으나 침착하고 의지가 강하였다. 또한 마음이 강직하고 청렴검소하여 옷차림은 항상 중인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983년(성종 2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1010년 (현종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침입했다. 이 때 강조가 나가 싸우다 지자, 신하들은 왕에게 항복하기를 권했으나, 끝내 이에 반대하고, 하공진을 적에게 보내어 설득시켜 물러가게 하였다. 그가 서경 유수에 임명되었을 때, 거란은 다시 고려를 괴롭히기 시작하여 거란이 고려의 강동 6주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자, 1018(현종 9) 거란은 다시 10만의 군사로 쳐들어왔다.

이 때 70세였던 그는 20만 군사를 이끌고 흥화진으로 진군하여 거란군과 싸웠다. 여기서 그의 군사들은 큰 밧줄에 쇠가죽을 꿰어 삽교천(의주 동쪽의 큰 냇물) 상류의 물을 막고, 부근의 산속에 숨어있다가 적군이 나타나자 갑자기 막았던 강물을 터놓아 적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적장 소배압은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황해도까지 밀고 내려왔으므로 이들과 싸움을 벌여 물러나게 하였다. 도망치는 적군을 공격하여 귀주에서 완전히 쳐부수었는데, 이것을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

그 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였다. 뒤에 강감찬은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여 조용히 살았다.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낙성대는 그가 태어난 사적지이다. 저서로는 '낙도 교거집(樂道郊居集)','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84세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크게 장사를 지내 주었다

 

귀주 대첩

 

귀주 대첩의 주역인 강감찬

날짜 : 1018년 현종

장소 : 귀주(龜州)

결과 : 고려의 승리

교전국 : 고려 / 요나라

지휘관 : 강감찬, 강민첨 / 소배압

병력 알 수 없음 / 10만여 명

귀주 대첩(龜州大捷)은 1018년 고려 현종 때 요나라(거란) 침략군을 귀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전투이다.

 

전쟁의 배경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거란과는 거리를 두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려의 정책과 더불어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할 경우,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고려를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 정도로 제압하든지 최소한 송나라와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993년(성종 12) 1차 침입에서는 소손녕이 이끈 거란군에게 승리한 뒤 서희가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획득하였고, 1010년(현종 1) 2차 침입에서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해 왔으나 별 소득없이 돌아갔고, 1018년(현종 9년) 3차 침입에서 강감찬이 귀주대첩을 이루었다. 이때 거란은 고려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게 하였다.

 

경과

 

이에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봉하고,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소배압을 막도록 하였다. 고려군은 압록강 유역 흥화진의 삼교천(三橋川)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워 대승하였으나, 거란군은 수도인 개경을 목표로 우회하여 계속 남하하였다. 남하하던 거란군은 자주(慈州)에서 다시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큰 타격을 받았으나 계속 남하하여 개경 근방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귀주에서 매복하고 있던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달아났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다. 이것을 귀주에서 크게 이겼다고 해서 귀주대첩(龜州大捷)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결과

 

그 결과 요나라는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헌정왕후 [獻貞王后, ?~?]

 

고려 경종의 비. 태조의 아들 대종(戴宗:추존왕)의 딸. 헌애왕태후와 친자매로 함께 경종의 비가 되었으며, 경종이 죽은 뒤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며 대종의 동생인 욱(郁:安宗)과 정을 통하여 현종을 낳았다. 현종이 즉위하자 효숙왕태후에 추존되었다.

태조의 아들 대종(戴宗:추존왕)의 딸. 헌애왕후(獻哀王后)와 친자매로 함께 경종의 비가 되었으며, 성은 외가의 성을 따라 황보(皇甫)라고 하였다. 경종이 죽은 뒤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며 대종의 동생인 욱(郁:安宗)과 정을 통하여 현종을 낳았다. 현종이 즉위하자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에 추존되고, 1017년 혜순(惠順)으로 가시(加諡)되었으며, 1021년 인혜(仁惠), 1027년(현종 18) 선용(宣容), 1252년(고종 40) 명간(明簡)으로 가시되었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開豐郡)의 원릉(院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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