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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황동익 |2009.04.16 22:18
조회 35 |추천 0

 

사람들이 좋다, 좋다 하길래 보러 갔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좋은 영화의 조건이 만약 한 인간에게 그가 경험한 것 이상의 것을 전해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는가라면,

 

<워낭소리>는 분명 좋은 영화의 조건에 맞아 떨어질 것이다.

 

'워낭'이라는 것은 소 목에 달아놓는 방울을 뜻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소에 관한 영화이다.

 

하지만 단순히 소를 다룬 동물 다큐가 아니라 소를 통해 인간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영화이다.

 

요새는 기술의 발달로 예전처럼 소를 써서 농사를 짓는 곳이 없다. 기계를 써서 농사 전반에 걸친 모든 일을

 

해결한다. 그리고 농약을 뿌려서 훨씬 싱싱해 보이는 농작물들을 거둬낸다.

 

영화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시 여겨지고 있는 기계를 통한 농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영화 속 주인공 할아버지는 소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일이 직접 손으로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는다. 그리고 소에게 줄 꼴도 직접 베어다가 지게로 싣는다. 농약은 뿌리지 않는다.

 

소에게 먹여야 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우마차에 지게에 실어온 꼴들을 한가득 싣는다. 소는 할아버지와

 

꼴을 싣고 천천히 느릿느릿 집으로 향한다.

 

차라리 걷는게 훨씬 빠르겠다, 싶을 정도로 보는 사람이 조바심 나는 세월아, 내월아 하는 속도이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소의 눈망울은 시간이 짧고 길고를 보지 않는다. 할아버지 역시 지나가는 시간을 구태

 

여 바라보지 않는다.

 

소와 할아버지는 마치 한몸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길을 간다. 간간히 소를 향해 할아버지가 지르는 워,워

 

소리 이외에는 소와의 표면적인 소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함께 있는 그 시간, 소에게는 평생인 40년 넘는 시간, 그리고 할아버지의 반 평생이 넘는 시

 

간이 인간과 소 사이의 종을 넘어선 유대를 생성한다.

 

유대라는 것은 흘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를 통해서 이어지기도 하지만 꼭 언어가 아니더라도

 

또다른 의미의 소통을 통해 유대는 흐른다.

 

그리고 마치 강물이 흐르고 강물이 지나간 자리가 점점 더 깊은 골을 지어내 더 힘차게 흐르는 것처럼

 

할아버지와 소의 유대 역시 40년이라는 세월쯤 되고보면 다른 샛길로는 새지 않고 오직 깊은 골을 따라

 

둘 사이를 오가게 되는 것이다.

 

40년이란 세월은 강산이 네번은 바뀔 세월이고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장성해서 손자들까지 낳을 정도의 세

 

월이다.

 

그 긴 세월, 소는 말이 없다. 아무리 할아버지가 모질게 굴고 일을 시킨다 하여도 소는 음메하는 소리밖에

 

하지 않는다.

 

아마 소에게 처음에 우마차를 끌고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노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40년의 세월이 지나고 났을 때, 그것이 소의 인생이 되고, 할아버지의 인생이 되고 그렇게 되면

 

소에게나 할아버지에게나 농사는 노동 이상이 되는 것이다. 단지 돈을 버는 것 이상의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정을 생산하는 일이고, 할아버지와 소의 종을 넘어선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며

 

유대를 흐르게 하는 일인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요새는 농가에서 농기계를 사용한다. 그만큼 일할 일손도 부족하고 그 편이 훨씬 편하

 

고 이해타산에도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밭 바로 옆에서 대조적으로 농기계를 이용해 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는 농부가 보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끝끝내 소를 고집한다.

 

그것은 농기계와 사람 사이에서 흐를 수 없는, 심장이 팔딱 팔딱 뛰고 음메하고 울고, 슬픈 눈망울로 눈물도

 

흘릴 줄 아는 소와 사람 사이에서만 흐를 수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살아계셨을 적엔 두분께서도 소를 키웠

 

다. 시골에 가면 음메하고 우는 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핀잔을 주는 외할머니와 대거리를 하시는 외

 

할아버지의 모습도.

 

영화 속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소의 모습 속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팔아버린

 

소의 모습이 종종 오버랩됐다.

 

영화는 소가 죽기 1년부터 소가 죽을 때까지의 모습을 그린다. 죽음이란 것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소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어쩔 수 있겠는가. 인간인 것을, 소인 것을. 서로를 부둥켜 안으면 그것이 더 슬픈 것이겠는가 .

 

소는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고 할아버지를 실어다 나르고 할아버지 역시 온 몸이 성치 않으면서도 자꾸

 

들에 나간다.

 

들이란 것은 소에게나 할아버지에게나 소통의 장이었고, 소통의 장이란 또한 추억의 장이기도 한 까닭일 것

 

이다. 그것이야말로 할아버지가 표현할 수 있는 슬픔이고, 소가 표현할 수 있는 슬픔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슬픔이면서 할아버지와 소가 표현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다.

 

자꾸만 들로, 들로 나가는 소도 할아버지도 서로에게 입으르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담담히 서로에게

 

내 비치는 그 무엇은 사랑이고, 들이란 바로 그 사랑의 장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을까.

 

인간끼리도 서로 못 잡아먹고 서로를 짓밟고 서로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이 곳. 차가운 콘크리트

 

와 시커먼 매연이 가득한 이 곳. 인간은 서로에게 인스턴트 식 사랑을 표현하고, 시간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빨리 빨리를 외치며 어딘지도 모르는 그 곳으로 일단 가고 보자는 식으로 달려 간다.

 

느린 것은 사치이고, 효율성이 떨어지는데도 지속하는 것은 멍청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 곳.

 

도시에서 느낄 수 없었던 인간과 인간의 유대라는 것을,

 

난 이 영화에서 한 늙은 노부부와 소를 통해 느낀 것 같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서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와 인간에게서 느낀 감동 때문에, 왠지 서글퍼지는 사람은 나 하나일까.

 

더 이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지 않는 강을 바라보며, 말라버린 강을 바라보며 그것에 오히려 눈물이 난

 

것은 유독 나 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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