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탄,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해석.....
이 글은 종교에 대한 모독이 목적이 아닌, 순수한 신앙심에 대한 성찰의 글이 될 것이다. 우선 자신은 하나님을 분명히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연 인간의 눈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일부 신학계에서 하나님은 남성이라는 주장과 그 반대의 여성이라는 엇갈린 주장도 있다. 어린 시절, 나도 하나님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그는 전지전능하기에 나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고, 이 세상에 모든 사악한 것을 물리쳐 주었으면 바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폭력과 경제적으로 어려움으로 어린 시절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때 몇 차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나의 친구가 교회에 다니면 재미있는 것이 많다고 유혹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이었는데, 나는 교회에서 나눠주는 음식물과 예쁜 여자 아이들을 함께 훔쳐보기 위해 그를 따라갔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몇 년간 나는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교회는 나의 우울한 집안 분위기와 달리 넓고 화려했으며 활기차 보였다. 무엇보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잔칫집 분위기였으나, 나의 집은 평소 사람이 없어 적막감에 쌓여 있거나, 그 적막감을 깨뜨리는 고함과 울음소리뿐이었다. 찬송가는 밝고 경쾌했고, 성경의 말씀은 모두 옳았으며, 목사님의 열정에 찬 설교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기도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간절한 기도를 해도, 나의 집안과 세상에 악마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목사님과 교인들에게 어렵게 나의 고민을 털어 놓으면, 신앙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답변만 되풀이 되어 돌아왔다. 다시 나는 부족한 신앙심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열심히 기도를 했지만, 결과는 매번 마찬가지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나는 감정적인 신앙심에서 이성적 신앙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목사님에게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하게 되었다. 목사님은 하얀 종이에 산을 그려놓고, 산의 정상에서 아래까지 수직선을 그으면서, 이렇듯 하나님은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지름길이라고 하셨다. 학교에서 배운 물리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나는 수직선으로 산을 오르는 것보다 나선형으로 가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니냐고 반박했다. 목사님은 여러 가지 비유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한 점과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을 해주셨지만, 결국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그 후 며칠 뒤에, 나는 새벽에 혼자서 교회에 갔다.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아니, 그를 단 한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당장 나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에게 평소 궁금했던 모든 의문들을 쏟아내고 대답을 듣고 싶었다. 어째서 당신은 존재하면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며, 이 세상에 악마들을 그냥 방치해 두고 있는지 따지려고 했다. 당시 교회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나는 목사님이 설교하시던 연단에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바지춤을 내리고 연단에 오줌을 쌌다. 순간 하나님의 분노와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나는 서둘러 바지춤을 추스르고 연단에서 내려와, 평소 내가 앉아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던 그 자리에 가서 눈을 감고 누웠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이제 하나님의 심판만 남았다. 교회 안의 어둠과 고요함이 나를 덮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교회를 빠져나갔다. 교회 밖을 나오자, 훤히 먼동이 트고 있었다.
그 뒤에 나는 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죽음에 타당성을 주장한 염세주의 철학 쇼펜하우어를 시작으로, 신학 철학 키에르케고르, 신을 죽인 인간에 대한 비판철학 니체, 신을 믿어 손해 볼 것 없다는 B. 파스칼, 천국의 하나님을 지상에서 구현 하려고 했던 마르크스, 내면의 목소리로 사회를 비판했던 J.루소의 저서들을 탐독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동양철학은 대학을 졸업 후 관심을 갖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용 그리고 노자와 장자에 대해 독학하고, 불경에도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법구경을 비롯한 금강경 등 종교서적을 읽고 있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면서 사색과 명상을 병행했는데,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해나갔다. 그것은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성경의 구절과 동양의 종교 및 철학이 빈틈없이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자식이 있는 남자를 한국어로 ‘아버지’, 영어로 ‘father', 한자로 ’父‘라고 기록하듯, 언어인 명칭만 조금씩 달랐을 뿐이지,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慈悲)‘ 유교의 ’인(仁)‘의 근본은 모두 하나였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언급한 하나님이 사랑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여타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것은 불교도 마찬가지였다. 즉, 하나님과 부처님은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옮기라는 성스러운 가르침의 총체였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어리석게도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먼저 고민하지 못하고, 단순히 인간들이 허상으로 만든 하나님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고민과 헛수고를 했단 말인가?
또한 ‘나만의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실천’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하나님의 계율파계였다. 모두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니? 마치 마을의 공동 우물을 자신의 우물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고, 인류의 사랑과 행복을 회복하기 위한 인간들의 ‘총제적인 염원’으로, 그 지혜가 성경에 담겨 있으니, 당연히 성경의 내용에 좋은 말씀만 있고, 나쁜 말씀은 없다. 그런데, 인간은 그 성경의 구절을 임의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을 또 다른 우상(偶像)으로 만들어 인간의 자유 의지를 스스로 구속하고, 억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롭게 탄생된 종교 권력은 정치나 법 그리고 윤리보다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고, 죄 없는 인간까지 죄인 취급하여 금전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갈취하는 모순이 발생하였다. 무릇 천국이란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실천되는 곳이고, 반대로 지옥이란 인류에 대한 사랑이 억압받는 곳이다. 만약 천국을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지옥을 만든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율을 어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현실은 연속적인데, 언어는 불연속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예를 들어,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라는 표현에서, ‘그녀’의 키와 몸무게, 그리고 전체의 체적뿐 아니라, ‘눈물’의 양(量)과 염분의 농도, 그리고 눈물이 흐르는 속도 등을 정확하게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언어는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표현)하지 못한다. 그런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 성경이 작성되었다. 당연히 성경의 기록과 해석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성경의 내용을 무용하니, 부정하자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다만, 성경의 해석에 불완전성을 이용하여 순수한 신앙심을 가로막는 일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 성경은 좋은 말씀이 담겨 있다. 하지만 사실(fact)과 사실의 간격, 그리고 언어와 언어의 간격 사이에 불완전한 틈새에 불손한 의도가 개입될 수 있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불손한 의도란 아름다고 순수한 말씀과 순수한 신앙심을 이용한 종교적 권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감시 받지 않는 권력은 남용되기 쉽다. 정치는 물론,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 즉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실천’ 그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화 시켜 권력화 된 종교 자체를 감시할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적 믿음을 강요하는 일체의 행위는 감시 받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불손한 의도가 있는지 의심해 봐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지, 교회를 의심 없이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 우열이 존재할 수 없다. 노숙자들에게 ‘밥’을 나눠 주는 사람과 ‘빵’을 나눠 주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만, 그 사랑의 실천에 방법론에 작은 문제들로 종교적 우열을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마치, J. 스위프트의 <걸리버 이야기>에서처럼, 달걀을 좁은 부분부터 깨서 먹느냐, 넓은 부분부터 깨서 먹느냐의 갈등의 빚는 전쟁과 같다.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 모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나 절에 사람들이 모여 기도를 드리고, 성경과 불경을 읽고 암송하는 것은 권장할 만하다. 신앙을 목적으로 사람이 모이고, 노래를 불러 즐거움이 가득하니, 적막한 집안에 혼자 있는 것보다 많은 지혜가 모이고 사랑이 쌓일 것이다. 평소 인문학과 관련한 독서나 정신적 수양이 없는 경우라면, 더욱 권장하고 싶다. 다만, 그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는 돈독한 인류애에 대한 깨달음의 실천으로 신앙심을 지니기를 당부한다. 이제부터 어린 시절의 나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얼굴이나 모습을 보려는 부질없는 간절한 기도보다, 인류애에 대한 뜨겁고 격한 감동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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