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석영의 변절과 교훈?
최근 진보적 성향의 소설가 황석영씨가 이명박 대통령과 중앙아시아 순방에 동행하면서 현 이명박 정부를 ‘중도실용정부’라고 평가한 발언이 국내에 와전되면서, 국내의 진보학계와 보수학계에 한바탕 논쟁의 불꽃이 일어났다. 물론 보수학계에서는 황씨의 발언을 환영하는 분위기와 의아한 분위기가 교차했고, 진보학계의 손호철(서강대 정외과) 교수는 “아무리 행동이 자유로운 소설가라해도 지난 대선 때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다가 갑자기 ‘중도실용정부’라고 말하는 것은 코미디가 아니냐?”고 비난했다.
일반 개인처럼 소설가를 포함하여 예술인도 자신의 철학과 소신에 따라 특정 정치적 견해를 지닐 수 있고, 반대의 경우는 비판할 수 있다. 물론 예술인들은 손 교수의 지적처럼 일반인들보다 ‘행동이 자유로움’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행동에 따른 책임도 자유롭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쨌건 황석영씨는 자신의 발언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한 진보적 성향의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변한 것이 없고, 자신의 발언이 왜곡 전달되었다고 해명했다.
평소 나는 황석영씨의 작품을 아끼고 사랑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소설 창작의 선배로서 존경하는 한 분이다. 그의 작품 <장길산>을 읽어보면, 이 땅에 어려운 서민들의 서러움과 아픔 그리고 저항이 보이고, 반대로 위정자들의 간악하고 흉폭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혜안이 열린다. 그의 작품 <객지> 및 <삼국지>는 더 말하여 무엇 하랴? 감히 웬만한 글쟁이들은 넘볼 수 없는 박학다식한 그의 학문의 조예가 글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으니 존경심이 가슴에 절로 일어난다.
소설가 이외수씨의 <벽오금학도>에서 “일반 사람들 수천 명 중에 과연 눈 밝고 귀 밝은 자가 몇몇이나 되던고, 그들(예술인)이 보여 주는 여러 가지 무악과 재주 속에는 항시 하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고 사람의 뜻을 하늘에다 전하는 진언이 숨겨져 있건만 단지 눈 멀고 귀 먼 자들이 그 뜻을 밝히 헤아리지 못할 따름이다.”라고 언급되어 있듯이, 예술인들은 일반인들이 깨닫지 못하는 세상의 이치를 발견하고,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세계의 의사소통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 의사소통을 위해 예술인들은 세상의 비난과 멸시 등 온갖 박해를 감수하더라도, 남들이 보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로운 행동’은 어디까지나 단절된 의사소통의 다리를 연결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89년 한국의 작가로는 처음으로 황씨는 정부의 허락 없이 북한을 방북하여 옥고를 치른 적도 있다. 작가들은 시대의 상식과 편견 그리고 무지와 맞서 항상 최전방에서 싸운다. 황씨는 소설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발로 걸어 다니며 쓴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나는 작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설혹 황씨가 정치적 변절을 한다손 하더라도, 그의 작품은 ‘힘 있고 강한 자’의 편에서 아부하는 것이 아닌 ‘힘 없고 약한 자’의 편에서 용기와 희망을 주는데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수적 성향의 작가라고 표방하는 소설가 이문열씨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세간의 언론을 통해 자신이 보수적 경향이라고 자처하지만, 그의 작품 <필론의 돼지>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나약해지려는 민중(民衆)의 단결된 힘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지 않는가?
부모의 사랑으로 자녀가 태어나지만, 그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되지 않고, 소중한 한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하고 살아가듯이, 작가의 손에 의해 작품이 탄생되지만, 작품이 세상에 나가면, 그 작품은 작가와 결별하여 스스로의 인격을 지닌 독립된 생명체가 된다. 헤프닝으로 끝난 황석영씨의 변절논란을 통해 우리들은, 작가와 작품의 상호 별개의 성격을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경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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