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연예계 스타들과 그것을 만드는 방송관계자의 전문적이고 화려한 모습을 동경하지만, 그와 반대로 언제나 그곳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고 말을 하곤 했다. 썩어버린 곳, 깨끗함이란 찾아볼 수 없는 더러운 하수구... 그 와중에 스타를 열망했던 젊은 연기자 고 장자연씨 사건이 터지면서 그저 추측만 난무하던 연예계 성상납에 대한 비리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정말 연예계와 방송국은 애초부터 비윤리적인 속물사회일까?
<그들이 사는 세상>은 드라마를 만드는 방송국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그린다. 송혜교와 현빈이 각각 주목받는 새내기 PD인 준영과 영화감독의 꿈을 꾸는 PD 지오 역을 맡아 드라마국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표민수 PD는 “방송국을 환락과 부가 넘치는 곳이 아닌 소소한 사람들의 열정이 넘치는 곳으로 그리겠다”고 밝혔다. 2년 동안 작품을 구상했다는 노희경 작가도 “실제로 드라마 제작 현장에 가보면 재미있다. 나만 즐기기보다 그 현장의 일화들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뉴스 발췌)
작가 노희경이 쓴 작품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안방에서 울며 드라마를 보시는 우리 엄니의 뒷모습을 열심히 바라봤을 뿐, 어머니가 보는 <꽃보다 아름다워> 속 곱씹을 만한 대사들을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끝난 지 몇 달이 되는 <그들이 사는 세상>을 틀었다. 왜냐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를 읽은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 흔한 사랑을 삶의 진정성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문체는 나를 사로잡았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인지 진정 궁금해졌다.
전문직 드라마라는 기표아래 송혜교, 현빈 주연의 드라마. 언뜻 보면 그저 그런 사랑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녀의 작품이라는 기대아래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세상>을 주목했다. 하지만 여지없이 떨어지는 시청률. 8.5%. 이유는 무엇일까? 극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어차피 비극이 판치는 세상. 어차피 아플 대로 아픈 인생, 구질스런 청춘.
그게 삶의 본질인줄은 이미 다 아는데 드라마에서 그걸 왜 구지 표현하겠느냐...
희망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말 할 가치가 없다.
드라마를 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말하는 모든 비극이
희망을 꿈꾸는 역설인줄 알아야한다고 그는 말했었다.
나는 이제 그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렇게 말한 선배 너는 지금 어떠냐고?
희망을 믿느냐고...
- 극중 주준영의 머릿속.
<그들이 사는 세상>의 가장 주목할 포인트는 현실과 드라마의 개연성에 대한 고찰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방송국 사람들 답게 혹은 연예계 종사자 답게 저마다 드라마와 자신의 인생의 상관관계를 탐구하는데 여념이 없다. 드라마가 주는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무척이나 애쓴다. 결코 드라마를 시청률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연인과 가정의 갈등만을 다루던 이야기구조를 탈피해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이 드라마는 가장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우리가 하루의 3분의 2 이상을 할애하는 곳은 바로 직장이며, 삶의 3분의 2이상을 할애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닌가. 내 일과 관련된 동료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갈등들은 우리가 매일 보는 내 직장 속 동료들과의 관계와 포개어져 감정의 쌍곡선을 수놓는다. 그렇기에 그들의 일인 드라마를 작품 속 인물들이 계속해서 진지하게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삶의 무게가 연인의 사랑이야기에 상존하는 이 드라마의 진실성은 시청자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저 현실의 도피처로 생각하던 드라마를 즐겼던 시청자들은 편히 <그사세>를 시청할 수 없었다. 시청률은 그래서 떨어졌다. 계속해서 쪽대본으로 연명하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보려고 TV채널을 돌렸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전체 16화 하나하나를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만들었다는데 있다. 한 편당 하나의 주제를 정해 준영과 지오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다. 각 에피소드가 모두 개연성을 가진 이야기지만, 마치 단막극처럼 각 에피소드들은 서로의 알레고리를 만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보는 듯 각 에피소드 속 소주제에 따른 맺음은 기존 작품에서 찾기 힘든 구조이다. 언제나 다음날의 시청률을 위해 황당한 설정을 하며 각 편을 끝내기 일쑤인 우리들이 아는 자극적인 드라마와는 다른 구조다. 언제나 새로운 실험을 좋아하는 노희경 작가의 의도가 선명한 부분으로 드라마를 유치하다 비하하는 이들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주고 싶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그렇게 당신들에게 시청률을 구걸하지 않고도 내 작품을 보게 하고 싶다는 그녀만의 의미로 여겨진다. 드라마 속 드라마를 인물들은 시청률이 아닌 드라마의 철학을 위해 사랑을 한다. 결코 더러운 하수구 속 사람들이 아니다.
윤여정을 비롯한 김창완, 김갑수, 배종옥, 엄기준, 김여진, 나문희 등의 진짜배우들을 출연은 이 작품의 전문직 드라마 즉, 방송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픈 작가의 의도에 걸 맞는 캐스팅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와 현실의 이중성에 철저히 규명을 원했던 작가는 진짜 배우들을 배우와 연출자 그리고 방송국의 한 구성원으로 배치시킴으로서 보다 더 현실에 다가가고픈 선명한 의도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완성형에 가까운 그들의 연기 덕분에 전문직 드라마의 기표는 힘차게 휘날릴 수 있었다. 극에 대한 몰입도를 완전하게 하는 연기자들의 소중한 열연이 <그들의 사는 세상>의 가장 큰 힘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를 믿고 연기를 하는 배우와 그에 상응하는 글을 써주는 작가. 멋진 앙상블이다. 진정한 웰메이드 드라마다. 극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인 윤여정님이 내뱉는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는 배우의 애환과 배우의 진정성이 있고, 배우 배종옥의 상처에는 이 세상 모든 배우들의 상처가 있다. 다소 코믹스럽게 보이는 김여진의 연기에는 노희경 작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기고, 김갑수와 김창완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방송국도 그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항변이 들리는 부분이다. 특히, 능력있는 연출자로 분한 뮤지컬 배우 출신 배우 엄기준은 비열하고, 일에 대해서 강한 자존심을 가진 미워할 수 없는 시청률 제조기 연출자 손규호 역을 맡아 가장 리얼한 연출자의 세계를 보여준다. 엄기준이라는 연기자는 이 작품에서 가장 큰 발견이 아닐까 싶다. 준영과 지오는 언제나 드라마와 자신들의 인생 그리고 사랑까지 모두 한 카테고리 안에 넣어 진지하게 고찰한다. 기억을 끄집어 내 가장 납득할만한 결론을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마치 작가가 드라마와 현실이라는 밀접하고도 먼 주제를 통해 사랑을 이야기하려는 것처럼.
가장 흔한 이야기를 가장 특별하게 하는 것. 드라마적인 삶을 유치하다 말하는 우리들이 가장 통속적인 드라마를 찍듯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가장 특별하다 믿는 드라마적인 삶. 인생이 그런 것 아닐까. 벗어나려하고, 유치하다고 해도 드라마는 우리의 삶과 밀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노희경 특유의 밀도 높은 대사들은 이 작품에 유독 수많은 메모 질을 하게 한다. 상황 상황에 가장 밀착감이 있는 단어선택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작가의 열정이 놀랍다. 쪽 대본이 날림하는 이 현실에서 노작가는 배우들에게 미리 5~6회분의 대본을 주기로 유명하다. 그는 그만큼 드라마를 위해 삶을 사는 작가가 천직인 사람이다. 이 드라마에는 연예계와 방송국 사람들이 있지만, 가장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는 노희경 작가다. 삶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드라마를 쓰겠다는 그녀의 열정은 모든 이야기 속 인물들의 대사에서 그 진정성을 드러내 드라마가 삶의 은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그녀의 진지한 직업의식이 드라마를 새롭게 보게 한다.
그녀가 예전에 쓴 짧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픈 기억은 많을수록 좋다'라는 글이었는데 그 글을 읽은 게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진 직후였는지 모두가 쓰는 대학 내 공용 컴퓨터실에서 펑펑 울었었다. 그때는 마치 내가 드라마 속 비련의 인물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만큼 아픈 사람이 없다고 세상에게 고했다. 드라마란 그런 것이 아닐까. 통속적이되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 가장 내 것에 가까운 보편적인 정서. 젊은 연출가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라 보기에는 너무도 많은 인생의 의미를 묻는 작품의 식견에 놀랍다. 드라마와 인생 그리고 사랑. 그 하나 빼놓지 않고 짚고 넘어가는 작가 노희경의 솜씨에 감복한다. 결코, 그들이 사는 세상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다. 노희경 작가는 그걸 말하고 싶었나보다.
<그들이 사는 세상 OST>
1. 눈물아 슬픔아 - Soya
2. 인연 - 성시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