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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그녀가 있었다(1)-프롤로그(로미오와 줄리엣)

배일도 |2006.09.27 09:08
조회 390 |추천 0

-1987.10.11, 서울시 혜화동-
진철은 자리에 앉아 비오는 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영신과의 약속시간은 벌써 두 시간이나 넘은 상태였다.
'얘가 늦을 사람이 아닌데..?'
허나, 모든 일엔 예외가 있는 법이었다.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여섯 시를 막 넘기고 있었고, 카운터의 라디오에서는 청취율 1위를 자랑하는 라디오 DJ의 오프닝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르르릉~!"
기다리다 못해 짜증이 난 그는 공중전화기로 다가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쯤 울린 뒤에, 수화기 저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백암 산부인과입니다."
진철은 갑자기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시간에 전화를 거는 나나 받는 그쪽이나, 참 불쌍한 인생이로군.'
"실례지만, 유영신 씨 자리에 계십니까?"
"유 선생님 급한 일 있으셔서 오늘은 출근 안 하셨는데요. 실례지만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3년만에 만나는 사람을 딱지맞히는지, 그로선 영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해답은 바로 그때 찾아왔다.
...
...
...
"네 양희은의 '아침이슬' 잘 들어 보았습니다. 이 노래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이때, 지난날 독재자의 품에서 호의호식하던 한 노친네는 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하는군요. 참 감개무량합니다. 어디 보자..서울대병원이라고 하니까 가서 뒤집어 엎고 싶으신 분은 가셔도 좋습니다만, 전경들을 뚫고 가려면 꽤 힘들겠죠? 그럼 잠시 4공 시절 민주화 운동에 몸바치다 돌아가신 이승열 열사의 넋을 기리겠습니다..."
까페 안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세 가지였다.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부류가 대부분이었고, 잠시 숙연해지는 몇몇 커플이 있는가 하면, 급히 돈을 내고 밖으로 사라지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진철이었다.
...
...
...
영신이 소복 차림으로 상가 한 구석에 홀로 앉아있는 모습이 진철의 눈에 띄었다. 라디오 DJ 말처럼, 영신의 아버지는 독재자를 만든 일등공신 중의 하나였다. 그의 전력을 감안한다면,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난리법석을 피우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
...
...
진철은 가만히 다가가 국화 한 송이를 영정 앞에 내려놓은 뒤 큰절을 했다. 영신은 퍼뜩 정신이 들어 진철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아무 말 없이 영신과 맞절을 하였다. 영신의 얼굴은 매우 초췌해져 있었다. 영신은 겨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와줘서..고마워."
"그런 말 마라."
"사필귀정이란 말이 딱 맞아. 생전에 다른 사람들 그렇게 괴롭히시더니, 찾아오는 이 하나 없으니.."
원망하는 말투와는 달리, 영신의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가득했다. 진철이 물었다.
"밥은?"
영신은 고개를 저었다. 진철은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너 이러다 병 나겠다. 잠시만 있어. 밥 사올테니까."
...
...
...
진철과 영신은, 흔한 신파조의 주인공이었다. 우연한 만남이 사랑으로 이어지고, 보잘것 없는 신분이란 이유로 헤어짐을 강요당해야만 하는 사이였다. 몇년 뒤, 둘이 다시 만난 건 순전히 업무 때문이었다. 이미 영신은 아버지의 강요로 결혼을 했지만, 사랑없이 한 결혼의 결말은 뻔했다. 진철은 겉으로 태연했지만, 속마음은 울고 있었다.
...
...
...
-1988.1.10, 서울시 압구정동-
"김진철씨, 전화왔습니다!"
"응?"
진철은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찻집의 주인이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진철이 수화기를 받아들자,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신이냐?"
"그래."
"어디야? 약속한 지 벌써 삼십 분이 지났는데.."
"미안, 창 밖엘 좀 봐줄래?"
"...?"
창 밖을 보니, 흰색 벤츠 안에서 웬 여자가 손을 흔드는 게 그의 눈에 띄었다. 영신이었다. 장례 이후로 석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
...
...
진철의 직업은, 겉으로는..영화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일이었다. 허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의 본 모습은, 일종의 청부업자였다. 고위층의 주문으로 성가신 일들을 해결하고 나면, 그 댓가는 그가 법이 허용하지 않는 일들을 하는 데 있어 사후에 공권력의 추적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었다.
...
...
...
진철은 혼자가 아니었다. 몇몇이 그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재계순위 10위권 안에 드는 신영백화점의 회장이 막강한 재력을 이용하여 이들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고위층의 한 인사가 별명을 지은 게 계기가 되어, 그들을 아울러 부르는 별칭은 '블랙 나이트'로 정해졌다. 블랙 나이트가 마음놓고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이들의 존재를 아는 이가 극소수에 불과하단 사실이 제일 큰 이유였다.
...
...
...
"무슨 일인데?" 진철이 물었다.
"일단 우리 집에 가서 얘기하자."
"외갓남자를 집에 끌어들여서야 쓰나."
그 말에 영신은 웃으면서 혀를 찼다.
"참내, 누가 들으면 내가 너한테 흑심 품은 줄 알겠다."
"글쎄, 모르지. 사람 맘은 알 수 없으니까."
"사람들 많은 데서 할 얘긴 아니니까, 할 수 없이 가는거야."
"그래? 네 집에 도청장치라도 되어 있으면 어떡하려구?"
"걱정 마. 오피스텔을 임시로 하나 빌렸어."
...
...
...
진철은 영신의 뒤를 따라 한적한 동네에 있는 오피스텔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술과 안주 몇 가지가 들어있는 봉투가 들려져 있었다. 영신의 집 안에 들어선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시로 빌렸다는 집 치고는 살림살이가 너무 완벽히 갖춰졌기 때문이었다.
"야. 넌 임시로 쓴다면서 무슨 사진이 이렇게도 많냐?"
"역시 날카롭네."
"뭐?"
"나 완전히 이사했어."
다음 순간, 영신은 갑자기 진철한테 키스를 퍼부었다. 갑자기 입술을 빼앗긴 그는 석고상 마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난데없이 뭐하는 짓이야?"
"감사의 키스."
진철은 뭔가 짚이는 게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놓기는 좀 어려운 말이었다. 대신 그는 영신을 나무라듯 말했다.
"혼자 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외갓남자를 유혹하냐?"
"이게 유혹 축에나 끼나?"
...
...
...
상처가 가신 건지, 그런 척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영신은 분위기가 매우 밝아진 듯 했다. 영신이 커피를 타 오자, 진철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인지 말 좀 해봐."
"성질도 급하셔."
영신은 서랍 속에서 노란 봉투를 하나 꺼내서 진철에게 보여주었다.
"한번 봐봐."
봉투 속에는 20대로 보이는 남자 셋이 단체로 찍은 사진과 함께, 건장한 사내들이 수십명 모여 마치 단합대회를 하는 듯한 사진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진철의 눈에 익은 남자가 한 명 포함되어 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은 서울을 주무대로 하는 서대문파의 보스 나병주였다.
"여기 떼거리로 몰려있는 녀석들은 짐작이 가는데, 이 세 녀석들은 뭐지?" 진철이 물었다.
"맨 왼쪽에 금목걸이 찬 사람이 양대수고, 가운데가 김윤수, 그리고 노랑머리가 조태현이야."
진철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휘파람을 불어댔다.
"뒷 배경이 페라리네? 무슨 재벌집 자식들인가?"
"그건 아니고, 양우철, 김정엽, 조영일이라고 하면 감이 잡혀?"
진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마 국회의장이랑 여당 법사위원장, 안기부장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제법 빠삭하네."
"헌데, 재벌 2세도 아닌 놈들이 무슨 돈으로 페라리를 샀지? 아니면, 단순히 렌트만 했나?"
"렌트라..맞는 말이지. 빌린 건 맞으니까." 영신은 사진 속에서 장대수의 얼굴을 가리켰다. 진철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버지는 나랏일에 정신이 없는데, 참 형편없는 자식들이로구만. 그건 그렇고,이번엔 나한테 뭘 부탁하고 싶은 거지? 설마 이 세 명이 아버지들 후광에 방해가 되니까 제거해 달라..뭐 이런 부탁인가?" 진철이 가장 싫어하는 건 자신에게 심부름센터 직원이나 맡을 법한 일을 청부하는 것이었다.
"아니, 전혀."
...
...
...
"지금부터 하는 얘긴 1급 비밀이니까 절대로 외부에 새어나가선 안돼. 오케이?" 영신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시작부터 겁주는군."
"3일 전에, M&M이 부산에 상륙했어. 원칙대로라면 발도 들여놓기 전에 모조리 박살내는 게 당연하지만, 검찰은 일부러 방관했지. 왜 그런 줄 알아?"
진철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하나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있었다.
"뻔한 거 아닌가? M&M이랑 서대문파랑 뭔가 연관이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둘다 한꺼번에 낚으려는 속셈이겠지."
"똑똑하네. 거기까진 문제가 없는데, 아까 말한 세 사람땜에 모든 게 뒤죽박죽이 돼버렸어."
"검찰은 아직도 정치인들 눈치를 보나?"
"아니, 틀리셨습니다. 검찰이 아니고 딴 사람들이야."
갑자기 영신은 달력을 손으로 가리켰다.
"달력 보여?"
"내가 장님인 줄 아냐?"
"석달 하고, 13일 뒤에 뭔 일이 있나 한번 살펴봐봐. 그것만 아니면 내가 굳이 너한테 이런 얘길 할 필요도 없거든."
진철은 달력을 몇 장 넘겨 보았다. 영신이 말한 날짜에 빨간 색연필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총선?"
"바로 그거야."
...
...
...
"대선만큼이나 목숨을 거는 게 총선이야. 더구나 이번에 여당은 교육개혁법을 총선 최대의 이슈로 삼겠다고 공공연히 벼르고 있어. 야당 중진들 몇몇이 사립대학 운영하다가 완전히 결딴낼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더 이상의 호재는 없지."
"이 녀석들이 문제가 되겠군."
"맞아. 야당이 역공을 퍼부을 테니까. '제 자식도 똑바로 가르치지 못하는 것들이 한 나라의 백년지대계를 좌지우지하려 한다'고 말이지."
"그렇다면, 난 뭘 어떻게 하면 되지?"
"열흘 뒤에 검찰이 M&M을 사냥할 거야. 그때 서대문파하고 거래를 트려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거든. 그 전까지 세 녀석들을 자유의 몸으로 만드는 거지."
"배신자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게 그들 철칙인데..어떡하나?"
"어떡하긴..애초에 조직이 없는 상태로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영신은 뭐가 즐거운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진철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나보고 그딴 무지막지한 놈들을 상대하라는 거냐?"
"그게 니 전공이잖아, 안 그래?"
...
...
...
-1988.1.11, 압구정동 영신의 집-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월 11일 일곱 시 아침 뉴스, 백정현입니다."
타이머를 맞춰 놓은 텔레비전이 켜진 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앵커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영신의 침대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으음..."
영신은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왠지 썰렁한 느낌이 들어 자기 몸을 살펴본 그녀는 그제서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란 것을 알아챘다.
"참, 그랬지.."
영신은 침대보를 확 잡아당겼다. 거기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한 남자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간밤에 둘은 술잔을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만취한 상황까지 이르렀고, 결국엔 술기운을 빌어 서너 시간 동안을 내리 침대 속에서 뒹군 것이었다.
"이봐요 손님, 이제 그만 일어나는 게 어때요?"
표현은 공손했지만, 실제 어투는 장난기가 넘쳤다. 아무리 말해도 움직임이 없자, 영신은 강제로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오히려 그 팔에 주르륵 끌려가 와락 품에 안겨버렸다. 당황한 영신이 몸부림을 쳤지만,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다. 포기한 영신은 조용히 다그쳤다.
"좋은 말 할때 이거 놔라. 나 출근해야 된단 말야."
"적당히 핑계대고 하루 쉬면 안 될까?"
"애들도 아니고 칭얼대기는.."
갑자기 영신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맘 속에 담아둔 얘길 하기엔 이 이상 좋은 기회가 없을 듯 싶었다.
"기억해?"
"뭘?"
"옛날에 우리, 약속했었잖아. 내가 의사 면허만 따면 곧바로 우리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미자고 말야."
"내가 그걸 어떻게 잊겠냐만은..근데 왜?"
"팔 좀 놔봐. 좀 보여줄 게 있으니깐."
영신은 가운만 대충 걸치고 서랍 속에서 뭔가 꺼냈다. 그러고는 그걸 진철의 눈 앞에 들이댔다.
"이게 뭐처럼 보여?"
"어디 보자..네 의사 면허증이잖아?"
"그래. 내가 이걸 너한테 보여주는 이유가 뭔줄 알아?"
"짐작도 못하겠는걸?"
영신은 대답 대신 진철의 배에다가 손가락을 죽죽 그어댔다.
"결..혼..해..주?"
진철은 영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진심이야?"
"물론."
"아냐, 아닌 거 같다. 내일 아침에도 같은 생각이면 그때 말하자."
"난 내일까지 못 기다려. 지금 이 자리에서 오케이하지 않으면, 영원히 거절하는 걸로 생각하는 수 밖에 없어. 나 미국 시민권자인 거, 너도 알지?"
영신의 말은, 여차하면 미국으로 이민가서 다신 돌아오지 않겠단 얘기였다. 진철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정답은 하나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참만에 눈을 뜬 진철은 단 하나의 단어를 내뱉듯 말했다.
"오케이."
"정말?"
영신은 진철을 와락 껴안았다.
"야, 숨막힌다. 좀 놓고 얘기하자."
"응."
진철이 영신의 얼굴을 바라보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렇게 좋냐? 내가 너라면 나같은 놈이랑은 절대로 같이 살고 싶지 않을텐데 말야."
"왜?"
"몰라서 물어? 언제 폭탄 짊어지고 적진으로 뛰어들지 모르는 게 내 일이잖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빨리 옷 입어. 결혼반지 보러 가야지."
진철은 기가 막혔다.
"허참, 이 여자가..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든? 왜 이리 서둘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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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1, 백암 산부인과-
"김희정 산모님, 혹시 전원주택 갖고 계신가요?"
"예? 충청도 쪽에 하나 있는데, 그건 왜요?"
"희정씨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출산 전에 산모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태아의 미래가 거의 결정지어지거든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산모가 좋은 음식만 먹고, 좋은 공기를 들여마시고, 또 매일매일 적당히 운동을 해줘야 하는데, 서울이나 근교쪽은 여건이 너무 나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혹시 그러면..거기로 가서 있으라는 얘긴가요?"
"그건 산모님께서 정하실 문제입니다만, 웬만하면 가시는 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그냥 제 의견인데요. 태교 음악이라는 거, 남들 하듯이 천편일률 클래식만 고집하는 건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면, 제아무리 클래식이라고 해도 산모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소용이 없거든요. 태아는 산모의 정서에 많은 영향을 받으니까 말이죠."
"예.."
산모는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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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시간이 다 끝나고, 간호사들은 휴게실에 모여 영신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영신이 저녁 근사하게 산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일도 다 끝났으니 슬슬 가 볼까요?" 영신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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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이 일행을 이끌고 간 곳은 불과 한 달 전에 새로 생긴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식사 도중에,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당찬 성격의 선해인 간호사가 영신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예, 뭐든지요."
"오늘 선생님 자주 허리를 만지시던데, 혹시 선생님 애인이랑..?"
"해인양..!"
간호사 가운데 최고참인 강지숙이 눈치를 주었지만, 해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그건 어젯밤에.."
영신은 쑥스러워 말을 잇지 못했다. 해인의 질문세례가 이어졌다.
"그러면 그분하고는 결혼날짜 잡았어요?"
"해인씨!"
강지숙이 해인을 나무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건 아직 몰라요. 날짜를 아직 안 정해서 말이죠."
"수간호사님, 결혼 맞다는데요? 축하드려요, 선생님!"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일행들도 영신의 일을 축하해주자, 영신은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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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까요? 한시가 급한 사안입니다만.."
"서두를 것 없네. 집 근처에 가서 기다리세나."
영신이 저녁을 먹고 있는 레스토랑의 건너편에 주차된 검은색 세단에 타고 있던 두 남자의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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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은 집 근처에서 낯선 세단을 한 대 발견했지만, 신경쓰지 않고 지나쳤다. 집 앞으로 가서 열쇠를 찾는 사이,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 꽤나 위협적인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유영신 씨 되십니까?"
"예, 그런데요?"
영신은 본능처럼 가방 속에서 전기충격기를 만지작거렸다. 남자는 분위기를 눈치챈 듯, 꾸벅 인사를 했다.
"조영일 부장님께서 유영신 씨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다."
"그런데요?"
"꼭 들으셔야 하는 얘깁니다."
"전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은데요. 좀 비켜주시겠어요?"
영신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일부러 문을 세게 닫았다. 만나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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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안기부장인 조영일은 영신의 아버지 유태훈의 직속부하였다. 현 정부 바로 전의 정권에서 그는 유태훈의 만행을 고발한 댓가로 대통령의 눈에 들었고, 현 정권에 와서는 결국 안기부장이란 막강한 직책에까지 오른 것이었다. 현재까지도 영신은 아버지의 몇몇 측근들과 가족처럼 지내오고 있었다. 그들 또한 조영일을 갈아마시고 싶어했지만, 그들은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한직으로 쫓겨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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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분쯤 지났을까, 영신의 집에 설치된 벨이 울렸다. 영신이 폐쇄회로를 통해 밖을 내다보니,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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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기다린 지 벌써 10분이 넘었습니다. 내일도 참석해야 할 행사가 열 개가 넘습니다. 이러다가 몸 상하시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자넨 날 너무 물로 보는구만. 괜찮네, 이 사람아. 이래뵈도 끄떡없네. 더군다나 난 여기 집주인에게 약간의 빚이 있다네."
문이 열린 건 바로 그때였다. 열린 문틈 사이로 영신의 목소리만 들렸다. "할 말이 있다니..들어오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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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실 말씀이란 게 뭐죠? 빨리 말 끝내시고 가주셨으면 합니다." 영신의 태도는 매우 냉랭했다.
"일전에..비서실장을 만난 적이 있나?"
그 말에 영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젠..제 뒷조사까지 하시나요? 우습네요. 제가 두려우십니까?"
영신의 말에는 가시가 가득 박혀 있었다.
"자네와, 자네의 친구에 관한 얘기..부장 자리에 올라서고 두 달 뒤에 알았네. 내가 자네, 아니 돌아가신 자네 부친께 사죄하는 마음으로 한 가지만 말하겠네. 비서실장이 자네를 통해 한 얘기는 없던 일로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자네 친구가 위험해지네."
"그게..무슨 말이죠?"
부장은 품 속에서 수첩을 꺼내 뭔가를 확인했다.
"그렇지..서대문파. 그놈들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았네.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외부에서 용병을 대거 끌어들이고 있다는군."
"사사로운 일에 신경쓰지 말고 나랏일이나 열심히 해주셨으면 하네요."
"그래, 자네가 나를 홀대하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가네. 하지만.."
"하지만..뭐죠?"
"자네 친구를 만나서 이 사진을 보여주게나."
조영일은 영신에게 사진을 한 장 건네주었다. 여럿 남자들이 찍혀 있는 가운데, 유독 한 남자에게만 빨간 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거기 표시된 사람이 외인부대 출신의 '클레멘타인'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남자라네. 자네 친구에게 보여주면 그것만으로도 내 할일은 다한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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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2, 김포공항-
런던발 서울행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표시가 전광판에 뜬지 몇 분 되지 않아, 게이트 안에서 승객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는 아랍인 비슷한 인상의 남자가 한 명 끼어 있었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자들이 한 쪽에서 진을 치고 누군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보는 남자는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전재윤씨 되십니까?"
등 뒤에서 그 말이 들려오는 순간,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Who are vou?"
"아무리 변장을 하셔도 제 눈은 속이지 못합니다. 제 이름은 김진철입니다. 오대윤 회장님께서 전재윤씨를 대신 마중나가라는 분부를 하셨습니다."
남자의 입에서는 영어 대신 유창한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럴 겁니다. 전 신영쪽의 사람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진철은 남자를 태우고 공항 외곽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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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진철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칸에서 입상한 것 말입니다. 국내외에서 큰 화제가 되었더랬습니다."
재윤은 손사래를 쳤다.
"아, 그거? 난 그저 학창시절에 추억이나 하나 만들어 볼 요량으로 출품한 건데, 상까지 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소."
진철의 차는 이윽고 신영백화점 본사에 닿았다. 진철이 재윤이 있는 쪽의 문을 열기 위해 반대편으로 가기도 전에, 재윤은 스스로 차 문을 열고 나왔다.
"격식 따윈 사양하겠소."
재윤은 회사로 들어가기 전, 진철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런데 댁은 무슨 일을 하시오? 아까부터 그게 제일 궁금했는데."
"영화잡지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호, 그러면 배우들 인터뷰도 가끔 하시겠구먼?"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 약속 하나 하지. 만약에 내가 인터뷰 할 일이 있으면 그쪽이랑 맨 먼저 하겠다고 말이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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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이 칼럼 원고를 들고 잡지사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를 불러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원고 교정일을 하는 김수영이라는 여직원이었다.
"좀 전에 진철씨한테 메시지 왔는데요?"
진철은 메모지를 건네받았다. 쪽지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다섯 시에 아르마니에서 기다릴게.' 아르마니는 진철과 영신이 학창시절 자주 데이트하던 장소였다.
진철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다섯 시까지는 불과 삼십 분 밖에 남지 않았다.
"꽁지 빠지게 달려야겠군. 수영씨, 원고 좀 부탁합니다."
진철은 원고를 직원에게 맡기고는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혼자 남은 수영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이 서두를 때도 다 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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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전재윤 이사님이 오셨습니다."
"오오, 그래! 어서 오라고 하게!"
"차는 어떻게 할까요? 회장님."
"아아, 괜찮으니 나가서 일 보게나."
"예, 그럼.."
재윤은 회장의 방에서 막 나오는 여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재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짱 많기로 소문난 그지만 그룹의 최고 수뇌와 단독으로 마주치는 이 순간만큼은 다소 긴장이 되었다.
"후우.."
그는 약간 심호흡을 한 뒤 회장실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참 오랫만이군. 내 자네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네."
재윤은 회장의 맞은편 자리에 있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래, 런던 생활은 어땠나?"
"보람있게 보냈습니다."
"보람이라..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일단 회사 돈으로 유학을 갔으니 그에 맞는 능력을 갖추는 게 도리 아니겠나?"
"예,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재윤은 들고 온 서류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한 뭉치를 꺼냈다.
"영국에 있는 동안에 생각해 본 내용입니다. 앞으로 새 지점을 만드는 데 있어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대윤이 서류를 살펴보니, 겉면에 '극장사업 기획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극장?"
"예. 보시면 아시겠지만, 점포의 최상층에다가 극장을 비롯해서 스낵코너, 오락실, 음반매장 등 여러가지 부대시설을 만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고객들이 점포의 전 층을 도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매출 신장에도 기여할 겁니다."
"음..좋은 생각이군. 헌데 서류가 이렇게 두툼한 걸 보니, 세부적인 계획도 생각해 놓았겠지?"
"물론입니다."
"그래요. 그 얘긴 이쯤 하기로 하고..부사장이 당신을 많이 보고 싶어하는 눈치네. 지금 수원에 있으니까 가서 회포를 풀게나."
"예.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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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미안하다."
진철은 영신에게 사과하면서 앞에 놓인 커피를 들이켰다. 커피는 벌써 식어 있었다.
"괜찮아. 혹시 클레멘타인이라고 알아?"
영신은 말과 동시에 전날 조영일에게 건네받은 사진을 진철에게 보여주었다. 사진을 들여다본 진철은 낯빛이 굳어졌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사진이 아닌 것 같은데..이걸 어떻게 구했지?"
"어제 조영일 부장 만났어."
"안기부장?"
"어."
"너한테 뭐라든?"
"그냥..너한테 사진만 보여주면 될 거라고 하던데? 여기 표시된 이 남자 누군지 알아?"
"글쎄, 잘 모르겠는데?"
진철의 얼굴은 어느새 처음의 밝은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영신은 그런 진철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왜 조금전까지 떫은 표정이야?"
"내가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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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5월달에 식 올리자. 어때?"
"5월? 글쎄.."
"왜? 바빠?"
"난 더 일찍 하고 싶은데.."
진철은 장난하듯 말했다. 영신이 기막혀서 진철의 어깨를 툭 치자, 진철은 갑자기 영신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진심이야."
진철은 그러면서 영신의 입에다가 자기 얼굴을 가져갔다. 그러나 진철의 입술은 영신의 검지 손가락에 의해 막혀버렸다.
"안돼, 보는 눈 많잖아."
"모처럼 분위기좀 잡아보려고 했더니 김만 샜네."
진철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왜, 화났어?"
"너 같으면 괜찮겠냐? 결혼할 사인데 이 정도도 안되니 말야."
"화 푸세요, 서방님."
영신은 진철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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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2, 한남동
진철은 영신에게서 받아든 사진을 들고 차에서 내려 어느 으리으리한 저택의 입구로 향했다. 날은 완전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진철이 벨을 누르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안에서 가정부인 듯한 아주머니가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진철은 인사를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진철의 행동으로 보아 그는 이 집에 자주 드나드는 듯 보였다. 진철이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자네 왔나?"
"예. 회장님."
회장이라 불린 남자는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오대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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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큰 건수가 들어왔습니다."
진철은 영신에게 들은 말을 토대로 회장에게 설명했다. 회장은 약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서대문파라..신문에서 몇 번 본것 같기는 한데, 자네 혼자서는 감당못할 정도로 큰 사안인가?"
"무작정 부딪치는 일이라면 저 혼자서도 가능하겠지만, 이번 일은 워낙 조심해야 할 일이기에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참, 내가 사람을 한 명 소개시켜 줄 테니까, 그 친구를 작전에 합류시키는 게 어떻겠나?"
"누구 말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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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3, 전농동-
진철이 회장한테 소개받은 남자의 이름은 박유성이었다. 진철이 회장을 안 지가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가지만, 회장에게 양아들이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것은 회장이 그만큼 베일에 가려져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농고등학교라.."
그의 직업은 고등학교 교사였으며, 가르치는 과목은 사회라고 회장이 일러준 상태였다. 진철은 회장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샌님이 도대체 무슨 일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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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성 선생님 계십니까?"
진철은 교무실 문을 약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안에는 남자 직원 두셋밖에 보이지 않았다.
"박 선생 어딨죠?"
"글쎄요. 아까 체육관에 볼일 있다고 그리로 가던데..거기로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3층 복도에 연결통로 있으니까 그리로 가면 됩니다."
"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철은 선생이 일러준 대로 길을 따라가 체육관에 도착했다.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사람 모습은 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날 찾아왔습니까?"
"?!"
목소리는 대략 자기 앞쪽 십여 미터 전방에서 들렸지만, 지금 진철의 눈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사람의 기가 희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것 봐라?'
"박유성 씨. 모습을 드러내시죠."
대답 대신 갑자기 농구공 하나가 진철을 향해 날아왔다. 진철은 공을 발로 차 냄과 동시에, 공이 날아온 쪽으로 몸을 날렸다. 허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걸론 안되지!"
양 사방에서 수십개의 농구공이 일제히 진철을 향해 날아왔다. 진철의 호승심이 들끓어올랐다.
"손님 접대하는 법이 특이한 친구로군."
진철의 양 팔에서 뭔가 조그만 물체가 튀어나왔다. 손잡이는 보이지 않고, 탄창이 총신과 평행을 이루는 특이한 모양의 총이었다. 진철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농구공들은 갑자기 힘을 잃고 바닥에 뒹굴었다.
'혹시 염력인가?'
진철은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염력이라니..이제껏 말로만 들어왔을 뿐 단 한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진철이 의문에 빠진 와중에도, 상대방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철의 머릿속에 드는 의문은 점점 늘어갔다.

'설마..신법?'
진철이 그 위치를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상대라면, 이미 그의 상대는 아니었다.
"이제 모습을 드러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말과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토록 격하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유성이라고 합니다."
진철은 악수하면서 상대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마치 태어나서 고생은 한 번도 안한 듯한 귀공자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한테 대충 얘기 들었습니다. 재미난 일을 하신다구요?"
"그렇습니다. 교사라기에 과연 도움이 될까 걱정했습니다만, 기우라고 봐야겠군요."
"이 정도면 댁이 하는 일에 낄 수 있겠습니까?"
"뭐, 최소한 방해는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따가 제 친구들과 모임 약속을 했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뇨. 잡무가 너무 많아서 그건 힘들겠습니다. 나중에 뭘 하면 되는지 알려주십시오. 되도록 어려운 걸로 부탁드립니다."
박유성이란 존재는 진철을 오랫동안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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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3, 압구정-
진철이 술집에 들어서자, 그를 반기는 목소리가 여럿 있었다. 그의 친구들이었다.
"여깁니다, 여기!"
술잔이 여러번 부딪히고 난 뒤에야 얘기는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큰 건수라고 하던데, 어떤 일입니까?"
진철은 대답 대신 주요 요인들의 아들들이 찍힌 사진을 건넸다.
"다들 눈여겨 봐 두게. 큰 먹잇감이니까."
친구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왠지 햇병아리 냄새가 풍기는데요?"
"페라리라..쥑이는군!"
"아무리 봐도 무술의 '무'자도 모르는 녀석들 같은데..?"
진철은 그제서야 답을 말해 주었다.
"이번 임무는, 이 녀석들을 구출하는 거야."
"납치된 겁니까? 그런 거라면 구태여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블랙 나이트 서열 2위인 김상택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보다 더 골치아픈 거야. 다들 서대문파가 뭘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지? 이 세 녀석들은 서대문파의 숙주나 다름없는 놈들이지."
"그렇다면 결론은, 서대문파와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얘깁니까?"
"그래."
진철은 탁자 맞은편의 박재필에게 물었다. 서열 3위의 그는 뒷세계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재필아, 혹시 '클레멘타인'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있냐?"
재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형님이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클레멘타인 노래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면, 답은 딱 하납니다. 외인부대 소속이었다가 탈주한 뒤 전문 용병으로 이름을 날리는 녀석들인데,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녀석들입니다. 헌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진철이 건네주는 사진을 들여다본 재필은 손사래를 쳤다.
"휘유..아무래도 이번 일은 성공확률 제로에 가깝습니다. 이놈들과 싸우는 것도 모자라 민간인 셋을 구출하기까지 해야 한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재필의 입에서 이토록 비관적인 말이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힘든 일이냐?" 상택이 물었다.
"진철 형님이 초반에 녀석들을 총으로 싹 쓸어버린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여기는 대한민국 아닙니까? 실탄은 커녕 가스총 구하기도 힘든 대한민국 말입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된 이상, 진철이 내릴 결론은 단 하나였다.
"알았다. 이번 건은 없던 일로 하자. 술이나 먹자꾸나."
그러나, 진철의 마음 속에는 또 하나의 계획이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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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4, 양평 용문산-
석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옥천면에서 용문산 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내달리고 있었다. 가운데 승용차의 뒷좌석에 타고 있는 사내가 물었다.
"아직 멀었냐?"
"거의 다 와 갑니다. 형님."
더 이상 차가 다닐 수 없는 길까지 차가 접근하자, 남자는 차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앞쪽과 뒤쪽의 차에 탄 사내들이 일제히 내려 중간에 있는 승용차를 에워싸자, 우두머리인 듯한 이 사내는 그제서야 차에서 내렸다.
"어서 그 새끼를 내 앞에 끌고 와라."
보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너댓쯤 되는 남자들이 일제히 산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여기 온 목적은 용문산에 숨어있는 배신자를 잡기 위함이었다.
"이봐요, 보스 양반."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보스의 부하들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이를 겉으로 나타내는 이는 한명도 없었다. 절대 무례하게 굴지 말라는 보스의 엄명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력 차원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보스가 말했다.
"내기 한번 합시다."
"무슨 내기를 할까요?"
"댁 부하들이 올라간 지 십분이 조금 넘었는데, 여기 있는 아나톨리가 지금 올라가서 먼저 배신자 녀석을 끌고 오면 내가 만 불을 갖고, 아니면 당신이 십만 불을 갖기로 하는거요."
보스는 그 말을 듣더니 만면에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는 제안입니다. 그렇게 하십시다."
아나톨리는 보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스피드는 가히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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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분이 막 지날 무렵, 갑자기 산 위에서 꽝 하는 소리가 나더니, 한 남자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떨어진 그는 조직의 돈을 일부 훔쳐 달아나 용봉산에 숨어있다가 결국 이 꼴이 된 것이었다. 산 위에서는 아나톨리가 배신자의 여자인 듯한 이의 머리를 잡아 끌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내기를 건 이가 보스에게 말했다.
"보스, 내기는 내가 이겼군요. 만 불은 나중에 다른 돈이랑 같이 받기로 하겠습니다."
보스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그의 부하들의 얼굴 또한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보스는 배신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저놈은 뒤 트렁크에 처박고, 계집은 내 옆자리에 태워라. 위에 올라간 녀석들은 서울까지 걸어오라고 해. 이만 철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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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나병주는 조수석에 탄 사내에게 물었다.
"그 귀하디 귀한 세 녀석들은 관리 잘 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놈들은 보험이야. 아주아주 좋은 보험이지. 이 이상 좋은 인질이 어디 있겠나, 안 그런가?"
"보스 말씀이 맞습니다."
병주의 옆에 앉은 여자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었다. 병주는 어깨동무하듯 여자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육중한 손으로 여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 그럴수록 병주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는 새디스트였다. 아마도 여자는 수많은 남자의 노리개가 되어 고생하다가 나중에는 섬이나 티켓다방 같은 데로 팔려가리라. 이것은 차에 탄 남자들의 공통된 예상이었고, 그러한 예는 너무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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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5, 전농고등학교-
업무를 마치고 막 퇴근하던 유성은 교문 입구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진철이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진철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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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만." 유성의 말이었다.
둘은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얘기하는 중이었다. 남자끼리 앉아있는 모습은 그다지 자주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까페에서는.
"내가 놈들을 칠 테니, 당신은 세 녀석들을 구해줬음 합니다." 진철이 말하자, 유성은 약간의 의문을 표시했다.
"헌데 말입니다. 당신에게는 친구가 여럿 있는걸로 아는데, 왜 당신 혼자라는 기분이 들죠?"
"그들은 일 자체가 중단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얘기했소."
"참 눈물겨운 우정입니다만,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그러십니까? 친구간에 의리가 깨지는 건 돈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서로간에 믿지 못하기 때문인 케이스가 더 많습니다."
"그런 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역할을 바꾸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가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할테니, 당신은 그저 멀리 숨어서 지원사격이나 해 주면 됩니다."
"그러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지원사격을 부탁하는 거 아닙니까? 민간인 구출은 드넓은 바다에서 연신 허우적대는 사람을 구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알기로 당신은 사격실력만큼은 초일류라던데, 허명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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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7, 신영백화점 본사-
"아가씨, 여기 있는 청바지 얼마요? 친구한테 선물할건데.."
청바지 코너인 '뱅뱅'의 여점원은 웬 노인네가 이런데서 주책이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표정과 말투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어르신, 실례지만 친구분의 허리 치수가 어떻게 되죠?"
점원은 말하면서 슬쩍 시계를 바라보았다. 10분만 더 참으면 퇴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 내가 그것도 모를까봐? 나하고 똑같지 그럼, 대략 이 정도? 아, 아니..이 정도였나?"

점원은 어이가 없었다. 전날 행사준비 관계로 밤을 꼬박 샌 뒤라 많이 피곤한 상태였지만, 조금만 있으면 퇴근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녀에게 마지막 힘을 주고 있었다.
"죄송한데요. 친구분의 허리 치수를 정확히 모르시면 일단 사시더라도 나중에 반품을 해야 하거든요. 실례지만 선생님 친구분 주소가 어떻게 되나요?"

"그건 와 묻소?"

"제가 퇴근하고 친구분 치수를 재 드리려구요."

"그래? 그러면 내가 너무 고맙지. 잠실이라오. 현일아파트 302동 1004호."

"네, 그럼 이따가 찾아뵙겠다고 연락 주세요."

"아무렴, 정말 고마워요. 착한 아가씨구먼."

"별 말씀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점원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자기 집은 의정부 근처였기에, 퇴근하고 잠실에 들렀다가 집에 가려면 자정 이전엔 어림도 없을 터였다. 입이 방정이었다. 허나 호사다마라고,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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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윤 비서. 빨리 영업 1부랑 3부에 연락해서 정 이사하고 손 이사 내 방으로 빨리 튀어오라고 해! 아, 정 이사 들어올 때 인사기록부 갖고오도록 하고. 알바 명단까지 빠짐없이 말야."
대윤은 비서를 보자마자 대뜸 소리치고는 회장실로 들어갔다. 뭔가 크게 화가 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비서는 그 서슬에 눌려 해야 할 말을 미처 하지 못했다.
회장실로 들어간 대윤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아니,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급히 상의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 뭔가? 우선 차나 한 잔 들지 그래? 윤 비서, 여기 커피 두 잔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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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석 비서실장이 우리한테 새로 부탁한 일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
"서대문파라고..신문이나 뉴스에 몇 번 나올 정도로 규모가 큰 조폭들이 있는데, 이번에 맡은 일은 그 속에서.."
"세 양아치들을 빼내야 한다구?"
"아셨습니까?" 상택은 약간 놀란 눈치였다.
"진철 군이 진즉 날 찾아왔었네. 자네처럼 걱정하는 눈치길래 내가 해결책을 마련해줬지."
대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뭔지 궁금한 얼굴이군. 나중에 진철이한테서 직접 얘길 듣게나."
"회장님, 정 이사님과 손 이사님 오셨습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울렸다. 대윤은 약간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대기하라고 해!"
"저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도록 하게나. 참, 그렇지!"
대윤은 상택을 잠시 불러세우고는 말했다.
"자네, 전부터 진철군이 대체 누굴 통해 임무를 전달받는지 알고 싶어했지?"
"예, 그렇습니다만.."
대윤은 상택에게 명함을 하나 건네며 말했다.
"여기가 그의 주소일세. 한번 찾아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거야. 나중엔 지겹도록 만날 사이가 될 테니까."
"...?"
상택은 대윤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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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규진이, 그리고 손지훈이. 내가 당신들을 뭣땜에 불렀는지 아나?"
"잘..모르겠습니다."
두 명의 임원은 추상같은 대윤의 호통에 그저 몸을 사릴 뿐이었다.
"정 이사, 자넨 캐쥬얼 담당, 그리고 손 이사는 가전코너 담당 맞지?"
"예. 맞습니다."
"정 이사 자넨 캐쥬얼 코너 전 직원에게 특별보너스 100% 지급하게! 이유가 뭔지 아나? 오늘 내가 매장에 들렀더니, 정신무장이 잘 되어있더구만. 다들 일이 많아서 피곤할텐데 내색도 안 하고 말야. 그리고 뭐였더라..그렇지, 발렌시아 코너에 근무하는 혜연이 녀석 근무 끝나고 회장실로 좀 오라고 하게나. 간만에 저녁이나 같이 하게. 그리고 손 이사 당신말야, 직원 교육을 왜 그따위로 시키나? 워크맨 코너는 무슨 노인들 출입제한 구역인가, 엉?"
대윤이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흥분하며 언성을 높이자, 손 이사는 막다른 코너에 몰린 느낌이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구, 손 이사 당신 담당구역은 오늘부터 한 달간 특별괸리 지역으로 지정할 테니까 그리 알라구.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알겠습니다."
"그럼 둘 다 나가봐! 정 이사, 자네도 너무 좋아할 것 없어. 앞으로 자네가 손 이사 꼴 날 수도 있다는 걸 항시 명심하도록! 참, 그리고..뱅뱅 코너 여직원에게 이따가 근무 끝나고 이리 오라고 전하게. 원인을 제공했으니 대가를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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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7, 압구정동-
영신은 뭔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병원을 나서면서부터 집에 오기까지 누군가 미행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기 직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영신이 막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영신 씨 되십니까?"
키 크고 호리호리한 몸집의 남자 하나가 거기 서 있었다.
"예, 그런데요?"
영신은 두려움을 애써 감추고 물어보았다.
"김진철씨 문제로 상의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순간, 영신의 머릿속은 단 한가지 생각으로 가득찼다.
'서대문파?!'
훗날 이 일은 두고두고 웃음거리이자 추억거리로 남지만, 이때 영신은 눈에 거의 뵈는 게 없었다. 영신은 상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간 뒤 자물쇠란 자물쇠는 모두 걸어잠갔다.
그걸 보는 상택은 실로 어이가 없었다. 그 다음 영신이 인터폰을 통해 하는 얘기를 들은 상택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저기, 이봐요. 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상택은 인터폰 카메라에다 신분증을 갖다댔다.
"잘 봐요. 내 이름은 김상택이고, 직업은 사진작가입니다."
상택이 잠시 기다렸지만 여전히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답답해진 상택은 히든카드를 꺼냈다.
"이봐요, 요한이라고 하면 의심이 풀리겠습니까?"
조금 지나자 인터폰은 딱 한마디만을 토해냈다.
"문 열렸으니까 들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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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오해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혼자 사십니까?"
상택이 물었다.
"예,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죠?"
영신의 얼굴엔 약간이나마 경계하는 빛이 서려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상택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회장이 말한 사람이 여자일줄이야..
"뭐 마실 거라도..?"
영신이 묻자, 상택은 정중히 사양했다. 대신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진철 형님과 비서실장 사이를 연결해주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예, 그래요."
"그럼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한 지 잘 아시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죠?"
"어쩌자고 그런 일을 맡긴 겁니까?"
"나도 약간은 후회하고 있지만, 그이는 무모한 일에는 절대로 나설 사람이 아니에요. 필시 뭔가 생각이 있겠죠."
상대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상택은 뭐라 따질 말을 찾지 못하고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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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8, 대치동-
동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특급호텔 '테헤란'의 옥상에 누군가 서 있었다. 진철이었다. 진철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만치 우뚝 솟은 한 교회의 십자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속이 꽉 찬 골프채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끼이익!"
진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준비는 잘 되었습니까?"
"물론이죠." 대답한 사람은 다름아닌 유성이었다. 유성이 지닌 물건은 연막탄 두 개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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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나병주가 저기 오는 게 확실합니까?"
"물론 안 믿길 겁니다. 저 교회,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랩니다. 나병주 같은 인간이 기생하기엔 더없이 좋은 조건이죠."
그들이 말하는 대상은 호텔 전방의 십자탑이 우뚝 솟은 교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신도 수가 너무 적어 문을 닫은 교회를 나병주가 인수한 뒤로 그 교회는 나병주의 아지트처럼 변해버렸다. 나병주가 매수한 목사는 제법 유명세를 떨치는 인물인 탓에, 주민들은 아무도 교회의 정체에 대해 의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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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안에 든건 뭡니까?"
유성은 진철의 옆에 있는 카메라가방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진철은 가방 안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어딘지 모르게 프라모델 느낌이 나는 총이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진철이 총을 전부 조립하는 데는 일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총은 MP5K를 토대로 해서 재창조한 겁니다. 특수 제작된 비비탄을 쓸 수 있으며, 방아쇠 윗쪽의 레버를 놓는 위치에 따라 발사속도가 현저히 달라집니다. 'C'에다가 레버를 갖다대면 애들 장난감에 불과하지만, 'B'에다 놓으면 뼈가 부러지고,'A' 위치에 놓으면..방탄복을 입어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내일 곡소리 나겠군."
"바라는 바입니다. 오늘 하루 이 호텔 꼭대기층 전세냈으니까 아무 방에서나 묵으셔도 상관없습니다."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모텔에 먼저 방을 잡아놔서 그리로 가야 할것 같습니다. 이왕 돈 주고 빌린 건데 그냥 썩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좋을대로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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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9, 대치동, AM 10:00-
"검찰 녀석들은 지금 어디 있냐?"
나병주는 부하들과 함께 테헤란 호텔의 3층 객실에 묵고 있었다. 나병주가 물어보자, 부하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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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은 부하가 대답했다.
"일개 중대 규모의 경찰 병력이 산에 숨어 있답니다."
"계획대로 되어가는군. 유정일이 그놈, 미끼로 내세우기엔 너무 아깝까운 녀석이지만..경찰을 속이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자그마치 천만달러짜리 거래니까 말야. 안 그러냐?"
"맞는 말씀입니다."
나병주는 꼭 확답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여자는 관리 잘 하고 있냐?"
느닷없이 병주가 묻자 부하는 머리를 긁적였다.
"누구..말씀입니까?"
"얼마 전에 잡아온 계집 있잖냐?"
배신자의 여자를 가리켜서 하는 말이었다.
"예. 일단은 웨스턴 호텔 객실에다가 잘 감춰 두었습니다. 헌데 그렇게까지 특별 관리할 필요가 있는겁니까?"
"당연하지. 섬으로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몸을 가졌어. 얼굴도 반반하고..M&M 두목한테 넘기면 흡족해할 거다. 지금 몇 시냐?"
"열 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그럼 앞으로 한 시간 뒤면 역사적인 거래가 이뤄지겠구만. 준비해서 나가자!"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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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진철과 유성은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몇 층을 사이에 두고 사냥꾼과 목표물이 대치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유성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했다.
"댁은 이 일이 끝나면 대가로 뭘 얻습니까?"
진철은 잠시 생각했다.
"금전적인 건 아닙니다. 원하는 게 있다면..족쇄에서 벗어나는 것, 바로 그겁니다."
"족쇄라니, 무슨 의미입니까?"
"행동의 자유입니다."
그때였다. 교회쪽으로 설치해 놓은 감시카메라 화면에 여섯 대의 승합차가 교회 앞에 멈추는 게 찍혔다.
"예상치곤 너무 많은데?"
유성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차에서 누가 내립니까?"
"음..엇, 저 녀석은?"
유성은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을 발견했다. 금해진 진철 또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검찰이 허탕을 친 것 같습니다."
그들이 본 얼굴은 M&M의 부두목 정근태였다. 그가 여기 왔다는 것은 검찰의 정보가 틀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작전은..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진철은 신음소리 비슷한 말로 중얼거렸다.
"세 양아치 녀석들 사진 좀 줘 보시죠."
진철은 사진을 건네면서 물었다.
"어떡하려구요?"
"어떡하긴, 밀고 들어가야죠."
"만용도 부릴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 겁니다."
유성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두려우면 당신은 그냥 여기 있어. 나 혼자 갈 테니까."
"...!"
승산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가만히 있을 그는 아니었다.
"괜히 우는 소릴 해서 미안합니다. 그럼..가서 한판 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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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11:20-
"끼이이익!"
입구에 들어선 유성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좌측에 하나, 우측에 셋..나머지는 어딜 갔지?'
방법은 하나,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넷중의 하나를 골라 족치면 될 것이었다. 좌측에 홀로 앉아 있던,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유성에게로 다가왔다.
'당신 뭐야?"
"고등학교 선생님."
"나 참, 별 그지깽깽이 같은게..기도하려거든 딴 데 가서 해!"
선글라스의 사내가 유성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유성은 그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아 올렸다.
"끄윽..! 너 뭐하는 새꺄?"
"말했잖아, 학교 선생이라고. 가서 너희 두목한테 말해. 양대수, 김윤수, 조태현 이 셋만 곱게 넘겨주면 아무일 없을 거라고. 쌍방간에 피를 보는 일은 되도록 자제하는 게 서로간에 이로울 테니까."
유성은 남자의 목덜미를 놓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남자는 괴로운 듯 연신 헐떡거렸다.
"딱 십 분을 주겠다."
선글라스의 사내는 저만치 가더니 갑자기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킬킬킬..이게 뭔지 알아?"
"...?"
품 속에서 호루라기를 꺼내든 남자는 그것을 입에 가져갔다.
"삐이이익!"
"무슨 수작이지?"
"뭐긴, 널 저승으로 보내는 신호지. 얘들아, 없애버려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측에 읹아 있던 셋 중 하나가 유성을 향해 빠르게 덮쳐왔다. 얼굴에 가면을 쓴 이 사내는, 유성이 미처 방어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그의 가슴에 일 장을 내갈겼다.
"큭!"
난데없이 습격을 당한 유성은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그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상대의 발이 그의 안면을 향해 폭사했다. 유성은 간신히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지만, 그의 뒤에 있던 교회 의자는 그대로 반쪽이 나고 말았다. 유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얕보면 큰일나겠군.'
수세에 몰린 유성은 계속 피해다녔지만, 결국 한계에 다달았다. 목덜미를 잡힌 유성은 교회의 중앙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주위에는 최초로 그를 공격한 사내와 함께, 나머지 둘이서 유성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어쩐다?'
갑자기 품 속에 있던 연막탄이 떠올랐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때 사용하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쉬이이익--!"
짙은 연기 속을 뚫고 유성은 재빨리 입구까지 달음질쳤다. 입구의 문을 여는 순간, 머리 위에서 굉음 소리가 났다. 곤봉 하나가 유성의 머리 위로 떨어지자, 유성은 두 팔로 곤봉을 막았다.
"빠악!"
곤봉에 의해 머리가 박살나는 참상은 막았지만, 그 대신 유성의 두 팔목은 이상한 형태로 너덜너덜거렸다. 뼈가 부러진 것이었다. 유성은 팔이 부러지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안면을 향해 수차례 발길질을 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신의 발길질 한 번으로도 정신을 잃어야 마땅하지만, 가면을 쓴 괴인은 예외였다. 대신, 괴인의 얼굴을 가린 가면의 끈이 벗겨졌다. 최후의 순간, 괴인의 얼굴과 마주한 유성은 외마디 신음소리를 냈다.
"넌..?!"
"이제 알았냐? 바로 네가 말한 녀석이지."
한쪽 구석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신종 마약의 위력을 최초로 보게 돼서 영광이군. 이름하여 SMD! 이 호루라기만 불면, 누구든 간에 말 잘 듣는 슈퍼맨으로 변하지."
유성의 목을 졸라 위로 치켜든 이는 바로 양대수였다. 그의 눈은 마약 때문인지 초점이 흐릿해져 있었다.
"밖으로 던져버렷!"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고 누군가가 밖으로 튀어나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멀리서 이걸 본 진철이 급히 달려갔다.
"이봐, 괜찮아?"
유성의 몸은 성한 데가 없었다. 신음소리를 제외하고, 유성이 진철의 귀에 속삭인 말은 단 한 마디였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에 놀라지 말라구, 친구."

'웬 헛소리지?'

진철이 보기에, 유성은 당장 병원에 옮겨야 할 상태였다. 진철이 유성을 들쳐업으려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유성의 몸이 무거워졌다.

...

...
...
스으으으..!
순간 이상한 바람소리와 함께 유성의 몸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져갔다.
"이봐, 정신차려!"
진철이 유성을 들쳐업으려는 순간, 유성의 손 하나가 진철의 왼쪽 귀를 잡아당겼다.
"내 말 똑똑히 들어..! 날 이 꼴로 만든 놈이 누군지 알아? 바로 양대수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낭랑했던 유성의 목소리는 마치 쇠를 긁는 듯한 음을 내고 있었다.
"자네가 잘못 본 거야.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사진 속의 양대수는 누가 봐도 약골이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한 놈이 그러더군. SMD 덕분에 그리 되었다고 말야."
"우두두둑!"
사람의 뼈가 어긋나는 듯한, 섬찟한 소리와 함께 유성이 몸을 일으켰다.
"이..이봐?"
유성의 눈은 검은 눈동자가 사라져 있었다. 부러져 있던 팔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상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유성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진철이 막아섰다.
"뭐하는거야? 당신은 지금 중상을 입었어!"
"난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간만에 스트레스를 풀 수 있게 되었거든."
상황에 맞지 않게 유성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마저 보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진철은 깨달았다.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면서도 얼마든지 공포를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을...
진철의 귀에 대고 유성이 몇마디 하자, 진철은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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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이이이...
교회의 문이 열리고 피투성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내가 돌아왔다."
선글라스는 유성을 보더니 손사래를 쳤다.
"불쌍한 자식, 그렇게 맞고도 정신 못차렸구만. 한번 더 불어주랴?"
선글라스는 호루라기를 흔들어 보였다.
"마음대로."
"그래? 이번엔 목숨 부지하기 힘들거다."
선글라스가 호루라기를 입에 대려는 순간, 교회 한 쪽의 유리창이 박살나며 총탄 한 발이 선글라스의 손을 꿰뚫었다.
"크아아아!"
선글라스는 그런 와중에도 떨어뜨린 호루라기를 주우려고 했지만, 이미 호루라기는 유성의 손 안에 있었다. 유성은 선글라스를 조롱하듯 말했다.
"불고 싶지?"
"저 놈들을 데려간다고 했지? 빨리 데려가라구, 어서!"
"그런 말은 진작에 했어야지.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너부터 시작해서 네 두목까지 갈아마시고 싶은 심정이야. 앞날이 창창한 녀석들을 저 꼴로 만들었으니, 죄값은 해야지. 안 그래?"
유성의 손은 선글라스의 목 울대를 차츰 조여갔다.
"끄윽..!"
"어딨냐? 네 두목. 3초 안에 얘기하면 살려준다."
선글라스는 한 손으로 단상쪽을 가리켰다.
"단상 아래쪽에 내려가는 계단이.."
"무슨 얘긴지 알았다. 그만 자라."
유성은 선글라스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선글라스는 일격에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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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은 단상의 한쪽 끝을 조심스레 들어보았다. 육중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단상은 비교적 쉽게 기울어졌다. 틈이 생긴 순간부터, 지하에서부터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단상을 원래 상태로 하는 순간, 말소리는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완벽한 방음이로군."
유성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철이 말했다.
"밑에 있는 놈들이 우리 소릴 듣고 줄행랑이라도 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기우였군."
유성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유성은 진철에게 호루라기를 건네며 말했다.
"난 내려갈 테니까, 자넨 저 녀석들을 감시해주게. 호루라기만 잘 챙기면 별 일은 없을거야."
"말리진 않겠지만, 만용은 부리지 말게나. 자넬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회장님 볼 낯이 없어지니까 말야."
"말 한번 정답게 하는군."
유성은 피식 웃더니, 단상을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인 뒤 지하통로의 벽에 설치된 사다리를 따라 밑으로 내려갔다.
"참 깊게도 팠군." 진철은 유성이 내려간 구멍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하는 그 끝이 어딘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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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요?"
"좀 인내심을 갖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히 대낮에 돌아다니다가 경찰 눈에 띄면 뼈도 못 추립니다."
지하 공간 속에는 M&M의 부두목 정근태를 비롯한 부하들과 서대문파 일당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호텔같은 데서 만나자고 하는 건데..여기 계속 있다가 괜히 질식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정근태는 연신 불평을 쏟아냈고, 그 말을 듣는 나병주는 이마의 핏줄을 마구 실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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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교회로 이어진 통로 쪽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엇, 뭐지? 아나톨리!"
아나톨리는 통로 주변을 샅샅이 살폈으나 수상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별일 아닙니다."
아나톨리가 뒤돌아서는 순간, 바로 뒤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아나톨리는 잠시 주춤하더니 신음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앞으로 거꾸러졌다. 그의 목덜미에서부터 척추의 맨 아래 부분까지 한 줄로 길게 그어진 상처가 나 있었다. 전세계에서 악명을 떨치던 용병집단 '클레멘타인'의 리더로서는 참으로 어이없는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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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타타타타!!"
리더의 죽음에 분개한 나머지 일원들은 적이 있다고 예상되는 지점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탄창을 전부 비우고 나자, 지하는 온통 화약연기로 가득찼다. '클레멘타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같은 상황에 익숙지 않았던 듯 연신 기침을 해댔다.
"니미! 아주 주목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만! 경찰한테 들키고 싶어서 환장했나?"
나병주가 손가락질까지 하며 욕을 퍼붓자, 정근태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남 일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컥!"
나병주의 목은 '클레멘타인'의 한 대원의 손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희희낙낙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화약고 같은 분위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병주의 목을 틀어쥐고 있던 손은 어느새 제자리를 찾아간 뒤였고, 병주는 나름대로 사태를 파악했다.
"지금 이 안에, 우리가 모르는 적이 침투했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오. 아무래도 누군가가 사다리를 이용해 부비트랩같은 장치를 한 것 같은데..?"
적의 시체조차 눈에 띄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병주의 논리가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다음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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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악!"
두개골이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일당의 가운데에 있던 나병주는 그대로 천장에 부딪히며 떨어졌다. 숨은 벌써 끊어졌지만, 몸은 경련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머리는 절반 가량이 먼지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아나톨리에 이어 나병주까지 희생되자, 지하실 안은 대혼란에 빠졌다.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사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 두 명의 목숨이 더 달아났다.
"꼴 좋군."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마치 쇠를 긁는 듯한 기분나쁜 목소리가 훌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일당들의 공포심을 더욱 자극했다. '클레멘타인'이 정예집단이라고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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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11:54-
단상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유성이 그 속에서 기어나왔다. 처음 지하로 들어갈 때와는 달리 유성은 얼굴이 매우 벌개져 있었다.
"괜찮아?"
"괜찮지 그럼. 꼭 들어야 하는 얘기가 있는데 말해줄까?"
"뭔데?"
유성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앞으로 십 분만 지나면 여긴 끝장이야. 타이머를 조정해 놨거든."
"뭣?!"
유성은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난데없이 시한폭탄이라니?'
진철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순간, 그는 호주머니에 넣어둔 호루라기가 생각났다.
"삐이이익!"
호루라기를 입에서 떼기도 전에 세 꼭두각시는 진철의 앞에 집결했다.
'넌 저 사람을 들쳐업어라."
진철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효과는 적중했다. 진철에게 지목받은 한 사람이 유성을 어깨에 짊어지자, 진철은 셋에게 자기를 따라나오도록 명령했다. 전날 미리 세워둔 승합차에 일행이 전부 타자, 진철은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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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교회에서 한참을 떨어지자, 진철은 어렴풋이 진동을 느꼈다. 차는 일반 병원이 아닌, 오대윤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뒷수습을 하기엔 그 이상 적당한 장소가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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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탈진입니다. 대략 2~3일 정도 휴식을 취하면 기운을 회복할 겁니다."
오대윤의 주치의가 직접 유성의 상태를 검사한 뒤 내린 결론이었다.
진철은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봐요, 의사선생님. 이 남자 분명히 팔도 부러지고 머리도 다쳤단 말입니다. 그냥 탈진이라뇨?!"
"내 말 못 믿겠으면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던가. 속고만 살았나, 이 사람?"
진철은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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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군, 놀랄 것 없네. 내가 설명하지."
마침, 그때 회장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진철은 정말로 유성을 들쳐업고 응급실로 뛰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교수님, 수고하셨습니다. 운전기사한테 댁까지 모셔다드리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치의는 잠시 진철을 빤히 쳐다본 뒤 밖으로 나갔다.
"진철 군."
"예, 회장님."
"혹시 유성이한테서 뭔가 이상한 느낌 안 들던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예, 뭔가..말로는 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진철이 회장에게 들은 말은 경악할 만한 수준의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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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좀비영화 본 적 있나?"
"예? 아, 로메로 감독 영화는 빼놓지 않고 다 봤습니다만..?"
"좀비든 뭐든간에, 사실을 왜곡하는 영화가 한둘이 아니라네. 자넨 좀비가 뭐라고 생각하나?"
"한 마디로, 느릿느릿 걸어다니는 시체 아닙니까? 오로지 사냥만을 위해 움직이는.."
"그건 단지 상상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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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오전 12시경, 대치동 주택가 인근의 교회 지하실에서 가스폭발사고가 일어나 주민 수백가구가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은 상태이며, 교회 건물 전체가 소실됨에 따라 사고 원인을 정확히 밝히는 데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권주하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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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네."
대윤은 얘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유성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되었을 때의 일이네. 하루는 녀석이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자랑을 하더군. 어린 놈이 벌써부터 연애질이라니..난 혼쭐을 내줄까도 생각했지만 결국엔 그냥 넘어갔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대윤은 답답한 듯 줄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불미스런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진철이 물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녀석은 자기 여자친구와 함께 전국일주를 하게 해달라고 날 조르더군. 난 조건을 내걸었지. 다음 학기에 학년 전체에서 10등 안에 들 자신 있으면 갔다오라고.."
대윤은 그답지 않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녀석이 여행을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 밤에, 전화가 한통 걸려왔네. 전남 광양이었던가? 경찰이 하는 말이, 유성이가 여자친구를 보호하려다 동네 양아치들과 시비가 붙었다고 했었네. 전화를 끊자마자 밤새도록 달려 경찰서에 도착했지. 거기 있는 형사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얘기하더군. 어떻게 고등학생 한 명이 깡패 수십명을 뭉개버릴 수가 있냐고 말일세."
"정당방위였습니까?"
"불행히도, 그중 하나가 죽었네. 유성인 소년원 신세가 되었고, 군인의 꿈은 접어야만 했지."
"여자친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아인 그날 이후 가출했다고 하더군. 유성이 부탁으로 내가 전국을 수소문했지만 행방을 알 길이 없었네. 중요한 건 그게 아냐. 그때의 양아치 하나가 날 찾아왔었네. 자기가 유성이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얘기하더군."
"협박이었습니까?"
"그렇지. 난 화를 겨우 눌러 참고 그놈의 얘기를 들었지. 눈에서 빛이 났다는둥, 주먹으로 치니 상대가 저만치 나가 떨어지더라는둥, 마치 무협지 주인공같은 얘기를 나열하더군. 남들이 들으면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는 걸로 여겼겠지만, 난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네. 엄연히 사실이었으니까."
"결론은..그 친구가 좀비라는 얘깁니까? 전 전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자네, 유성이가 벗은 모습을 한번이라도 본 적 있나?"
"아뇨, 전혀.."
"봤다면 자네도 믿지 않고는 못 배길 걸세. 한날 한시에, 그렇게까지 자상(刺傷)을 많이 입고도 살아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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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31, 한남동-
"회장님, 저 왔습니다."
인터폰을 통해 진철의 목소리가 가정부에게로 전달되었다.
"덜컹!"
문이 열리고, 진철은 동행인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괜히 떨리네. 나 어때? 괜찮아?"
"제법 신경쓴 티가 나네."
진철은 웃으면서 얘기했다. 동행인은 다름아닌 영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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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약혼녀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영신이라고 합니다."
진철은 영신을 거실 안의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거실에는 회장 말고도 진철의 동료들 전부가 와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영신과 구면이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영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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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위기가 무르익자, 진철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슬슬 다음 타겟을 정할 때가 온 것 같은데, 난 도영파로 했으면 하는데..니들 생각은 어떠냐?"
"대형, 손님도 계신데.."
블랙 나이트의 막내, 신영주와 진철의 시선이 마주쳤다. 영주는 영신을 흘깃 쳐다보았다. 외부인 앞에서 해야 할 얘기가 아니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그러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상택이 한 마디 했다.
"영주야, 걱정 마라. 진철 형님, 이젠 밝힐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진철은 잠깐 영신을 바라보았다. 영신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럼 말하지. 이제까지..비서실장과 우릴 연결해준 사람은 바로 여기있는 내 약혼녀야."
동료들의 표정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 일로 인해 '연락책'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회장이 상황을 대신 수습했다.
"상택 군, 재필 군, 그리고..영주 양."
"예, 회장님."
"그런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혀서야 쓰겠습니까? 더구나 형수님이 되실 분인데 말이오."
"죄송합니다, 형수님.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상택이 대신 사과했다.
...
...
...
-1988.1.31, 압구정동-
"도영파가 누구야?"
"뭐?"
"궁금해서 그래."
난데없는 호기심이라니..진철은 기껏 공들인 로맨틱 무드가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좋게 말하자면..사창가의 대부라고나 할까?"
"그다지 좋은 표현도 아니네, 뭘. 근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대?"
"영등포를 휘어잡고 있거든. 빠져나갈 구멍이 하도 많아서 경찰도 속수무책이야."
"그런 사람 상대해도 괜찮겠어?"
진철은 영신을 잠시 쏘아보았다.
"내가 그렇게 약하게 보여?!"
진철이 영신의 옆구리를 마구 간질이며 말하자, 영신은 간지러워 죽겠다며 이리저리 뒹굴었다. 그 바람에 벽에 걸려있던 달력이 바닥에 떨어졌다. 달력의 1월 마지막 날 아래쪽에는 조그맣게 'D-95'라고 빨간 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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