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녀의 독백 : 입학 > -
난 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많은 남자 선배들과 동기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하긴 내가 서울과학고에 처음 입학할 때도 그랬었다.
그런 남자 동기들이 우습기도 하다.
나를 보고 온갖 호의를 베푸는 남자들이 자꾸만 우습게만 느껴진다.
단지 내가 다른 여학생들 보다 조금 예쁘다는 것 때문이리라.
의대를 갈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었다. 하지만 난 생물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무언지 모르는 미지의 생물체를 현미경으로 보고 있을 때의 짜릿함을 잊을 수 없기 때문
이다. 의사가 안정적이라고 떠밀었던 부모님 이었지만, 난 이 짜릿함을 포기 할 수가 없
었다.
어쨌던, 이제 나의 새로운 학창 생활은 시작된다. 이 학교에서 난 그 짜릿함을 마음껏
맛 보길 기대하고 있다. 적어도 최고의 실험기자재와 연구요건을 갖췄다고 하는 학교니
까 그만큼 기대가 더욱 커진다.
- < 그와 그녀의 아주 우연한 만남 > -
- 꽈당탕 ... 우장창 ...
"아니 지금 자전거 다니는 도로에 그렇게 몸을 구부리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화가 난듯한 목소리로 크게 소리를 지른 건 태곤이었다. 강의가 늦어 서둘러 자전거를 타
고 강의실로 가던 태곤은 엎드려서 무언가를 하고 있던 윤정을 미쳐 보지 못하고 급하게
피하면서 도로 옆의 가드레일에 자전거를 받아 버린 것이다.
그가 그렇게 큰소리로 화를 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앞에 구부리고 있는 여자는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태곤은 그 여자의 태도에 슬슬 화가 났다.
"아니, 이봐요. 미안하다는 말 정도는 해야 되지 않아요?"
화를 내면서 태곤은 바닥에 넘어져 흙먼지가 잔뜩 묻은 바지를 털면서 그녀 쪽으로 다가
갔다.
"아악! 안돼요! 오지 마세요!”
갑자기 내지른 윤정의 비명에 태곤은 깜짝 놀랐다.
"예? 예? 죄송합니다."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을 한 듯, 오히려 위축되어 버리고 말았다.
'뭐지? 내가 뭘 잘못 하기라도 한 건가? 이 여자는 여기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건가?'
갑작스런 사태에 화가 났던 그의 마음은 이젠 호기심으로 변했는지, 그는 그녀 옆에 같
이 쪼그리고 앉았다.
"도대체 뭘 하고 계신가유?"
호기심에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한 태곤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갑자기 그녀가 ‘휙~’ 하고 그를 돌아 보았다.
그녀 모습에 그는 숨이 막힐 듯 얼굴이 벌개졌다.
"누구시죠?"
'아니 뭐야, 우리 학교에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었던가?'
"아 .. 네 .. 어 .. 저기 .. 그게 .."
그녀의 갑작스런 엉뚱한 질문에 태곤은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의 가슴속은 갑자기
답답해 지면서 벅차 오르기 시작했다.
'뭐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
"아, 전 물리학과 95학번 이태곤이라고 합니다."
교수님이 질문 할 때 대답 하듯, 그는 또박또박 자신의 관등성명을 밝혔다. 아마 그녀의
미모에 주눅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 선배님 이시군요! 전 98학번 생명과 ‘박윤정’이라고 합니다."
고꾸라진 자전거는 돌볼 틈도 없이, 그리고 강의에 늦은 태곤은 그 어떤 것도 생각할 겨
를도 없이 그렇게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 그런데 ...... 어쩐 일로 ...... 여기에 그렇게 쪼그리고 혼자서 ... 뭘 하고 있
었는... 데 ... 요 .. ?"
그는 그녀가 후배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이, 무슨 선배님이 존대 말을 쓰고 그러세요. 말 놓으세요. 그냥 바닥에 풀이 나서 보
고 있었어요 ……"
'헉, 풀 .. 웬 풀 ... 이 여자는 길가다가 바닥에 풀이 나면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쳐다
보고 있나? ... 그래도 저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 같다 ...'
그는 정신을 못 차리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질문했다.
"아, 네에 … 뭐 특이한 풀인가 봐요?"
별로 이어갈 말이 없었던 태곤은 이미 고꾸라진 자전거와 들어갈 수업은 잊은 듯 했다.
마치 그에게 그녀는 삼류소설의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냥 잡초에요 ... 아스팔트 바닥에 잡초가 자라는 게 신기해서 보고 있었어요. 선배님
도 여길 한 번 보세요. 신기하지 않나요? 그렇게 높은 열로 아스팔트를 깔았는데도 거길
뚫고 풀이 자라잖아요. 그게 너무 신기해서 ... "
'흠 .. 나와 운명적이긴 한데 약간 사이코 같은 면이 있는 여자인 것 같은걸 ……'
하지만 그녀를 보고 느낀 그의 설렘은 그녀를 놓아주기 싫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자 풀은 그만 보시고, 저랑 차나 한잔 하시는 건 어때요? 후배님 덕에 강의도 너무 늦
은 것 같은데 …… "
정말 태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유치한 접근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구닥다리같은
말투의 차 한잔 하자는 꼬심이라니 ... 그것도 잡초를 관찰하며 쭈그리고 앉아서 뚫어지
게 쳐다보고 있는 이 여자에게 말이다.
태곤은 이내 얼굴이 화끈거리며 더욱더 벌겋게 달아 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을 기다
리며 결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요, 저는 차는 괜찮구요 ... 혹시 아무거나 통 같은 거 가지고 계신 거 있으세
요 ?"
갑작스런 그녀의 엉뚱한 질문에 또 한번 그는 당황했다. 이제 그의 얼굴은 붉어 지다 못
해 타오르는 용광로의 화염과 같았다.
그녀가 멀뚱멀뚱한 눈으로 빤히 태곤을 쳐다보며 통을 달라지 않는가. 없으면 만들어라
도 주어야 될 것 같은 기분 이였다.
"어… 어… 통이요? ... 에구, 실험할 때 쓰는 마이크로 필름 보관용 통은 있는데 ... 그
거라도 드릴까요?"
그나마 가방 속에라도 가진 통 비슷한 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태곤
에게 윤정은 활짝 펴진 귀여운 얼굴로 그의 팔에 매달리며 그녀 답지 않은 호들갑까지 떨
어가며 태곤에게 재촉을 해댔다.
"그래요? 빨리 주세요 ... 빨리요 ... 저 이거 꼬옥 담아가고 싶어요 …"
‘불타는 공대여성의 열혈정신인가?’
어찌되었건 그녀가 원하는 대로 태곤이 마이크로 필름을 보관하기 위한 작은 통을 건네
주자 마자, 윤정은 거기에 무언가를 담더니,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그 잡초도 어느샌가
작은 가위로 잘라내어 통에 담았다. 무슨 보물이나 신주단지 모시듯이 소중히 담고 있었
다.) 날렵한 몸짓으로 벌떡 일어났다.
또 한번 예기치 못한 윤정의 행동에 당황한 태곤은 덩달아 일어 나며 물었다. 그는 수업
이던 뭐던 모두 포기하고라도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리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였다.
"저기 .. 후배님 .. 시간 ..... "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예쁜 후배 윤정은 태곤이 수업을 듣기 위해 오던 길로 내달음질 치
며 소리쳤다.
"선배님 고마워요, 그럼 담에 또 봐요 ...... "
‘헉, 내 오천 원짜리 보관 통만 사라진 채 ... 이렇게 허탈함만 남긴 채 ……'
태곤은 널브러진 자전거, 그리고 자전거에서 튕겨 나올 때 찢겨진 바지와 깨진 무릎 사이
로 흐르는 피도 인식하지 못한 체, 허탈하기 그냥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윤정을 처음 본 태곤은 그렇게 아리따운 여자가 자기와 같은 교정에서 수업을 받
고 있었는데 모르고 있었던 자기를 무한정 원망했다. 하지만, 이제 ‘통’이라는 공통의
매개체가 생긴 만큼 앞으로 눈 씻고 찾아 다니면 더 자주 볼 수 있겠지 하는 부푼 마음
을 가슴에 안고 한참을 몽상에 빠졌다. 하지만 몽상은 몽상이고 그는 이내 현실적인 세계
로 돌아 와야 했다.
- 아차, 수업! , 오늘 수업 빠지면 망한다.
KAIST 물리학과 내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교수의 수업. 늦으면 늦은 만큼 교탁 옆에서 일
분에 한 개씩 소위 ‘푸샵(Push-Up)’이라는 육체 노동을 해야 했다. 머리 나쁘고 성실하
지 못하면 몸으로 때우는 게 교수의 지론이라나?
'헉 체력도 약한 나이거늘, 하늘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셨구나.'
널브러진 자전거를 챙길 틈도 없이 단번에 그는 강의실로 내달음 쳤다.
- < 그와 나의 이야기 > -
"이야 이게 웬일이야, 천하의 KAIST 초특급 모범 영재 태곤 선배가 지각을 다 하셔서 공
포의 푸샵을 50개씩이나 하시구 …… ?"
강의가 모두 끝난 시간, 학생들이 우르르 나오는데 항상 싱글거리며 태곤을 잘 따르는 윤
수가 놀리는 듯이 말했다.
"너 선배한테 샤워실 에서 물 틀어 놓고 먼지 날 때까지 맞아 볼 텨?"
태곤은 얄밉게 굴긴 하지만 언제나 귀여운 후배 윤수에게 농이 섞인 가벼운 협박을 던졌
다.
"그나저나 선배, 바지는 폼으로 찢은 거유?"
한번 빈정거린 윤수는 계속 꼬투리를 잡아서 시비를 걸었다.
'이게 후배 맞아 ... 어휴 ... 내가 후배를 너무 귀엽게만 키운 거 아냐 ...'
얄미운 윤수를 째려보던 태곤은 그제서야 정신을 가다듬어 강의실에 올 때까지의 사건을
머리 속에 정리 할 수 있었다.
‘아, 내가 여우에게 홀렸던 것인가. 하긴 그렇게 예쁘게 생긴 여우가 우리 학교에 있을
리 없지 … 흠, 윤수가 98학번 이었나? '
갑자기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진 태곤은 윤수에게 따끔한 야단대신 그녀에 대한 질문을 하
기 시작했다.
"야! 윤수야, 니네 동기 중에 윤정이라는 애 알아?"
윤수는 윤정이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얼굴에 정색을 했다.
"왜요 선배? 선배도 윤정이한테 관심 있어요? 난 선배는 공부만 할 줄 알았는데 … 이
야 ... 하긴 공부만 하는 선배 귀에까지 ‘윤정양’ 이야기가 들어 갔으니 윤정이가 유명
하긴 하군요 ..."
일단 여기까지 들은 태곤은 윤정이라는 후배가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저 윤수의 표정을 보아하니 윤정에 대한 정보를 더 캐내려면 만만치 않
은 대가를 치려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음 수업도 촉박하게 있었
기 때문에 자전거 까지 망가진 태곤으로서는 일단 ‘윤정’이라는 후배가 있다는 것에 만
족한 채 윤수에게 얄미운 한 마디를 던지고 다음 강의실로 냅다 뛰었다.
"야, 너 안색이 변하는 거 보니까 관심 있다 본대 ... 선배가 찍은 여자니까 이젠 관심
끄도록 해라. 얄미워 터진 윤수군 ~!"
"선배님 하지만 윤정이는 .. "
윤수는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태곤을 불렀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태
곤은 벌써 다음 강의실을 향해 사라져 갔다.
- < 그에게로 다가온 첫 악몽 > -
그날 태곤의 하루는 굉장히 피곤 했다. 넓은 교정을 망가져서 널브러진 자전거 덕분에 이
리 뛰고 저리 뛰며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복수 전공을 하고 있는 그에게
는 남들보다 많은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10분 간격의 쉬는 시간을 가진 수업을 맞추기
위해 하루를 정신 없이 보냈던 것이다.
밤에 기숙사로 돌아온 태곤은 잠시 낮에 보았던 윤정의 아리따운 얼굴을 상상했다. 하지
만 결코 그녀의 아름다운 상상일지라도 피곤함에 지친 태곤의 수면을 방해하기는 역 부족
이었다.
꿈인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이미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은 채 축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
다.
'뭉클, 뭉클'
무언가 기분 나쁜 것이 태곤의 몸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태곤은 천근처럼 무거워
진 눈꺼풀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에이 꿈이구나, 근데 꿈도 귀찮구먼 ... '
너무 피곤했던지, 태곤은 꿈속에서의 감각마저 귀찮게만 느껴졌다.
'따끔'
무언가 찌르는 듯한 다리의 느낌, 아마 아까 낮에 다친 무릎이듯 하다.
‘아야, 따갑네 ... 다리를 아까 많이 다친 건가?'
다리에는 묘하게 생긴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비록 꿈이지만 태곤은 긴장감이 확 몰려
왔다.
'헉 저게 뭐지 ... 징그러워 ... '
무언가 태곤의 무릎에 달싹 들러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
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쥐가 난듯한 느낌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게 마치 다리와 뇌를 연
결하는 신경이 전부 차단된 느낌이었다.
'헉 이게 무슨 일이지, 이게 가위에 눌렸다는 건가?'
평소에도 꿈을 잘 꾸지 않던 태곤은, 공학도 답게 냉정한 추리를 하고 있다. 당연히 꿈속
일 거라 상상하는 그였지만, 그의 호기심에 대한 해석은 거의 직업정신에 가까웠다.
그의 다리에 스물 스물 움직이고 있는 그것, 그건 마치 개미처럼 생겼다.
그가 본 것이 점점 구체화 되자 그의 이성적 판단은 그 이상한 물체를 아주 거대한 개미
로 단정지었다. 하지만 이상스럽게도 그것은 마치 뱃속에 녹색의 투명한 젤리를 넣어 둔
것처럼 빛나는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난 태곤은 마구 손을 흔들며 온몸을 몸서리 치며 일어났다.
'에이 뭐야 꿈이 었나 ……'
평소 꿈을 잘 꾸지 않던 태곤은 갑작스런 악몽에 온 몸에 오한이 듯 든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고 꿈에서 돌아온 현실에서도 이상스럽게 오른쪽 무릎이 따끔거렸다.
'에이, 아까 낮에 다친 상처 딱지가 떨어 졌잖아.'
자면서 악몽 때문에 몸부림을 많이 쳤는지 상처에 붙여 두었던 대일밴드는 떨어져 나갔
고, 상처의 딱지도 그것과 함께 떨어져 나간 듯 했다.
따끔거리는 느낌에 피도 조금 나고 있었기에, 태곤은 서랍을 뒤져 발간약과 대일밴드를
다시 붙였다.
이내 꿈으로 치부해 버린 태곤은 피곤한 몸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듯 다시금 그런 악몽
에 시달릴까봐 두렵기도 했지만 이성적인 판단과는 무관하게 몸은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붉은 더듬이, 온몸이 투명한 녹색의 손바닥만한 크기 바라보고 있으면 섬뜩한 느낌이 드
는 개미의 입의 형상은 징그러움을 떠나 마음속 깊은 곳의 공포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
한 것이었다. 또한, 마치 두 개의 톱을 붙여 놓은듯한 개미의 입에는 침을 흘리는 듯한
진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악 ... "
공포를 이기지 못한 태곤은 결국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태곤의 부스럭거림에 잠을 설친 태곤의 룸메이트는 짜증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우, 형 잠좀 자자 ..."
정말 듣도 보도 못한 그런 징그러운 놈이 꿈에 나오다니. 원래도 벌레를 싫어했던 태곤
은 이제 잠을 자기에는 공포감이 너무나 크게 밀려왔다.
‘내가 개미를 너무 많이 죽였나?’
어린 시절 개미를 갖은 방법으로 학살하던 그의 모습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아!, 꿈이 싫어서 잠들기가 싫다. 전산실에 가서 전산 실습 과제나 해야겠다.’
태곤은 늦은 새벽 이었지만 공포스러운 꿈 때문에 결국 잠들지 못하고 기숙사 방에서 뛰
쳐나와야만 했다.
-< 유혹의 노래, 기다림의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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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저택의 왕 , Baal-Zebul[바알제불]
썩은 고기를 향해 몰려드는 우리의 제왕.
대식[Gluttony]을 관장하는 우리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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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이거 재미 있다."
유난히 만화를 좋아하는 나는 윤정을 기다리다가 최근 나온 신간인 [타짜4부)벨제붑의 노
래]를 읽고 있다.
벨제붑이 무엇일까 굉장히 궁금했던 나는 만화방 한 켠에 마련된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
에 접속한 후에 열심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음 대식을 관장하는 신이라. 그리고 파리를 다스리는 왕이라는 거군. 과거 사람들이 죽
으면 몰려드는 파리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니, 파리를 다스리는 왕이라는 죽음의 마왕이라
불릴만 하군'
나이는 들만큼 들었는데, 아직 나는 만화가 너무 좋았다. 학창시절을 포함해서 거의 안
읽은 만화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윤정이 집에 온다 하여, 집도 깨끗이 청소하고 마지막으로 벌레 대학살을 위
해 벌레 학살용 연막탄을 한 방 터뜨리고 잠시 만화가게에 대피해 와서 읽고 있는 이
‘벨제붑의 노래’라는 만화가 나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물론 도박 만화로서의
흥미진진함과 내용의 재미있음도 한 몫 했지만, 방금 검색한 ‘벨제붑’이라는 존재가 내
게는 더 큰 인상을 남겼다.
‘우흐흐, 나도 벨제붑의 대왕일지도 몰라 … 크크큭 …’
인터넷에서 이런 저런 자료를 검색 해 가며, 혼자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나는 키득거렸
다.
‘파리라, 좀 징그럽기는 하지만 뭐 늘 나랑 살던 놈 아니야 ... 흐흐 ... 그럼 나도 벨
제붑이라는 놈과 동급이 되겠군...'
하여간 지저분하게도 별 쓸데 없는 생각의 나라로 한참 푹 빠져가던 나는 윤정에게 온 휴
대폰 전화를 받고 현실세계로 돌아 왔다.
"어, 1시간 후에 도착한다고 ... 알았어, 난 집 앞이야. 그럼 오면 전화해 "
무한한 상상의 나라로 빨려 들어가던 그 순간이 나는 너무 아쉬웠지만, 빨리 집에 가서
윤정이를 맞이하기 위하여 죽어 널브러진 벌레 동료들을 치우고, 냄새를 제거 해야겠다
는 일념으로 만화방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했다.
"얼마죠?"
"아 6000원 입니다. 웰치스 드셨죠."
예쁘장한 아르바이트가 빙그레 웃으며 잔돈 사천 원을 자연스럽게 거슬러 준다.
'헉'
순간 쳐다본 그녀의 눈동자가 너무나 괴이해 보였다. 푸른빛이 감도는 흰자에 가로로 찢
어져 보이는 진 녹색 빛이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마치 무슨 동물의 것처럼 느껴
졌던 것이다.
"아 참, 마일리지 카드 도장 받으세요. "
일순간 당황해서 멍해져 있던 내게 그녀가 사무적인 말투로 다시 말을 걸었다. 다시 쳐다
본 그녀의 눈은 평범한 인간의 그것이었다.
‘에이, 내가 헛것을 봤나 보다. 내가 이상한 상상을 너무 많이 했나? 하긴 이상한 만화
를 너무 많이 봤는지도 모르겠네 … ’
하지만, 깊게 고민하지 않는 나의 낙천적인 성격 탓에 금새 이런 저런 쓸데 없는 상상을
훌훌 털어버린 체 그녀가 건네준 마일리지 카드를 받아 들고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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