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로드가 늦어 죄송합니다.
추석 기념으로 2편 연속 버닝~.
============================ 고고 =================================
기억 - ..... 영화 보고 있었어?
한나 - 네, 잔뜩 기대했던 영화인데 별로 재미는 없네요.
화면 속에선 한쌍의 남녀가 손짓발짓을 해가며
어떤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과연 그녀 귀엔 들릴까 싶을 만큼 작은 볼륨 탓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땐 멜로영화인 것 같다.
기억 - 여기... 손수건.
일단 난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예전에 그녀에게
=뭐해요? 옆에서 여자가 울고 있는데...=
라고 핀잔을 들었던 날부터
혹시나 하고 가지고 다녔는데,
쓸 날이 오긴 하는 구나.
한나 - 웬일이에요? 이런 걸 다 주고?
기억 - 음.... 학습의 성과랄까....
한나 - 퍽이나 고맙네요.
어째 가시가 제대로 돋아있는 그녀의 말투.
예상을 크게 벗어난 그녀의 반응에 멍하니 서있는 사이,
그녀는 또다시 한 마디를 톡 쏘아 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나 - 그걸로 자기 얼굴이나 먼저 닦아요.
기억 - 응?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무심코 손을 올려 뺨 근처를 문질렀을 때
축축하게 묻어나오는 물기.
기억 - 어? 뭐야. 자면서 침 흘렸나?
얼마나 옴팡지게 흘렸는지
얼굴 전체에 코팅 된 듯한 침을 닦아내며,
난 내 자는 모습이 얼마나 추했을지 상상해 보았다.
과연.... 멜로 영화 보는 데
옆에서 이러고 잤으면 기분 상하기도 했겠다.
기억 - 저... 저기, 코는 안 골았지?
한나 - 골았어요! 잠꼬대도 엄청 크게 하고!
어느새 자기 방으로 돌아간 그녀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곤 문을 쾅 닫아버렸다.
기억 - 미안. 평소에는... 안 그러는데....
이미 들을 사람도 없어져 버린 변명의 말을
궁색하게 늘어놓던 난
결국 주변 정리나 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혹시 바닥에도 흘린 건 아닐까?
내가 거실 청소를 해놓고 뉴스까지 본 뒤에도
그녀는 방에서 나올 줄 몰랐다.
시간도 적당히 늦었고,
이젠 가야할 채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난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기억 - 한나야~. 나 이제 들어가려고 그러는데.
잠시 문 앞에서 기다려 봐도 아무 응답이 없는 그녀.
자는 걸까?
들고 왔던 토끼인형을 문 옆에 기대놓고 돌아서는 그때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한나 - 잠깐 들어와 봐요.
기억 - 응?
한나 - 잠깐.... 들어오라고요.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난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날 맞이한 건 하늘색과 연보라색으로 꾸며진
시원한 느낌의 가구들이었다.
화려하지만 결코 난잡해 보이진 않는 깔끔한 인테리어,
곳곳에 놓인 화분이며 액자들이
더욱 세련된 느낌을 더해 주었다.
기억 - ......
문제는, 나를 방 안으로 불러들인
당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난
방문을 놓고 방 안으로 두어 걸음을 더 들어갔다.
= 탕. 딸깍.=
그 때, 갑작스레 방문이 닫히면서
방안은 어둠에 사로잡혔다.
깜짝 놀란 난 서둘러 방문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이미 그 앞엔 희미한 사람 그림자가 날 막아서고 있었다.
한나 - 나가지 말아요.
기억 - .... 뭐하는 거야, 지금? 어서 불 켜.
한나 - 괜찮겠어요? 나 지금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데.
기억 - ....... 뭐?
너무나 태연한 목소리로
사람 기겁할만한 말을 해대는 그녀.
너무 놀라서 철렁할 타이밍도 놓쳐버린 심장이
뒤늦게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내게로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내 어깨를 뒤로 밀고 가는 그녀.
몇 발짝 물러서지 않아 침대에 다리가 걸린 난
그 위로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는 내 어깨를 재차 누르며
몸 위로 타고 오르는 그녀.
난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기억
- 자, 자, 잠깐. 지금 장난치는 거지?
아까 그거 농담이지?
한나 - ...... 못 믿겠으면 손으로 확인해 봐요.
기억
- 왜, 왜, 왜 이러는 거야?
저기, 한나야. 우리 일단 대화로....
한나 - 몰라서 물어요?
기억
- 그.... 저기 영화 보는 데 옆에서
코골고 침 흘린 건 정말 미안한데...
한나 - ....... 지금 농담이 나와요?
기억 - 응? 그거 아냐? 그럼 왜.....
정말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난
거기서 말을 줄였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잠시 동안 아무 움직임 없이
내 옷깃을 쥐어짜듯 붙잡고 있던 그녀가
별안간 빠른 손놀림으로 내 남방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한나
- 내가 잊게 해줄게요.
오빠가 못 잊으면 내가 잊게 해줄 테니까...!
기억 - 자자자자자잠깐! 뭘 잊어? 잠깐만, 잠깐만~!!
황급히 등포복 자세로 침대 위쪽으로 도망치던 난
이내 그 한계를 깨닫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기억 - 헉...... 헉..... 헉.... 켁...켁.
이제야 암순응을 일으킨 눈이 전해준
그녀의 실루엣이 너무나 적나라했기에
마른침을 삼키던 난 사레가 들려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머리로 피가 몰리면서 찾아온 몽롱한 어지러움.
힘들게 감정을 수습하고
단전호흡을 시도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가 물었다.
한나 - 정말 기억 안나요? 아까 무슨 꿈 꿨는지?
기억 - 꿈? ...... 글쎄, 기억 안 나는데.
분명 무슨 꿈인가 꾼 건 확실했지만
잠에서 막 깼을 때 상황이 너무 낯설어서인지
그 내용은 까맣게 지워진 후였다.
굳이 상황 탓을 하지 않더라도
요즘 부쩍 그런 일이 많아진 것 같긴 하지만...
내가 무슨 꿈을 꿨건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한나
- 민아가 보고 싶어요, 민아가,
공주님이 보고 싶어요....
잠자는 내내 엉엉 울면서 그렇게 소리를 질러놓고....
이젠 생각 안 난다고요?
기억 - ..... 뭐?
한나
- 민아야, 민아야, 민아야.....
잠자는 오빠 옆에 있으면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아.
왜 못 잊어요? 오빠가 떠났잖아요,
오빠가 떠났으면서 왜 못 잊어요!
기억 - 아... 아냐, 난... 분명....
난 분명 누나 꿈을 꾸고 있었다. 누나 꿈을 꾸다가.....
= 누나 얼굴이 생각나질 않아요....
누나가 있던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버렸어요.
그 사람 얼굴 밖에 떠오르질 않아요.
민아가... 보고 싶....
기억 - 헉.......?
어두컴컴한 심해에 침몰했던 꿈의 파편이 떠오른 순간,
난 폐가 쪼그라드는 느낌에 거친 숨을 들이마셨다.
누군가 마구잡이로 머릿속에 쑤셔 넣는 듯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들.
목 언저리에서 뺨을 타고 올라오는 그녀의 체온.
작고 귀엽던 그녀의 심장소리가 몸 안을 가득 채웠다.
기억 - 꺽.... 꺽...... 어헉.....
또다시 시작된 발작에 난 가슴을 쥐어뜯었다.
저릿하게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아픔,
가슴이 미어지게 차오르는 추억.....
= 흡...=
그때, 한나의 입술이 내 입을 막았다.
애타게 새로운 공기를 빨아들이려던 내 폐는
갑작스러운 저항에 막혀 움직임을 멈췄고,
폭발할 것 같던 머릿속은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이게.... 맞불작전이라는 걸까?
한나 - 잊어요.... 제발..... 잊어요. 오빠..... 제발... 잊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녀는 거듭 내게 입을 맞추며 그렇게 속삭였다.
그녀의 속삭임은 마치 망각의 주문처럼
내 가슴 속을 채우고 있던 민아의 모습을 지워나갔다.
동시에 그녀를 제지할만한 힘까지 잃어버린 난
약에 취한 듯 늘어진 몸을 그녀의 손에 맡겨버렸다.
= 툭.... 툭..... =
그녀가 다시 내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몇 개 남아있지 않던 단추는
이내 모든 결속을 풀고 앞섬을 펼쳐보였고
그녀는 조금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손톱 끝으로
내 몸 위를 훑어 내렸다.
아직 붉은 핏기가 남아있는 수술자국과 상처들은
올록볼록한 굴곡을 만들어 그녀의 손톱을 밀어냈고,
그런 자국들을 지날 때면 그녀의 손길은
더욱 느리고 섬세해졌다
한나 - ...... 아파요?
기억 - 아니.
한나 - .....여기는요?
기억 - 거기도.
그녀의 손가락이 튜브가 박혀있던 둥근 흉터를 더듬었다.
지금이라도 손가락에 힘을 주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움푹한 흉터가 남아있는 그곳.
하지만 다른 곳 보다 조금 민감한 감각을 전해올 뿐,
그것에 통증은 아니었다.
한나 - 아픈 곳 있어요?
아픈 곳..... 난 조금 신경을 곤두세워
내 몸에서 전해져 오는 감각들을 체크했다.
그리고 가슴 한 구석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지는 곳을 찾았다.
기억 - ....여기. 중간에서 조금 왼쪽, 조금 아래.
한나 - 여기요?
기억 - 아니, 그 속에, 좀 더 깊은 곳.
한나 - .... 이 안이요?
기억 - 응......... 마음이 아파.
그곳은 한나가 민아를 덜어낸 곳이었다.
뜨거운 입김으로, 촉촉한 입술로, 매혹적인 목소리로,
민아의 흔적을 밀어내버린 곳이었다.
너무나 말끔하게 비워진 그곳엔
시린 바람과 습한 안개만이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은
주홍빛 불씨만 남긴 채 애처롭게 꺼져가고 있었다.
기억 - 민아가 없는 그 자리가..... 너무 아파....
한나 - ..... 여기.... 나는 못 들어가요?
정말 그 속까지 손을 집어넣으려는 것처럼
꾸욱- 하고 힘을 줘서 내 가슴을 누르는 그녀.
여기서 조금만 힘을 빼도
그녀의 손은 푹하고 심장이 있는 곳까지 닿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기억 - 미안..... 네 자리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