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하나 하고 망설였지만 역시 아버지를 소개하기에 앞서 몇십년 전으로 거슬러 내려가야 순서일거 같습니다.
년년생으로 기계같이 3남매를 낳으신 저희 어머니가 계십니다.
22살의 나이셨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끈질긴 설득으로 당시 이화대학교 종교음악학과를 다니는것도 포기하시고 강원도 원성군 문막면에 위치한 이미 돌아가신 친할아버지 과수원에서 결혼식을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할아버지가 소유하신 과수원의 일부를 팔아 옥로 양조장이란 이름으로 강원도 원주 중앙시장 옆에 설립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림집을 양조장에서 시작하신 저희 어머니는 우리 3남매를 낳으시며 힘들게 시집살이를 하셨습니다.
그렇다가 서울 휘경동으로 옮기면서 저희 3남매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에 의해 1년여동안 키워졌습니다.
당시 저의 나이는 6살, 밑에 여동생은 5살, 막내 4살.
그렇는동안 아버지는 원주에서 옥로 양조장을 운영하시면서 2차례 부도를 겪으시며 제정난에 허덕이셨고 1차 부도를 외할아버지께서 막아 주셨답니다.
그리고 서울 휘경동 집으로는 가끔씩 우리한테 얼굴만 보여 주는 정도로 한달에 몇번만 내려 오신걸로 제기억에 남습니다.
어느날 유치원에서 돌아와보니 마당에 친할머니,외할머니,외할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쓰셨던 가구가 마당에 잔뜩 놓여져 있는걸 볼수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이혼을 해야겠다며 어머니가 쓰던 가구들은 당시 할머니께서 사시던 용두동으로 용달차를 통해 보내졌고 거기에 놀라신 외가집에서 저희 휘경동집으로 찾아 오신거였습니다.
어머니가 시간날때마다 손수 가위로 다듬으셨던 그 잔뒤밭에서 할아버지하고 아버지가 딩굴며 싸우던 모습은 아직도 이나이 먹도록 잊혀 지질 않습니다.
그렇게 외할아버지,할머니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신 아버지는 그대로 원주로 돌아가셨고 우리 3남매는 어머니하고 계속 살게 됐습니다.
이런일이 벌어진 몇달후 집에서는 어머니가 서류상 이혼이 되있는걸로 확인됐다면서 외가집에서 자초지종을 케물으니 어머니가 몇달전 저희 친삼촌을 통해 휘경동 중량천에서 도장을 건내준거 밖에는 없다고 하셨답니다.
당시 제나이 6살이였던 저는 아버지가 그도장으로 이혼서류를 만들었다는걸 나중에 외할아버지가 강원도 문막면 포진리 동사무소 호적계에서 근무하시는 분을 통해 확인하시고 알게 됐습니다.
사기이혼은 공소시효가 6개월이란 헛점을 이용해 이런저런 핑계로 서울에는 못들어간다고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옥로 양조장 2차 부도를 막아줬던 현재 같이 살고있는 계모와 재혼해서 교묘히 법망을 빠져 나간 후였습니다.
그렇게해서 저희 어머니는 저희 3남매를 키우시며 휘경동에서 남산밑에 아파트로 전전해가며 살게 됐고 결국 사기이혼이란 충격으로 정신병을 앓게 되셨답니다.
그후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는 비서가 집으로 찾아와 설득을 하고 아버지가 전화로 통화하기에 이르고 결국 제 밑에 두 동생들을 넘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찝차에 오르고 유리창으로 두 동생이 손을 흔들어대는걸 바라보신 어머니는 그들이 떠난후 하루종일 안방에서 울기만 하셨습니다.
그후 아버지의 계속되는 설득으로 몇달뒤 결국 저까지 아버지한테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렇게해서 동생들하고 만난곳이 원주 중앙동에 위치한 어느집이였고 거기서 우리는 초등학교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동생들은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아갔지만 저는 어머니 생각에,그리고 계모의 편애와 사기이혼의 내막을 잘알고 있는 이유로해서 아버지의 구박과 폭행에 견디지 못해 저는 서울에 계신 어머니한테로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7살 나이에 집을 나와 아무기차나 탔던걸 기억합니다.
저희 친삼촌이 경찰서에 있는 저를 찾아와 집으로 대려가시고 또 집을 나가면 찾아 오시기를 2년여 동안 계속 됐을까요?
결국 2년후 제가 살던 집은 원주에서 서울 여의도로 옮기게 됐고 2차 부도를 계모가 막아줬던 양조장은 서서히 정리하는 순서를 밟게 됩니다.
저는 3학년 서울 여의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어머니를 찾으려고 집을 나가게 되지만 번번히 경찰서에서 미아로 잡혀 앉아있다가 집으로 돌려 보내져 계모와 아버지한테서 폭행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어린나이에 서울 지리를 모르는 저는 그렇게 집을 나가 돌아다닌지 1년후,
모르는 어른들의 도움으로 공짜 버스와 음식을 얻어먹으면서 어머니가 안계시는 휘경동집을 거쳐 할머니가 사시는 용두동으로 찾아 들어가게 됐고 결국 할머니집을 찾게되서는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날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저는 어머니 옆에서 학교를 다닐수가 있었지만 계속 깊어만가는 어머니의 정신병으로 인해 병원치료가 필요했기에 한학교만 계속 다닐수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마지막으로 생활기록부를 통해서 7번이란 전학횟수를 확인할수가 있었네요.
그렇게 저는 고등학교 다닐 나이가 될때까지 어머니한테서 키워졌고 동생들은 아버지한테서 줄곧 키워졌습니다.
어느날 미국 갈기회가 생겼다면서 미국사는 계모언니 초청으로 식구 모두가 미국을 간다고 하길래 절더러 같이 가자고 하더군요.
어머니의 허락으로 미국으로 오긴했지만 온후부터는 태도가 달라지며 계모와 같이 살라는 얘기듣고 전 시카고를 거쳐 엘에이로 옮기게 됐습니다.
친할머니와 큰집에서 하시던 말씀들을 제가 재확인해서 였을까요?
저희 아버지 사기이혼의 자초지종이 큰아버지 댁으로부터 다시 흘러나오고 친할머니께서 직접 밝혀 주시면서부터 과거사가 들통나자 아버지의 장남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바뀌였다는걸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돈을 못대주겠다는 아버지의 대답에 공부를 그만두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수밖에 없었읍니다.
그렇면서 10년동안 한국은 2년에 한번씩 어머니를 만나러 들어가곤 했지만 용인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해 계신걸 확인하면서 제마음은 복잡했고 속이 타들어 가는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아버지한테 까지 초청하는데 필요한 재정보증을 서달라고 5번정도 손을 벌려봤지만 번번히 어머니를 미국으로 초청하는것은 거절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저의 미국 생활은 10년이 넘어가고 엘에이를 거쳐 씨애틀로 옮기면서 한국에서는 외할머니도 나이가 많아지시면서 친딸인 저희 어머니에 대한 걱정을 하신 나머지 어머니 앞으로 조그만 빌라아파트와 광명시땅을 마련해 주신거였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고마움을 고모들께 전하기에 이르렀고 어머니의 재산을 고모들로부터 확인하신 아버지는 제 바로밑에 미국 시민권자인 여동생을 시켜 어머니를 초청해 몇달후 미국으로 불러들이게 됩니다.
조건은 한국에서 가지고 오는 어머니 돈은 꼭 어머니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놔야 할것이며 아버지말을 어길경우엔 저와 상종도 안한다는 거였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재산인데 남이된 아버지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건 무리다 싶었고 저한테 이제껏 학비나 생활비 한푼 보태주지 않았던 아버지였는데도 불구하고 저희 외할머니의 의사를 안따르고 아버지의 협박을 들어준것이 제 실수였습니다.
어머니가 미국에 오시면 저하고 같이살수 있도록 집한체 사주겠노라고 장담하셨던 분이 제가 일나가고 없는 사이 동부 뉴욕에 살고 계신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하루에도 6-7차례 전화로 뉴욕으로 와서 살면서 보고싶은 막내도 봐야하질 않겠느냐고 정신병이 있으신 어머니를 몇주동안 설득시켜서 결국 저랑살던 집을 나가 은행에 있는 돈을 찾아서는 어머니가 다니셨던 교회 목사님을 아버지가 전화 통화로 설득시키고 그 목사님 도움으로 뉴욕행 비행기표를 사서 떠나게 됩니다.
물론 아버지의 타고난 뛰여난 화술로 그목사님이 넘어가셨지만 말입니다.
그 소설같은 화술 덕분에 저희 외할머니는 갑자기 계모할머니가 되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5년동안 목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던 막내를 보자고 떠난 어머니를 뉴욕에서 아버지와 여동생은 높은 이자가 나오는 은행에 넣어 준다는 명목으로 씨애틀에서 가지고간 7만 2천달러의 어머니 재산부터 챙기고 여동생의 방안에 가두고는 1주일만에 제 여동생은 아버지의 계획대로 편도 비행기표를 사서는 한국으로 내던져 지게 됩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고 지금 뉴욕에 계신단 얘길 듣고는 한국에서 외삼촌 외할머니가 제가 살고있는 씨애틀로 오시게 됐고 어머니는 잘 계신다고 아버지가 안심을 시켜놓고 두분모두 한국으로 돌려 보내시고는 바로 어머니를 바람 많이부는 추운 늦은가을에 슬리퍼만 신겨놓고는 편도비행기표에 여권만 달랑 들려 내던져졌습니다.
한국으로 던져진 어머니는 막내가 보고싶다고 다시 뉴욕으로 가겠다고 조르셨고 한국에서는 비행기표 마련해서 뉴욕동생한테 전화해서 알리고는 보내드렸더니 뉴욕에서는 여동생이나 아버지는 나와보지도 않고 공항경찰에 의해 연락이 되서는 여동생에 끌려 몇시간뒤 바로 엘에이 고모집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몇일후 정신병 있는 어머니를 고모부가 옆구리를 걷어차서는 고모 다니는 교회분 도움으로 다시 제가 사는 씨애틀로 올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제앞에서 우시면서 그동안의 일들을 정리하시는데 먼저 끄내시는 말씀이 막내아들 목소리도 들려주질 않았다고 하시더군요.
어머니로부터 돈받을때만해도 "니엄마 정신은 멀쩡하므로 뉴욕생활이 가능하다" 고 하시던 아버지가 뉴욕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뉴욕으로 엘에이로 결국 다시 제가 사는 씨애틀로 돌아와서 어머니가 들려준 내용들을 아버지께 전하니 그때 절더러 "니엄마 정신병이 도졌나보다 정신병원에 데리고 가봐라 미친년!" 이렇고는 전화를 끊습니다.
그리고 그후로 정신병이 악화되서는 병원약도 안듣고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흐르며 지켜왔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미국생활을 해야 했기에 혼자서 해결하느라 힘든적이 많았던거 사실입니다.
그후 10년이 가까워 오지만 어머니한테 전화 한통화 없다는건 어머니 재산이 더이상 없으니 별볼일 없다는걸로 해석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머니한테 하루에도 6-7통화씩 해서는 막내아들을 보여주겠다던 아버지였는데 말입니다.
막내아들과는 25년이란 공백기를 가졌던 어머니로써는 막내를 바라보는 애끓는 모정을 느끼게하고 절박한 선택과 심정을 이끌어내 아버지는 소귀의 목적을 달성하고 성취하려는 부분에서는 이제까지 제가 아버지로부터 받아본 이메일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돈을 가로채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다는걸 알수가 있고 사기꾼이란 말이 절로 나오게 합니다.
이제껏 주변 친구들이나 식구들한테 까지도 약속만 남발하고는 행동으로 지켜지는것이 하나도 없었던 성격인지라 결국엔 평생동안 배신만 당하고 사기나 당하고 재산환수를 위해 3번의 재판을 시도했지만 결국 모든 재판에서 패소하기에 이르렀고 한국에서 완전히 거지꼴로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알라스카에서부터 노인들에게 주는 정부 돈이나 타
먹으면서 지금은 엘에이에서 계모와 같이 살고 계시는 저희 아버지 허철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니 엄마가 한국에서 가지고 온 돈 다시말해 고모가 송금해준 7만 2천불은 25년전 내가 이혼하면서 위자료로 준 휘경동집이 그동안 이자가 붙어서 불어난 엄연한 내돈이다" 라고 분명하고 딱부러지게 말씀하십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결국 어머니에 대한 사기이혼이 나중엔 큰돈을 사기치는 큰손으로 키워질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에서 가지고 온 돈이 3만 5천달러 밖엔 안된다고 뉴욕사는 여동생하고 통화를 해가며 연극까지 합니다.
어머니가 씨애틀로 돌아와서는 언론에 고발한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3만 5천달러만 돌려주면서 나머지는 어머니 비행기 경비와 뉴욕 생활비로 쓰였다고 하면서 3만 7천달러를 챙기시더군요.
전에 제가 엘에이에서 살았을때 아버지가 한국에서 도망오셔서는 제 아파트에서 몇달 머문적이 있었고 그때 계돈을 타려는 여자한테 접근해서는 고이자를 받게 해준다고 4만달러를 챙겨가서는 원금만 3년만에 간신히 갚았던걸 그여자분을 통해 알수가 있었습니다.
내용인즉, 대체로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인물좋고 공부를 많이하고 아는게 많고 화술이 뛰어나서 그럴까요?
혼자 사는 여자가 돈이 있다는걸 확인하면 어떻게든 돈냄새 맡고 접근해서는 여자를 위로하며 세상에 대해 충고를 해주면서 낯설음과 경계심을 풀게 합니다.
그리고 고이자란 단골메뉴로 여자를 현혹하며 돈을 챙겨가는 순서를 밟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물론이고 엘에이,알라스카에서도 교회란곳을 다니면서 혼자사는 여자들에게 접근해서는 계모와 이혼할것이란 청사진을 내놓으며 과감히 시도하려다 제가 아버지의 더러운 과거사를 낫낫히 공개하면서 사기행각은 더이상 못벌이고 엘에이로 도망을 가 살게 된것입니다.
알라스카 노인분들은 지금도 허철이란 이름은 더이상 듣기도 싫다고 하십니다.
그후 제 학교 성적표를 들고 다니면서 저를 헐뜯고 다니시며 교회 목사님과 노인분들 한테도 편지를 보내 망신을 주려고 지금도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하고 있답니다.
이젠 엘에이 가셔서도 70이란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기행각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 보입니다.
10년전 동생이신 고모한테서도 돈을 빌려 아직 갚질않아 고모부로부터 돈을 갚으라는 독촉편지가 오가는 상황이랍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 허철씨의 사기행각은 여기서 끝나질 않았다는걸 친가와 친척들을 통해 뒤늦게 확인할수가 있었습니다.
강원도 원주 시장옆에 옥로 양조장이란 건물을 허물고 거액의 은행돈을 끌어들여 그장소에 세운 원주 관광호텔이 바로 저희 아버지 허철씨가 세운 것입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호텔운영 때문에 한국을 오고가고 했던 아버지가 많은 부채를 감당할수가 없게되자 미국으로 도망와 살게 되셨고 그당시 김이수씨 라고 조선호텔에서 일하셨던 분이 원주관광호텔로 옮기시면서 운영을 맡으셨고 보증까지 서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증을 김이수씨가 서고난 이후 한국에 있는 호텔과 관련된 재산을 전부 미국으로 빼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이수씨는 신용불량자란 누명까지 쓰게 되셨고 그 사건으로 인해 화병으로 돌아 가셨다고 합니다.
그때 한국에서 빼돌린 재산으로 뉴욕 버팔로 근처 호수옆에 큰집을 사서 호화 생활을 하는건 제가 사진으로 직접 확인까지 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직업도 없으면서 1백만 달러가 넘는 집을 사서 생활하는 베일에 싸인 가정이라면서 그때 같은 교회를 다니시면서 구역예배를 하셨던분이 씨애틀에서 생활상담소를 하시기에 제가 자세히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더러운 과거사를 들춰내면 떳떳하다는 분이 김이수씨와 어머니 돈에 대한 내용은 전혀 언급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어머니는 사기이혼에 돈까지 사기당하고 자식으로부터 버림받고 남편으로부터 한국으로 내던져 졌다는 충격으로 정신병이 더욱 악화가 된 나머지 제가 지켜 드리질 못하고 지금은 씨애틀 조그만 개인 양로원에서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제가 4년전 폐결핵으로 인해 몇달을 앓으면서 결국 정신병이 악화되 있는 어머니를 지키질 못했단 죄의식으로 저는 지금도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4년여동안 폐문제로 고생하다가 얼마전 주정부의 도움을 받아 2번의 폐수술을 끝내고 현재 정상인으로 활동이 가능해졌습니다.
하늘의 도움이라 생각하며 폐가 무너져 죽음의 위기를 2번이나 극복한 저는 이제껏 어머니가 치룬 희생을 제가 수면위로 올려놓고 알릴때가 됐다 생각하기에 여러분께 글로 남기는 것입니다.
아버지 허철씨의 부탁 한마디로 제 여동생의 조그만 협조만 있으면 법적으로 다시 저한테로 돌아올수가 있는대도 그분의 과거사를 은폐시키려고 애꿎은 저의 외할머니를 계모로 둔갑시켜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며 25년동안 자식들에게 세뇌시켜왔고 또 아버지의 행동을 정당화 합리화 시키려고 오히려 외가집과 저한테 범죄자 운운하면서 절대 못
도와 주겠단 이메일만 받아볼 뿐입니다.
양로원에서 어머니의 남은 여생을 보내게 하란 아버지의 이메일을 받아보고는 더이상 말이 필요 없단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 아버지의 과거사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한국에서 거지꼴로 도망갔던 알라스카에서도 한국에 과수원땅이 많다고 사기치다 결국 여자가 한국까지 나가서 확인한 결과 땅한평은 고사하고 1000원짜리 은행구좌도 한국 자산 관리공사가 무서워서 만들지 못하는 도망다니는 알거지란걸 알고는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타주로 이사했던 여자가 있었고
그후로 과거가 탄로나고는 주변에서 왕따를 당하시고 엘에이로 도망을 가셨고 이젠 악만 남아 있는 분이라 더이상 어머니에 관해서는 부탁을 안하려고 합니다.
이글을 읽으시고 2류 3류 소설쓴다고 또 빈정거리면서 남들이 다 알고있는 사실을 이분은 평생을 그랬듯이 금세 들통날 새빨간 거짓말도 혼자서만 태연하게 아니라 부정하고 덮으려 하시는 이런 아버지는 어느 누구 하나도 이분 편에 서 계실분은 없습니다.
재판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이글을 보시면 재판한다고 설치실 것이지만 언론사에서 이미 준비중이라 재판으로 인해 공개가 되면 오히려 피해자 가족들한테는 이득이 많을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허철씨의 더러운 과거사는 많은분들께 알리고 더이상 이런 피해자들이 안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써봅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타인의 명의로 돌려놓은 원주 과수원땅을 처분하고자 노력중이란것을 잘알고 있고 김이수씨 가족분들이나 친척분들에게는 자세한 아버지의 정보를 드릴까 합니다.
그래서 피해자이신 김이수씨의 가족들과 연락이 될수있는 방법을 찾고자 힘들게 이런 글을 올려봤습니다.
후에라도 이글을 읽으시는 김이수씨 가족이나 그의 친척분들께서는 꼭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김이수씨와 절친하셨던 친구분들은 찾았지만 그분 식구 또는 친척분들을 찾질 못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제 아버지 허철씨의 자세한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경제사범이라 할수있는 이런분들이 엘에이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만은 이렇게 사람까지 죽여 가면서까지 미국와서 호화호식 하는 이런부류의 지능적인 범죄자는 꼭 우리사회에서 처단을 해야 할것 같습니다.
허철씨를 주변에서 알고 계시는 분들이나 관심있으신 분들은 저한테 이메일로 연락 주십시요.
그동안 아버지와 주고 받았던 이메일 내용을 전부 공개하고 제 아버지가 어떤 부류인가를 확인받고 싶습니다.
꼭 연락 주십시요..
-----제 E-MAIL 주소를 남깁니다. hhaannaa98@hanmail.net
-----제 핸드폰 전화번호는 (907) 744 - 6263
풍성하고 즐거운 추석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