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희는 다음날 그 동안 못잔 잠까지 다 자고 일어난다는 듯 정오가 거의 다 되어서야 일어
났다. 역시나 그 시간에는 집안에 아무도 없었다. 승희는 대충 상을 차려 배를 채우고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 있는 거울에 비춰진 그녀의 얼굴은 긴 잠으로 인해 그 동안
에 피로가 풀렸는지 까칠했던 피부가 조금은 뽀얗게 변해 있는 것 같았다. 승희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흠... 역시나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이 맞아. 음.. 좋아, 좋아."
승희는 자신의 볼을 두 번 연달아 살짝 두들겨 보고는 씻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
가 있던 승희는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준비를 했다. 풀린 피로 때문인지 상쾌하니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를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뭐달라고 뭐 혼날라고 혼 힘내자고 힘 어쩌라고 어... 앗싸..."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로션 바른 손을 얼굴에 두들기고 있는 승희였다. 왠지 동생의 공연이
라고 생각하니 더 신경을 쓰고 싶었다. 그래도 명색이 누나인데 조금은 잘난 동생에 잘난
누나로 보이고 싶었다. 꼼꼼하게 기초화장부터 시작한 승희는 직업이 코디답게 능숙한 솜
씨로 완벽에 가까운 메이크업으로 끝을 냈다.
"음... 완벽 그 자체군... 나도 이렇게 꾸미면 괜찮은 여자라고 왜 이러셔..."
만족스럽다는 듯 거울에 요리조리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던 승희였다. 그러다 게슴츠레한 눈
빛으로 바뀌는 승희.
"음하하하 속지 말자 화장 발. 속지 말자 조명 발. 음하하하..."
앞으로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고 있는 승희는 그렇게 혼자서 웃고 떠들면서 준비
를 했다.
약속시간을 10분 정도 남겨두고 집에서 나온 승희는 동석을 만나기로 한 장소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혼자서 신나게 웃고 떠들면서 준비를 했던 승희였지만 막상 동석을 만나로 가는 길에
는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어색해 하며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에휴... 이 좋은 주말에... 이렇게 꽃단장을 하고... 이럴 때 남자친구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래도 둘보다야 셋이면 더 나을 거 아니냐고.... 여태 남자친구 하나 안 만들어놓고
뭐했을까... 휴... 그나저나 승우 자식도 문제네 동석이 오빠하고 같이 간걸 보고 또 뭐라고
할지... 에휴...'
승희는 그렇게 쉴 새 없이 한숨을 쉬며 만나기로 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땅만을 보
며 걸어가고 있는 승희의 귀에 어디에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그대가 보이네요. 오늘도 같은 시간이죠. 언제나 조금 젖은 머리로 날 스쳐가죠...>
승희는 노래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류장 앞에 있는 화장품 가게에서 나오고 있
는 노래였다. 승희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며 음악을 들었다.
<참 망설였었지만 오늘은 얘기할래요... 좋아한다고... 조금 서투르고 어색하지만 천천히 알
아가요... 정말 서두르진 않을 거예요. 한 걸음 한 걸음씩 그대가 나를 느끼게 사랑을 시작할
까요...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승희는 천천히 화장품 가게 앞으로 갔다. 그리고 쇼윈도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화장 때문인지 조금은 낯선 그녀의 모습이긴 했어도 못나 보이지는 않았다.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왠지 동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모습에 나와... 동민씨가 함께 서 있다면... 잘 어울릴까... 에휴... 아서라... 그 곰탱이
는 나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내게도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 나
타나겠지. 힘내자 힘! 그래 동석이 오빠면 어떠냐? 편하게 생각하며 즐겁게 이 황금 같은
주말을 보내면 되지. 아자!'
승희는 우울해 지려는 기분을 애써 그렇게 위로하며 힘차게 동석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걸
음을 옮겼다. 사거리로 가까워지자 동석의 차가 보였다. 승희는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는
차로 가까이 갔다.
"동석 오빠!"
'어라... 누가 또 있네..'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동석이 승희를 돌아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 그래. 타."
'음... 왜 저러지?! 무슨 일 있나?!... 흐흐 아마 미안해서 일거야.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친
구를 데리고 왔으니... 그래 동석이 오빠도 둘이 다니기에는 어색할거라는 생각을 했던 거야.
훗.. 이럴 땐 눈치가 빠르네.'
승희는 보조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한번 힐끗거리곤 뒷좌석에 탔다. 동석은 바로 차를 출발
시키지 않고 잠시 서 있다가 출발시켰다. 차 안에 있는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승희는 조심
스럽게 앞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캡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그런데 승희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 사람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승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살짝 숙여보였다. 그 사람은 잠시 그렇게 승희를 보다가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참..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고개를 숙여 보였으면 자신도 어느 정도는 고개를 숙여야 할
것 아니야?! 참.. 하는 것을 보니 진짜 누구랑 똑같... 오 마이 갓!'
누구와 닮았다고 생각을 하던 승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동민이었다.
'세상에... 저 인간 미쳤어. 거기가 어디라고... 아니 저렇게 변장을 하면 누가 못 알아볼까봐
서?!...'
승희는 놀란 표정으로 동민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동민의 얼굴
에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굵은 뿔테 안경이 그의 얼굴에 반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풋..."
승희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동민의 입가에 붙어 있는 커다란 점 때문이었다.
"거봐 인마. 승희도 알아보잖아."
동석이었다.
"처음에는 못 알아봤어."
무뚝뚝하게 내 뱉는 동민.
"승희야. 솔직히 말 좀 해봐. 알아보겠냐. 못 알아보겠냐?"
내키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심드렁하게 물어오는 동석. 승희는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넘기
며 말했다.
"흣. 글쎄요. 저도 처음에는 못 알아봤으니깐... 흠.. 점이 없다면 모를까.. 점 때문에라도 잘
못 알아볼 것 같기도 하고요..."
승희는 웃음 섞인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점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훗 마당쇠에게나 붙어있어야 할 저런 점이 붙어 있는 저 얼굴을 보고 과연 어느 누가 스타
차 동민이라고 상상이나 하겠어?! 풋 그나저나 진짜 웃긴다.'
승희는 웃음 때문에 입까지 막고 있었다. 그때 동석이 말을 꺼냈다.
"야 그나저나 그 점은 어디서 났냐?"
동석도 웃긴지 미소를 머금은 채 동민에게 물었다.
"전에 필요할 것 같아서 챙겨 뒀던 거야."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묻어 있지 않은 동민의 대답이었다.
"잘났다. 인마... 에휴 모르겠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리한테 뭐라고나 하지 마라.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깐. 그 점이나 신경 써서 잘 챙겨 그 점이 떨어져서 없어지면 너라는 것
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니깐... 휴..."
동석은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길게 쉬고는 입을 닫았다. 동민의 모습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못하며 웃고만 있던 승희는 동석의 말을 듣고서야 얼굴에 웃음
이 가셨다.
'휴.. 진짜 아무 일도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 다른 사람의 공연도 아니고 승우 녀석의 공연
인데... 저 곰탱이 때문에 망치게 되면... 아니야.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저 뿔테 안경에 정말
끔찍하다 싶은 저 점이 있는데 그리고 모자까지... 그래 공연만 보고 빨리 빠져나오면 괜찮
을 거야. 흣..'
그런 생각으로 다시금 승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승우의 대한 걱정이나 우스꽝스런 동
민의 모습보단 생각지도 못했던 동민과 함께 라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는 승희였
다.
동민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창밖만을 내다보고 있었다. 동석과 승희 둘 다 모르고 있었다.
동민이 지금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동민은 처음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백미러로 승희의
모습을 보았다.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는 그녀가 과연 승희가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 하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승희가 맞았다. 화사하게
화장까지 꼼꼼하게 한 그녀의 얼굴. 옷매무새도 다른 보통 날과는 확실히 달랐다. 꽤나 신
경 썼다는 것이 한눈에 보아도 알 수가 있었다. 남자라면 한번 정도는 다시 쳐다 볼 정도
로... 가까워지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더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속에서부터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보는 그녀의 모습은 한 듯 안한 듯한 화장에 청바지나 면바지에 니트
쪼가리나 걸치고 다니던 그녀였는데... 동민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훗 꽤나 신경 쓰신 모양이군... 그 자식에게 그렇게도 잘 보이고 싶나부지?! 그 자식이 대관
절 뭐 길래... 젠장 할...'
동민은 한쪽 입술을 자근거리며 앞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백미러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
을 억누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