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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복 편 지 15

수호천사 |2006.10.18 21:18
조회 473 |추천 0

 

 

 

 

 

 

 

 

『나무고아원 1』 - 최문자(1943~ ) - 지금쯤 노을 아래 있겠다. 그 버려진 아이들 절뚝거리는 은행나무 포클레인에 하반신 찍힌 느티나무 왼팔 잘린 버즘나무 길바닥에서 주워다 기른 신갈나무, 팥배나무, 홍단풍 지금쯤 찬눈 맞으며 들어올린 팔뚝 내리지도 못하고 검단산 바라보고 섰겠다. '나무고아원 1' 부분

 

 

 

시인의 눈은 모성의 눈인가? 자비롭도다. 버려진 어린 나무조차도 고아처럼 보였다니-.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아직 생명이 아니라고는 돌멩이 모래 알갱이조차도 어느 훗날에는 생명 중의 참생명이라고, 현대 과학은 제 몽매를 사죄하리니-, 이 시가 아파하는 바로 그 사랑겨운 가슴이 혹한의 겨울을 살아내는 힘이라, 초과학(超科學)이여, 신의 마음이여. - 유안진<시인> -

 

 

 

 

 

 

 

『토마토』 - 이지엽(1959~ ) - 아무래도 그녀는 삼각형의 피를 가지고 있어 모서리의 불안함, 훅 불면 그대 가슴 어딘가에 꽂혀 독침으로 파르르 떨릴 치사량의 고독 직각에서는 그 외로움이 사무치게 배어 나오지 어린 생명 앞에서는 주먹을 꼭 쥐는 모성(母性) 핏물 배어도 펴지 않는 오기도 있어 그러나 빗면에서는 늘 햇살이 쏟아져 내리지 낮달의 꽃잎 같은 잠, 팽그르르 휘어져서는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부드러운 회전낙하 이십대 후반의 잘 익은 입술과 이마를 간혹 찡그리기도 하는 팽팽한 질투도 조금 섞인. '토마토' 부분

 

 

 

그녀는 토마토란다. 삼각형의 붉은 피톨을 가졌다는 이 기발한 발상은 어떻게 왔을까? 고독을 치사량만큼 아파해 봐야 알아지리마는, 쉬워야지. 치사량의 고독을 이겨내고 나서야 모성이 되는 그녀들도, 20대 후반에는 잘 익은 입술과 이마 찌푸리는 팽팽한 질투쯤도 약과였으리마는, 나 어떡하면 다시 토마토일 수 있으랴-. - 유안진<시인> -

 

 

 

 

 

 

 

『돈황시편 1-명사산』 - 이가림(1943~ ) - 백동(白銅)빛 해가 모래마루를 굴러다니던 그 여름 저녁답 빈 풍적(風笛)소리로 흐느끼던 명사산(鳴砂山) 마야부인의 젖무덤 같은 등성이에 올라 그대가 모래썰매의 앞날개가 되고 내가 뒷날개가 되어 호숩게 호숩게 노 저어 내려갈 때 나는 보았네. 사람들이 언뜻 보았다고 믿었던 번갯불의 영원을 그 눈부신 현존의 한가운데 짜르르 가로질러 지나가던 캄캄한 섬광을. '돈황시편 1-명사산' 전문

 

 

 

아시아 시인대회였지요. 그 핑계로 시안(西安) 둔황(敦煌)을 구경했지요. 모래가 운다는 명사산을 낙타 타고 가서 모래산을 올라갔지요. 모래가 되어, 모래언덕이 되어, 모래산이 되려고, 한사코 한사코들 기어올랐지요. 미끄러지며 엎어지며 자빠지며 뒹굴러 내려와보니, 이 시인은 모 여시인과 호숩게 호수워하였지요. 서언합니다. 눈부신 현존에서 번갯불의 영원을 체험하셨더이까? - 유안진<시인> -

 

 

 

 

 

 

 

『눈덮힌 마을』 - 자하 신위(1769~1845) - 나이 들어 시를 쓰매 좀스러운 일은 다 버렸어라. 잠이 적어지니 지난 일들 꿈꾸기 어려운데 겨우내 맨밥을 먹고 소금기마저 지웠어라. 대나무를 꺾지 않으려 바람은 섬돌을 울리고 책을 읽으라 흰눈은 처마를 비추네. 흰눈 속에 아늑히 묻힌 집들 그리고 싶어 정자 위에 올라 오래 오래 바라보네. '눈 덮인 마을' 전문

 

 

 

일지암의 여연스님과 밤새 설아차를 마시다. 창밖에는 펑펑 흰눈이 쌓이는데 등불인 듯 손을 모아 한 모금 깊게 차를 마시니 춥고 쓰리고 막막한 세상의 기운들이 문득 눈덮인 산골마을처럼 아늑하기만 하다. 옛 선비여, 겨우내 맨밥을 먹고 시를 쓰매 좀스러운 일은 다 떨굴 수 있는가. 원컨대 새해에는 우리 마음 안의 욕심들 다 비우고 청청한 눈빛으로 하늘의 별밭을 우러르며 살 수 있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미워하는 사람들이 함께 손을 잡고 서로의 가슴 안에 눈부신 설원의 시 한 편씩을 새길 수 있기를…. - 유안진<시인> -

 

 

 

 

 

 

 

『노인의 즐거움』 - 다산 정약용 (1762~1836) -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운 일은 붓가는 대로 마음껏 써버리는 일. 어려운 운자(韻字) 신경 안 쓰고 고치고 다듬느라 애먹지 않네. 흥이 나면 곧장 뜻을 사루고 뜻이 되면 당장 글로 옮긴다. 나는 본디 조선 사람 기꺼이 조선시 즐겨 쓰리. 그대들은 그대들 법 따르면 되지 이러쿵 저러쿵 말 많은 자 누구인가? '노인의 즐거움' 부분

 

 

 

세계를 움직이는 지혜의 이름, 그것은 다름아닌 즐거움이다. 즐거움이 있는 다음에 노래가 있고 노래가 있는 다음에 열정이 있고 열정이 있는 다음에 진보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정으로 마음을 다해 자신의 것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어찌 다산 노인의 즐거움뿐이겠는가. 청년도, 어린 아이도, 시정의 장삼이사도 다 그 즐거움을 한껏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가 열렬히 기다려온 꿈의 시간들도 다가올 것이다. - 곽재구<시인> - 약력 ^1955년 광주 출생^81년 '사평역에서'로 중앙일보 신춘문예 통해 등단 ^시집 『사평역에서』 『참 맑은 물살』 『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 출간^현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

 

 

 

 

 

 

 

『함남도안』 - 백석(1912~95) - 고원선 종점인 이 작은 정거장엔 그렇게도 우쭐대며 달가부시며 뛰어오던 뽕뽕차가 가이없이 쓸쓸하니도 우두머니 서 있다 햇볕이 초롱불같이 희맑은데 해정한 모랫부리 플랫폼에선 모두들 쩔쩔 끓는 귀리차를 마신다 칠성고기라는 고기의 쩜벙쩜벙 뛰노는 소리가 쨋쨋하니 들려오는 호수까지는 들불이 한불 새까마니 익어가는 망연한 벌판을 지나가야 한다. '함남 도안' 전문

 

 

 

귀리차는 나의 꿈이다. 밥을 먹을 때나 음악을 들을 때, 버스를 타거나 먼 산을 볼 때 고원선 종점의 도안역을 생각한다. 그곳 플랫폼에서 귀리차를 마시던 사람들의 고뇌와 빈궁을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 시인은 그들이 마시는 귀리차 앞에 쩔쩔 끓는,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라가 하나가 되면 제일 먼저 함남 도안까지 가는 기차표를 끊을 것이다. 그곳 플랫폼에 서서 쩔쩔 끓는 귀리차의 맛을 보고 싶은 것이다. - 곽재구<시인> -

 

 

 

 

 

 

 

『하나씩의 별』 - 이용악 (1914 ~1971) - 무엇을 실었느냐! 검은 문들은 탄탄히 잠겨졌다.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우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자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과 북어 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간다. (중략) 총을 안고 볼가의 노래를 부르던 슬라브의 늙은 병정은 잠이 들었나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우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하나씩의 별' 부분

 

 

 

궁핍한 시절을 견뎌내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벗의 이름은 '꿈'일 것이다. 꿈의 아름다움은 그 꿈이 관통하는 시점의 핍진함과 비례된다.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드러누워 바라보는 하나씩의 별…. 서러운 그 별들 때문에 며칠씩 잠 못 들었던 지난날이 있었다. - 곽재구<시인> -

 

 

 

 

 

 

 

『그리운 날』 - 최하림(1939~ ) - 포플러 나무들이 거꾸로 서 있는 강으로 가, 저문 햇빛 받으며 우리 강 볼까, 강 보며 웃을까? 이렇게 연민들이 사무치게 번쩍이는 날은. '그리운 날' 전문

 

 

 

은적암 노 공양주보살의 청국장 맛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창호지 문 밖에는 펑펑 동백꽃, 하늘 아래 땅 위의 모든 시간들 속으로 펑펑 동백꽃…. 문득 수저를 들어 한입 청국장에 혀를 적시면, 아득히 썩는 생의 길목에도 동백꽃은 피어 절정인데, 이마가 파란 새 한 마리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다. 봄에 새 잎이 돋을 때 포플러 나무 어린 순에서 나는 냄새가 있다. 새로운 생이 비롯되는 순간의 환희. 겨울을 온전히 견딘 강물 냄새와 그 냄새가 만나 강물 속에 거꾸로 서 있을 때가 있다. 은적암 노 공양주보살의 청국장 속에 거꾸로 서 있는 겨울 포플러 나무들이 보인다. 뿌리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얼음강 위를 묵묵히 걸어가는 이의 눈빛이여. 뼈와 속살을 다 썩힌 뒤에야 온전히 찾아오는 생의 그리움이 있다. - 곽재구<시인> -

 

 

 

 

 

 

 

『좋은 언어』 - 신동엽(1930~69) -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중략 ) 하잘 것 없는 일로 지난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하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좋은 언어' 부분

 

 

 

절집 기둥에 걸린 묵언 패찰을 낮달이 바라보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물끄러미 지켜볼 뿐 아무 말이 없다. 시의 도량에 입문하던 시절, 한 달이나 두 달을 묵언으로 지낸 적이 있다. 떠도는 이미지들이 마음 안의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판잣집을 짓고 등 하나씩을 밝히는 사유의 시간들. 그 시간들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면 눈에 익은 길귀신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꽃을 내미는 놈, 염소 울음소리를 내는 놈, 만두가게 앞을 서성이는 놈, 소주 냄새를 풍기며 악을 쓰는 놈, 바흐를 듣는 놈, 사철가를 부르는 놈….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생이 한없이 따뜻해져서 희미하게 웃던 날들이 있었다. - 곽재구<시인> -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 김선우(1970~ ) - 이 집 한 채는 쥐들의 밥그릇. 바퀴벌레들의 밥그릇. 이 방을 관 삼아 누운 오래 전 죽은 자의 밥그릇. 추억의, 욕창을 앓는 세월의 밥그릇. 맵고 짠 눈물 찐득찐득 흘려대던 병든 복숭아나무의 밥그릇. 멍든 구름의 밥그릇. 상처들의, 이 집 한 그릇. 밥그릇 텅텅 비면 배고플까봐. 그대와 나 밥그릇 속에 눕네 그대에게서 아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눈물 많은 밥냄새 나네.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전문

 

 

 

날더러 내 시를 설명하라고? 그것은 안 돼.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일이야….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파블로 네루다가 이제 시공부를 시작하는 한 집배원에게 한 말이다. 자신의 시를 설명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일이라면 타인의 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몽매한 일인지…. 어린 시절 작은 종이배를 접어 물위에 띄우고 강을 따라 달려내려간 기억이 혹 있으신지? 그 종이배들은 흘러 어디로 갔을까, 문득 생각해 본 적 있으신지? 종이배를 강물 위에 띄운 기억 같은 건 없으시다고? 오오, 그래서 시를 설명하는 일은 더더욱 난해한 일이 되고…. - 곽재구<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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