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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복 편 지 17

수호천사 |2006.10.26 07:21
조회 324 |추천 0

 

 

 

 

 

 

 

 

 

 

 

 

 

 

 

 

 

 

 

 

 

 

 

 

『종이학』 - 노향림(1942~ ) - 우리 아파트 바로 위층엔 신혼부부가 세들어 삽니다 원양어선을 타고 결혼식 다음날 떠난 신랑을 기다리는 그녀는 매일 종이학을 날립니다. 한두 마리 날아오르다가 수십 마리가 우리집 베란다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중 몇 마리는 아직 허공을 날고 있습니다. 날개 없는 학을 무엇이 날려주는지 모른 채 나도 마저 손 흔들어 줍니다. (중략) 불현듯 그대에게 날려 보낸 학 한 마리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종이학' 부분

 

 

 

베란다에 서서 학 접어 날리기. 날개 없는 종이학을 무엇이 날려주는지 모른 채 매일 매일 푸른 허공을 향해 종이학을 날리기. 학과 함께 푸른 하늘을 날다가 필경은 어느 먼바다를 달리는 원양어선 한 척과 만나기. 그물을 걷어 올리는 사내는 참치 무리 속에 낀 종이학 하나를 발견하겠지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것이 결혼식 다음날 떠나온 신부의 사랑의 징표인 줄도 모르고…. - 곽재구<시인> -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 올릴 때』 - 고정희(1948~91) -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 앉은 일일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 올릴 때. 남도 해지는 마을 저녁 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 잔에 어스름히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 올릴 때' 전문

 

 

 

생은 가난과의 싸움이다. 고상한 것, 아름다운 것, 우아한 것들을 향해 생의 노는 쉼없이 저어 나가지만 가난은 가장 질기고 혁혁한 장애물로 그 앞에 존재한다. 어떤 이는 하루 한 끼의 국수를 마련하지 못할 만큼 가난하고 어떤 이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신의 재산을 빠짐없이 후손에게 물려줄 방법을 연구하느라 밤을 새운다. 마음이 황폐의 극에 이른 탓이다. 어떻게 가난을 극복할 것인가…. 살아 생전 누이는 눈빛이 참 맑았다. 두 손으로 밥그릇을 들어 올리고 청빈과 순명의 시간들을 목멘 달빛으로 드넓게 지켜본 탓이리라. - 곽재구<시인> -

 

 

 

 

 

 

 

『책꽂이를 치우며』 - 도종환(1954~ ) -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책꽂이를 치우며'전문

 

 

 

평생을 학문에 바친 이가 있었다. 천문학·수학·의학·물리학·철학·음악·문학…. 그가 생애에 저술한 책의 종류는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생애에 그는 많은 상을 탔으며 죽었을 때 또한 같았다. 평생을 미화원으로 산 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거리의 골목과 학교와 병원· 술집들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쓰레기 하치장으로 날랐다. 먼지 날리는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고 더러는 저녁도 먹었다. 생애에 그가 받은 상은 가난한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뿐이었다. 죽은 후에 그에게 상을 주는 단체도 없었다…. 도대체 지식은,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이 삶을 사랑하는 향기라면 두 삶은 어느 쪽이 향기로운가. 이 비유가 극단적인 것이라고 당신은 말할는 지 모른다. 그래도 어떻게 하면 이 미화원의 삶을 지혜로운 것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 곽재구<시인> -

 

 

 

 

 

 

 

『돌멩이 하나』 - 이은봉(1953~ ) - 아침 산책길 돌멩이 하나 문득 발길에 차인다. 또르르 산비탈 아래 굴러 떨어진다. 저런저런…… 내 발길이 그만 세상을 바꾸다니! 달팽이 한 마리 제 집 등에 지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풀섶 근처… 이슬 방울마다 황홀한 비명. 하얗게 열리고 있다. '돌멩이 하나' 전문

 

 

 

저물 무렵 순천만에 나가다. 가창오리떼의 군무가 부드러운 햇살 속으로 펼쳐지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카드 섹션을 바라보는 것 같다. 흰빛과 회색으로 반짝이는 저 작은 색종이들. 그들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시베리아로부터 날아왔다고 한다. 학명(Baikal teal)은 이들의 본적지를 일러준다. 바이칼 호수. 저 작은 새의 날갯짓과 울음소리는 광대한 시베리아의 초원과 호수에 펼쳐지던 것들이다. 어찌 그들의 몸짓을 단순히 철새들의 춤으로만 부를 수 있을까. 작은 생명들이 어울려 노래하는 지난한 생의 찬미…. 아침 산책길에 문득 돌멩이 하나 발길에 차일 때 화들짝 놀랄 수 있음은 시인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그 작은 돌멩이 하나, 우주의 시원에서부터 비롯되었을지니…. - 곽재구<시인> -

 

 

 

 

 

 

 

『별 이야기』 - 원재훈(1961~ ) - 아가야 별따러 가자 내 작은 손가락만이 저 별을 만질 수 있지. 네가 별을 가지고 놀 때 세상은 마치 네 손바닥처럼 작아지고 세상 일들 모두 한별 두별 세별 저 하늘에서 외롭지 않구나. 아가야 별따러 가자 지난 밤 밤새워 울던 저 소쩍새 울음소리에 잠 못이루며 몸 뒤척이던 저 별 엄마젖 물려서 재워주자. (후략) '별 이야기' 전문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사랑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먼 나라의 이야기. 그것은 아마도 별 이야기일 것이다. 오랜 세월 우리는 별을 보며 살아 왔다. 별을 보며 꿈을 꾸고, 별을 보며 사랑하는 이에게 첫 편지를 쓰고, 별을 보며 먼 곳으로 여행을 하고, 별을 보며 생의 아픔과 번뇌에 눈물을 흘렸다. 아이의 눈에는 그 별들이 반짝인다. 아이의 볼에서 그 별들의 향기가 솟구친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언제부턴가 별은 아이에게서 떠나게 된다. 안개와 먹구름, 천둥과 번개가 별 대신 남는다. 그래도 인간이 절망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한 아이가 어른이 되면 또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다. 잠 못이루며 뒤척이는 별에게 엄마 젖도 물려주며…. - 곽재구<시인> -

 

 

 

 

 

 

 

『그레고리안 성가3』 - 마종기(1939~ )- 중세기의 낡고 어두운 수도원에서 듣던 그 많은 총각들의 화음의 기도가 높은 천장을 열고 하늘을 만든다. 하늘 속에 몇 송이 연한 꽃을 피운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멀고 하염없었다. 전생의 예감을 열고 긴 차표를 끊는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도심을 빠져나와 빈 강촌의 햇살 눈부신 둑길을 걷는다 미루나무가 춤추고 벌레들이 작게 웃는다. 세상을 채우는 따뜻한 기적의 하루 얼굴 화끈거리는 지상의 눈물을 본다. '그레고리안 성가3'전문

 

 

 

틱낫한이라는 스님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걷는 것을 좋아한다. 천천히 걸으며 세상의 이런저런 일을 다 생각하는 것이다. 걷기는 그에게 명상의 다른 이름이다. 송광사에서 그의 도반들과 함께 숲길을 걷는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 세상살이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먹고 자고 싸우고 울고 웃고 끊임없이 아파하는 모든 시간들 속으로 우리는 매일 매일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이다. 미루나무가 춤추고 벌레들이 웃고…. 세상을 채우는 모든 범상한 시간들이 기적만 같다. - 곽재구<시인> -

 

 

 

 

 

 

 

『고드름』 - 김진수(1956~ ) - 인절미 한 조각 들고 창문을 여니 밖으로 흰 고물이 날린다. 떡고물 흐릿한 사이 솔기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의 손길이 하늘 깃 풀어 누비옷을 짓는다. 나무에도 걸어주고 금옥이네 지붕에도 덮어주고 고샅길 싸리울마다 입혀주면은 소복, 사립 켠 고향집 마당이 불빛에 따뜻하다 발자욱도 없이 어머니의 한숨 같은 입김이 굴뚝 위에 피어 오르고 조막만한 아이들의 영창으로 죄인처럼 길게 고드름이 내린다. '고드름' 전문

 

 

 

고드름은 거꾸로 자란다. 세상에서 태양의 반대편으로 성장을 해나가는 것은 아마도 나무뿌리와 고드름뿐일 것이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오래 선다. 뿌리가 깊은 고드름이 진짜 겨울을 빚는다…. 어린 시절 고드름으로 칼싸움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초가지붕을 타고 내려온 고드름을 꺾어 조무래기들이 모여 전쟁놀이를 하는 것이다. 부딪치면 금세 깨지고 부러지는 얼음칼의 성질 탓에 이 칼싸움의 시간은 의외로 길었다. 부딪는 흉내만 내고 진검은 서로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가 얼음칼이 부러지면 함께 모여 아이스크림인 듯 동강난 고드름을 빨기도 했다. 나무뿌리가 생의 근원이라면 고드름은 겨울의 근원이다. - 곽재구<시인> -

 

 

 

 

 

 

 

『고요』 - 이원(1968~ ) - 시간을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의 아삭거리는 속살에 닿는 칼이 있다. 시간의 초침과 부딪칠 때마다 반짝이는 칼이 있다. 시간의 녹슨 껍질을 결대로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이 제 속에 놓여 있어 물기 어린 칼이 있다. 가끔 중력을 따라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칼이 있다. 그때마다 그물처럼 퍼덕거리는 시간이 있다. '고요' 전문

 

 

 

사람과 사람 사이, 풍경과 풍경 사이…. 그 모든 사이에 시간이 머문다. 오랫동안 나는 시간은 머무는 것이라 생각했다. 머무는 시간과 시간 사이에 인간의 욕망이 덧칠해지면서 지상 위에 포연과 상처와 슬픔들이 쌓여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싸움과 고통들 사이 사이에 시인과 화가, 자비심에 찬 철학자와 음악가·성직자들의 꿈이 가끔 버무려져 사랑의 빛이 반짝, 빛나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시를 읽어가는 동안 젊은 시인의 상상력이 옆구리를 꾹 찌르고 들어온다. 모든 시간 속에는 칼이 들어 있다고. 칼은 중력을 따라 용수철처럼 튀어오르고, 그물 속의 물고기처럼 퍼덕이며 튀어오른다고…. 그런 시간만이 버팅기며 생의 언덕을 오를 수 있다고…. 그런데 그렇게 언덕에 오른 시간들의 칼은 누가 또 감싸주지? 젊은 시인은 나직하게 대답한다. 고요…. 문틈의 아침 햇살 속에서 그를 느낄 때가 있다. - 곽재구<시인> -

 

 

 

 

 

 

 

『촛불』 - 김귀례(1952~ ) - 나의 눈물을 위로한다고 말하지 말라. 나의 삶은 눈물 흘리는 데 있다. 너희의 무릎을 꿇리는 데 있다. 십자고상과 만다라 곁에 청순한 모습으로 서 있다고 좋아하지 말라. 눈물 흘리지 않는 삶과 무릎 꿇지 못하는 삶을 오래 사는 삶이라고 부러워하지 말라. 작아지지 않는 삶을 박수치지 말라. 나는 커갈수록 작아져야 하고 나는 아름다워질수록 눈물이 많아야 하고 나는 높아질수록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촛불' 전문

 

 

 

불은 우리의 기억을 따뜻하게 되살려 준다. 어둠 속에서 성냥을 그어 담배 한 개비를 물 때,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를 때, 칠흑의 바다에서 등대의 불빛을 바라볼 때, 야간비행을 하며 사막마을의 불빛을 내려다볼 때…. 불은 춤추며 우리들 기억의 가장 아래 마을까지 내려온다. 잠시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보는 것이다. 그 순간 불은 우리들 마음의 화사한 거울이 된다. 촛불은 인간의 가장 오랜 벗의 하나다. 모든 불들이 촉촉하고 따뜻하지만 인간의 방 내부에까지 함께 들어와 거주하는 불은 드물다. 불은 인간의 숨소리를 듣고 인간은 불의 숨소리를 듣는다. 생의 숨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법. 그것은 무릎을 꿇는 일이다. - 곽재구<시인> -

 

 

 

 

 

 

 

『화광동진(和光同塵)』 - 황지우(1952~ ) -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날, 이제 보는 것을 멀리하자! 눈앞에서 모기들이 날아다닌다 비비니까는 폼페이 비극시인의 집에 축 늘어져 있던 검은 개가 거실에 들어와 냄새를 맡더니만은 베란다 쪽으로 나가버린다. TV도 재미없고 토요일에 대여섯개씩 빌려오던 비디오도 재미없다.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건 자꾸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뜯긴 지붕으로 새어들어오는 빛띠에 떠 있는 먼지 나는 그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화광동진(和光同塵)' 전문

 

 

 

그에 관한 몇 개의 기억이 있다. 시집 『전당포 아리랑』이 나왔을 적 출판사의 주간은 나를 비오는 강남터미널까지 배웅해 주었다. 푸른색 비닐 우산 아래 몸을 반씩 적시며 고통스러운 서울의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우산 위에서 신비하고 나직한 음악소리가 났다. 한 줌 코스모스 씨앗을 남기고 승희가 세상 떠났을 때 그의 프라이드를 타고 섬진강으로 갔다. 석양녘의 보리 익는 냄새 속에서 미친 듯 울다가 웃다가 나란히 서서 죄없는 강물줄기에 오줌을 뿌렸다. 성철 스님의 다비식이 있던 해인사에서 밤 사이 누군가가 차에 펑크를 냈다. 차의 주인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바람이 불고, 천천히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시간이 왔다. - 곽재구<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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