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유럽의 초등 교육에서는 시의 교육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 가정교육도 그러하다.
프랑스의 어머니는 어린이가 다섯 살만 되면 시를 외게 하고, 독일의 어머니는
저녁마다 어린이에게 시와 신화를 많이 들려주며, 영국의 부모는 셰익스피어의
시와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중학교 일학년 정도면 친구끼리 대화 속에 셰익스피어의 시가 줄줄이
인용된다고 한다.
프랑스의 저학년 어린이들은 시를 듣고 시를 짓는 학습을 자주 반복한다. 예를
들어 비 오는 날은 선생님이 창문을 열어 놓고 어린이에게 비를 보며 생각하게 한
다음 말을 짓게 한다.
'비가 내리네 똑똑똑....' 어린이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엮어 칠판에 쓰고 이 말의
느낌을 한 사람씩 피아노로 표현해 보게 한다. '똑똑똑'의 빗소리가 여러 음정으로
나타나게 하는 놀이가 끝나면 다시 비를 맞고 선 나뭇잎의 하늘거림을 손짓으로
나타내 보도록 이끈다고 한다.
비를 보며 말을 만든 것이 시다. 시에 음을 달면 음악이 되고, 시에 율동을
곁들이면 무용이 되고, 시에 색칠을 하면 미술이 되고, 시에 이야기를 담으면 연극이
된다.
그러므로 시는 모든 예술의 바탕이다. 과학의 기초가 수학이요, 체육의 기초가
육상이듯, 모든 예술의 시로써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어린이들은 사, 오학년만 되어도 난해한 보들레르의 시까지
거침없이 암송하게 된다고 한다.
송시 교육으로 우리는 놀라운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언어가 순화된다. 오늘날 학생들의 언어가 거칠어 가고, 욕설이나 잔인한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좋은 말은 덧셈하고, 나쁜 말은 뺄셈하자고 아무리 가르쳐도
바로잡기 힘든 현실이다. 가정과 거리에서도 거친 목소리는 높아가고 있다.
정치에도, 기업에도, 공장에도, 시장에도 말다툼이 싸움으로 번진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시를 외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시는 바른 말, 고운 말, 아름다운 말을 지니게 한다. 말의 수가 적은 어린이는
지진아가 되기 쉽다.
풍부한 언어를 지닌 사람을 문화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시를 쉰 편 정도 외게
되면 평범한 대화 속에서도 은비늘처럼 빛나는 표현이 구사되고 긴 말을 이어 가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언어의 손톱으로 남을 할퀴는 악담을 제거하고 공동체 사회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기쁨을 누리게 하자면 아름다운 덕담을 많이 하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악담만 들리고 덕담이 소멸된 사회, 그것이 바로 시가 없는 사회다. 유럽의
국회에서는 언쟁으로 소란해지면 누군가가 나와서 시를 낭송한다고 한다. 그러면
장내가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시는 다툼을 가라앉히는 힘도 지니고 있다.
둘째, 글짓기의 능력이 길러진다. 우리 나라 성인들 중에는 편지 한 장 쓰기에도
쩔쩔매는 이가 많다. 편지의 머릿글에 일기나 계절에 대하여 표현하려고 하면
대단히 힘들다고들 한다.
그 이유도 시를 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무 여 편 정도의 시만 암송해도
편지의 앞글에 인용하거나 모방할 만한 구절이 얼마든지 있다.
사지선다형 학습 형태로는 긴 글을 짓는 힘을 기를 수가 없다. 시를 많이 외우면
편지 쓰기, 일기 쓰기, 독서 감상문 쓰기, 기행문 쓰기 등이 쉽고 즐거우며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게 됨을 체험하게 된다. 이리하여 말을 다스리는 능력과 글을
표현하는 능력이 바로 미래를 지배하는 능력으로 뻗어 갈 것이다.
셋째, 마음이 아름다워지게 한다. 지식 위주와 암기 위주의 교육에서 합리적인
생각과 창조적인 사고로 이끌게 된다.
전인 교육을 위하여 우리는 좋은 성적보다 먼저 좋은 성품을 길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육이 삶의 본체를 알게 하는 '교'보다 삶의 방법만을 가르치는
'육'에 치중되어 있음을 본다.
학생들이 시 암송을 통하여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마음을 바로 하게
된다면, 우리는 문화 국민을 기르는 소임을 다하게 될 것이다.
시는 삶을 진실하게 한다. 거친 행동, 비뚤어진 마음을 잠재우는 힘을 지니고
있다. 미움과 갈등, 실망과 좌절, 불만과 분노가 쌓일 때도 시를 낭송하여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을 수 있다.
옛날의 어린이는 영양 실조였지만 오늘의 어린이는 문화 실조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문화 실조를 막는 길도 송시 지도로 가능하다.
오락 지향적이고, 쾌락 지향적이고, 소비 지향적인 청소년들에게 시를 통한 예술
교육으로 정신적 기쁨과 가치를 알게 한다면 2000년대 우리나라는 향락, 퇴폐
풍조가 줄어들 게 분명하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미래 사회의 어지러움은
오늘날보다 몇 배나 더 가증될 위험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학생들은 스승의 이름과 그 모습을 빨리 잊어버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학생들에게 시를 억지로라도 외우게 하면 훗날 그들은 시를 외우며 그 시를
외우게 하던 선생님을 기억하며 은혜에 감사할 것이다.
우선 교과서에 있는 시부터 외우게 하자. 현재 초등학교 국어(읽기)교과서에는
일학년에 일곱 편, 이학년에 열한 편, 삼학년에 열두 편, 사학년에 여덟 편,
오학년에 열다섯 편(옛시조 네 편 포함), 육학년에 열네 편(옛시조 여섯 편
포함)등 예순 일곱 편이 실려 있다. 그리고 중학교 일학년에서 삼학년까지 국어
교과서에 마흔네 편, 고등학교 일학년에서 삼학년까지 국어 교과서에 스물네 편을
합하면 일백서른다섯 편에 이른다.
이 시 외에도 적절한 명시를 찾아내어 낭송하도록 하자. 시는 반드시 외어야
한다. 암송할 수 있을 때만이 그 시의 언어와 생각이 완전히 소유되기 때문이다.
지은이 소개
김수남
"소년 한국일보" 사장.
사단법인 색동회 회장.
중앙 아동복지 위원회 위원장.
제9회 서울 교육상(사회 교육부문) 수상.
사단법인 국민독서문화진흥회 회장.
명예시인.
내일은 시를 외울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방에도 시를 올리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의 시이던 자작의 시이던 시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화적인 다양성이 개인에 따라 표출 되는 것을 시비한다면
그분의 교양이 의심받을 따름입니다.
지켜보다 한 마디 합니다.
시를 사랑하고 글을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좋은 현상이지만 시비를 거는 분들도 있습니다.
건너띄면 그만입니다.
즉, 안보면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취향이란 나의 잣대로 보면 않됩니다.
혼자만의 잣대로 잰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실험이 끝난 공산주의 처럼 모두가 가난해지자는 주장과 같습니다.
하나뿐인 취향이라면 이 세상 살아갈 맛 없습니다.
다양해야 하는 것이 살맛나는 풍요로움입니다.
만약에 이방이 한사람의 취향대로 꾸며진다면 아무도 이방 출입 안 합니다.
시가 싫다거나 태그가 싫다거나 그림이 싫어 진다면 안보면 그만큼 시간 절약 됩니다.
그러나 이방은 신문처럼 내용의 표현이 다양합니다.
저는 더욱더 다양하기를 바라면서 이방 출입합니다.
태그도 하십시요.
글도 올리십시요.
그림도 올리십시요.
시도 올리십시요.
아름다운 음악도 올리십시요.
단지 이방만의 특성을 살리며 지금까지 이루어진 분위기만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저속한 말이나 비속한 그림은 아직까지 이방에서는 없습니다.
그것이 이 방의 자랑입니다.
누구나 자기 사랑과 자기 취향이 있습니다.
정서적인 성숙은 어릴때 형성됩니다.
그것은 감성적인 훈련이 어릴때의 습관이 평생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요즘 말하는 EQ 입니다.
그 정서적인 성숙은 교양있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영향을 보며 아이들은 키우게 됩니다.
그 습관을 부모님들은 가르켜주고 습관들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이밤이 시시비비없는 행복한 밤이 되시길 바라며
감히 몇자 적어 봅니다.
<섬섬옥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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